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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Jan 11. 2021

시한부 인생의 이런 인생 정리법

영화평(영화리뷰) <애프터 웨딩 인 뉴욕>

영화평(영화리뷰) <애프터 웨딩 인 뉴욕>

     

영화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이 영화가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버드 박스> <인 어 베러 월드>를 연출한 수잔 비에르 감독의 <애프터 웨딩>(2006년)을 재구성했다. 큰 얼개는 같지만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이야기를 풀어간 <에프터 웨딩>과 달리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2명의 여자와 1명의 남자가 출연한다. ‘2:1’의 관계는 고정해놓고 스토리텔링의 축으로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채택했다는 차이를 보인다. 극의 구조는 <‘2:1’+1>인데, 여기서 ‘+1’은 세 사람 모두의 딸로 두 영화에서 동일하다. 하나는 아들, 다른 하나는 딸로 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른바 ‘크로스 젠더’ 캐스팅의 주연 ‘2’가 원작의 남성배우 매즈 미켈슨과 롤프 라스가드에서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의 미셸 윌리엄스와 줄리안 무어로 바뀌었다. ‘크로스 젠더’ 캐스팅의 주연 ‘1’은 시드 바벳 크누센(여)에서 빌리 크루덥(남)으로 변경됐다.     


크로스 젠더


이야기는 ‘2’를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원작의 딸의 생부와 양부 대신 <애프터 웨딩 인 뉴욕>에선 딸의 생모와 양모가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이 영화는 인도에서 아동 재단을 운영 중인 ‘이자벨’(미셸 윌리엄스)이 뉴욕의 거대 미디어 그룹 대표 ‘테레사’(줄리안 무어)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제안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단 후원금을 받으려면 이자벨이 반드시 뉴욕에 와야 한다는 기이한 조건이 붙는다. 뉴욕에 도착한 이자벨은 “가방에 돈을 가득 채워서” 가능한 빨리 인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테레사는 후원 결정을 미루면서 이자벨의 뉴욕 체류를 연장시킨다. 테레사는 ‘자신’의 딸 ‘그레이스’(애비 퀸)의 결혼식에 이자벨을 초대하고, 이어진 예식장 장면에서 관객은 이자벨의 시선과 표정을 통해서 곧 바로 비밀을 짐작하게 된다.

줄거리는 단순하고, 쉽게 전개를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은 테레사가 약을 먹는 장면을 두드러지지 않게 노출시키는데, 이게 비극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약간만 민감한 관객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유능한 감독은 화면의 한 컷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2’는 이 영화의 기본구조이다. 죽음과 삶, 끝과 시작, 이별과 재회, 심지어 공간까지. 영화 밖과 안에 걸쳐진 ‘크로스 젠더’ 또한 남성과 여성의 ‘크로스’를 다루기에 이항대립이다.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이항대립을 보여주는데, 그중에 화면을 통해서 확연하게 표출되는 건 공간이다. 주연 배우 줄리안 무어의 남편이자 영화 연출자인 바트 프룬디치 감독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공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토리나 대사로 설명할 수 없는 캐릭터의 디테일과 상황의 맥락을, 제대로 연출된 공간은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의 두 여인은 한 남자와 그 남자의 딸이란 교집합을 갖지만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을 살았기에 공간 설정이 중요했다. 제작진은 테레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장소로 미국의 최대 도시 뉴욕을 골랐다. 세계인이 누구나 아는 도시 뉴욕은 세계의 문화 수도로 상업, 금융, 미디어, 예술, 패션,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한다. 대서양 연안의 아름다운 저택을 테레사 가족의 집으로 선택했고,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의 결혼식 또한 이곳에서 열렸다. 미국인이지만 인생의 절반을 인도에서 산 이자벨이 자신의 옛 연인 및 딸과 조우하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을 이 저택에서 촬영했다. 


미국인으로서 인도에 사는 이자벨은 두 세계에 걸쳐진 존재이다. 인도에서 그는 인도인처럼 살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방인이다. 미국 국적을 보유했지만 뉴욕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뉴욕의 테레사와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이자벨의 공간은 인도로 부여된다. 세련된 세계의 수도와 대칭을 이룰 장소로, 제작진은 인도 남동부의 도시 타밀나두 주의 카라이쿠디를 선택했다. 뉴욕과 시각적으로 한눈에 구분되는 장소를 찾기 위해 수많은 장소를 물색한 결과 적도에서 멀지 않은, 도시이지만 원색이고 가난의 냄새가 풍겨나는 카라이쿠디가 이자벨의 공간으로 결정됐다.


두 사람의 공간은 두 사람의 의상에서 재현된다. 특히 이자벨이 극중에서 고수하는 인도풍 의상은 뉴욕의 대칭물로 고안됐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풍긴다. 뉴욕에서 이자벨은 빌딩의 계단이라든지 인도적이지 않은 장소에서 종종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데, 제작진은 이자벨의 심리와 내면 상황을 그러한 디테일을 통해 표현한다. 요가를 배우는 세련된 뉴요커는 강습시간에 당연히 맨발일 테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거리를 활보하지는 않는다. 맨발의 이자벨이 보여주는 씩씩하지만 불안한 걸음걸이는 뉴욕이란 공간 속에서 그가 노정한 분열을 상징한다.


분명히 할 것은 이자벨이 한쪽 공간만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잃어버린 공간을 복원하며 타자에 대해서는 주인이 사라진 공간을 재생하는 두 세계의 연결자 역할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변증법적 종합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정반합이 ‘뉴욕→카라이쿠디→뉴욕+’인지 ‘카라이쿠디→뉴욕→카라이쿠디+’인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최종적으로 지양되는 존재가 이자벨인지 테레사인지도 불확실하다. 만일 죽음을 잣대로 삼아, 살아남은 이자벨만이 지양된 존재라고 주장한다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 속에 그 형태를 온존하곤 한다는 얘기를 들려줘야 하겠다. 자신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지만 죽음 너머 자신의 연장(延長)-즉 사랑, 가족 등-의 삶의 온상이 되는 죽음을 계획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다루는 죽음이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정교한 혹은 과도한 접점


두 여자 사이에 명시적으로 드러난 연결점은 남자(연인, 아내)와 딸(생모, 양모)이지만, 다른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많다. 그레이스가 새로운 엄마를 만난 나이가 생후 1년쯤이듯 이자벨이 인도에서 자식처럼 사랑하는 아이 제이를 만난 시점도 길거리에 버려진 제이가 한 살 때였다. 이자벨과 테레사가 만나는 시점에, 인도에서 테레사가 돌보는 고아 제이와 테레사의 아들 쌍둥이가 모두 8살로 설정된다. 두 여자의 자식들은 이제 딸(그레이스)에서 아들(제이 등)로 바뀐다. 그레이스로 인해 맺어진 두 여자의 고리가 다음 단계로 확장된다. 굳이 우기자면 여기서도 ‘크로스 젠더’가 일어난 셈이다.


소위 ‘평행이론’ 비슷한 것이 목격된다. 테레사가 그레이스와 인연을 맺는 방식과 이자벨이 제이와 인연을 맺는 방식은 사실상 동일하다. 테레사는 의붓딸이 생긴 연후에 쌍둥이 아들을 낳고, 이자벨은 친딸을 입양 보낸 다음에 길거리에 버려진 아들을 데려다가 자식처럼 키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식(들)을 떠나야 하는 공통의 아픔을 공유한다. 종합은 이자벨에게서 이루어진다. 이자벨은 버린 자식을 되찾고, 옛 연인 아내의 자식들의 새로운 양육자가 된다. 


그러나 8살짜리 남자아이 세 명이 함께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서 인도로 잠시 돌아간 이자벨은 자신이 미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 제이를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인도에 머물고 싶다는 제이의 의사를 파악하고는 그대로 인도에 두기로 한다. 세 명의 아들이 한데 모이는 결말은 너무 과하게 끼워 맞췄다고 느끼게 하여 아마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의 하나는 새집이다. 테레사의 뒷산에서 발견된 새집에는, 공교롭게도 세 개의 새알이 들어있는데, 하나는 완전히 깨지고 두 개는 금이 가 있다. 작의적으로 해석하면 이자벨, 테레사, 오스카의 세 사람 중 사멸할 한 사람과 상처 입었지만 ‘당분간’ 살아남을 두 사람을 상징했다고 할까. 새집은 영화의 대미에서도 등장한다. 거기서는 부화하여 살아남은 새들이 새집을 채운다. 이렇게 살펴보면 영화가 너무 도식적인 것 같지만, 실제 영화의 흐름에서는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진행되어 관객은 명시적 메시지와 함께 무언의 메시지를 함께 안고 돌아가게 된다. 


영화의 멋진 대사 “우리가 세상을 지나는 걸까, 세상이 우리를 지나는 걸까?”의 답은 자명하다. 이 대사 또한 이항대립인데, 이 영화가 추구한 변증법을 감안할 때 우리가 세상을 지나지만 세상 또한 우리를 지나간다고 말해야 한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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