영화평(영화리뷰) <노트북>
생명종 중에서 인간이 거의 유일무이하게 사랑이란 걸 하는 종이지 싶다. 사랑에 근접한 행태를 보이는 생명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의 유성생식은 말 그대로 번식에 최적화한다. 인간 또한 기본적으로 유성생식에 얽매여 있지만, 사랑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적어도 번식 이상의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믿음이지 증명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예찬하는 감정과 행위가 문명화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최적화한 인간종의 번식법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문명시대 인간의 섹스가 가상 번식행위로 변모한 상황은 번식 회피라기보다는 여전한 번식 고착은 아닐까. 인간이라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이 말한 그저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 그칠 가능성 또한 없다고 할 수는 없기에 숭고하다고 믿는 감정 너머에서 군림하는 DNA의 존재를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존엄
이러한 설명이 맞는지 틀리는지와 무관하게 우리는 이러한 설명법에 거부감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인간이 분명 포유류로 분류되는 생물학적 동물이지만 동시에 무엇인가 존엄한 존재일 것이라는 기대를, 이른바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존엄한 존재로서 다른 존엄한 존재와 배타적이고 환상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생물학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함으로, 사실 사랑은 신앙과 닮았다. 두 가지 모두 넘어섬을 전제로 작동하는 심리기제이기 때문이다. 해명되지 않지만 실재한다는 점 또한 동일하다. 외부에서 보기에 유치하거나 비합리적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겐 진지하고 그보다 더 합리적일 수 없다는 점이 또 다른 공통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영화 <노트북>은 동화같은 작품이다. 사랑의 권능과 사랑에 관여하는 이의 존엄을 감미롭게 증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동화 같다는 말은 클리셰가 많이 동원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동화를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하듯, 또 어른과 달리 스토리의 변용을 싫어하듯, 어쩌면 사랑은 철저하게 클리셰의 영역에 속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란 것은 보편적 감정이어서 나이 성별 신분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에선 비슷하게 느끼고 비슷하게 행동한다.
<노트북>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지만 실화 자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아마 이러한 보편적인 혹은 상투적인 사랑의 구조를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17살의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와 동갑내기 노아(라이언 고슬링)는 서로를 첫사랑으로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신분격차를 걱정한 앨리의 부모에 의해 두 사람은 타의로 헤어지게 되고, 각자의 엇갈린 삶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둘은 24살에 다시 만난다. 강제로 이별을 당한 후 앨리에게 1년을 매일 편지를 쓴 노아의 모습에서 사춘기 첫사랑의 열병을 떠올리게 된다. 첫사랑, 신분격차, 사랑의 훼방과 이별, 재회, 막강한 연적과 벌이는 사랑의 결승전, 사랑의 확인과 함께함까지 전통적인 사랑의 서사가 <노트북>에서 충실하게 구현된다.
이야기의 전환이 빠르지만 알맹이를 놓치지 않아서 사랑의 플로차트에서 빠진 요소는 없는 듯하다. 사랑의 심리나 감정을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게 묘사한 것이 일부 팬으로 하여금 이 영화를 ‘인생 로맨스’로 칭찬하게 한 이유의 하나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매력이 시작과 끝을 집중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사랑한 기간은 극중에서 길지 않았다. 17살의 짧은 첫사랑의 열병과 헤어짐, 24살의 재회와 결합이 얼핏 액자영화처럼 배치된 본 줄거리라면, 치매에 걸린 앨리와 그를 옆에서 지키며 옛날의 사랑을 들려주는 노아 두 사람의 인생 끝자락이 부수적 줄거리로 얽혀 있다. 두 노인은 같은 날 밤에 함께 늙어죽는다. 별개처럼 구성했지만 하나인 이 이야기에서 빠진 것은 시작과 끝 사이의, 더는 극적이지 않고 대부분 평범하며 때로 지루한,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삶이다.
플래시백으로 구성하여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외양을 취하여 젊은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장면으로 끝난 것은,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음을 하는 느낌을 준다. 어떤 이들에게 이 영화가 ‘인생 로맨스’라는 인상을 심어준다면, 동화에서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선언만 있고 실체를 생략한 것과 달리 영화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행복한 결말에서 열정적인 시작을 추적한다.
그러나 행복의 실체는 착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의 사랑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만큼 감독은 같은 시간에 죽는 마무리 설정을 통해 관객에게 그러한 인상을 심어준다. 두 사람 사랑의 실제 삶이 불행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행복한 부부의 삶도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순간의 기쁨을 따라가지 못한다. 정확히 말해 둘은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감정이자 삶의 양태이다. 닉 카사베츠 감독은 다른 두 개를 교묘하게 엮어서 전체로서 하나인 것처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랑이라는 기적
사랑에 흔히 운명이란 단어를 결부시키기 좋아한다.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한 애매한 결부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주체적 관여 없는 사랑의 운명은 없다. 노아가 앨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앨리가 노아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은 그집 앞을 서성이거나 과거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걷는 등 무의식적으로 운명에 자신을 매어두려는 욕망에 근거함으로써 운명적이 된다.
사실 사랑에는 기적이란 없다. 사랑의 기적을 믿는 연인에게 기적이 일어날 뿐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하였듯 사랑은 신앙과 같은 의미에서 기적을 믿고 기적을 성취한다. 필연적 추락이 자신에게만 유일하게 예외일 것이라는 비합리성을 믿고 추앙한다는 점 자체부터 기적이다. 그러나 기적 없는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를 생각하면 다행이다. 영화 <노트북>은 사랑이라는 기적을 교묘하게 다룬 사랑스러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