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코로나 인문학>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1년 전을 돌아보니 그때 세상은 지금과 너무 달랐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지만 중국 우한(武漢) 등 일부 지역에서 유행하는 괴질 정도로 받아들였지,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바꿔놓을 줄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 봉쇄, 사회적 거리두기, 비대면 같은 말이 일상어가 될 줄을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
알다시피 2019~21년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인류문명에 치명적 일격을 가해 미증유의 변화를 일으켰고 일으키는 중이다. 그 변화는, 코로나 시대가 지나가고 난 뒤에 마치 코로나 시대가 없었던 듯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다. 러시아혁명, 제1차 세계대전 등과 함께 현대사의 확고한 변곡점을 만들어낸, 즉 불가역적 변화를 만들어낸 또는 만들어낼 세계사적 사건이다. 코로나 이후에 쭉 이어질 변화여서 현생 인류는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게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기후위기 및 4차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하고 있어, 그 자체로 엄청난 코로나의 파괴력이 어느 수준으로 증폭될지 예상하기 힘들다. 분명한 사실은 근대의 질주가 좌초하고 근대성의 패러다임이 더는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식의 한가한 기존 논의 틀로는 해명되지 않을 미래가, 공포영화의 괴물처럼 상상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덤벼들고 있다는 뜻이어서, 인류는 수사(修辭)가 아니라 정말로 진화의 최종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최종단계의 ‘최종’이 시사하듯 인류는 ‘근대’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비약을 이루거나 아니면 근대 이전으로 추락할 것이며 극단적으로는 인류문명 종언의 길에 접어들 개연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어쩌면 모든 게 뒤섞여 나타날 수도 있겠다.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지 말고는 나머지 모든 것이 좋은 변화에 적대적이다. 좋은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당장은 좋은 변화의 의지를 확인하고 다지는 일이 급선무이고,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의지의 연대, 글로벌하고 문명사적인 그리고 세계시민적인 연대를 구축하는 데에 진력해야 하지 싶다.
그러려면 코로나 사태의 원인과 현상을 다양하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분석하여 미증유의 코로나 시대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이 이해에 근거하여 모색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전망과 대안은 당연히 ‘인문학’적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새삼 확인되었듯 비록 타인이 지옥일진 모르지만, ‘인간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인간’이라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코로나가 단순한 감염병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사건이자 세계시민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이유이다.
목차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코로나 전사(前史)를 개관한 뒤 코로나 시대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단초를 찾아내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분석은 분석이고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이해하는 생명체로 진화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해만으로는 인간 존재를 해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주로 이해하지만, 때로 직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수호했다. 또는 결론에 썼듯, 희망이라는 가장 큰 실천을 통해서 존재를 입증했다. 이제 막 들어가는 코로나의 터널에서 인간으로 들어가 인간으로 나올 수 있으려면 결국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든 직관과 희망을 부둥켜안은 채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가 위험과 위협을 과도하게 부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다. 과장이 아니라 그 터널의 끝을 빠져나올 존재가 인간이라고 나는 장담하지 못한다. 혹은 못 빠져나올 수도….
그리하여, 우리에겐 다시 인문학이 절실하다.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미의 대표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árquez, 1927~2014)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대미에서 다음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직관과 희망을 사랑으로 대치하여도 크게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그것은 이 소설의 전언이기도 하여, 존재의 최종심급이 삶이라는 자명한 진실을 독자와 함께 확인하고 싶다.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You are a human
코로나 시대는 인류가 근대 이래 공통으로 처음 체험하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곤경이다. 근대로 발전하면서 쌓인 모든 모순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리하여서 하던 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통렬한 각성이 생겼지만 각성을 실현할 활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곤경의 핵심이다.
여기에다 그렇지 않아도 무섭게 달려오던 4차산업혁명과 AIㆍ포스트휴머니즘이란 미증유의 패러다임이 코로나라는 촉매를 거치면서 접근 속도를 급격히 높이고 있다. 기후위기와도 맞물린 이 새로운 시대가, 별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쿠팡, 넷플릭스, 줌 같은 몇 개의 단어로 요약되고 말 수 있겠지만 반면 다가오는 노도(怒濤)를 예민하게 지각하는 사람은 비유컨대 영화 <매트릭스> 속 인물이 되어 처음으로 ‘매트릭스’를 목도한 심정을 방불케 할 무엇인가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사회모순이 중첩되어 코로나를 계기로 터져 나온 ‘코로나 디바이드’에다 기존 ‘디지털 디바이드’와 새로운 ‘언택트 디바이드’ 등 각종 ‘디바이드’가 난무하는 가운데 ‘인식의 디바이드’ 또한 완연하다. ‘인식의 디바이드’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기에 특별한 현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에 따라 인류 진화의 최종단계에 진입하는 결정적 국면의 극심한 ‘인식의 디바이드’는 인간이 다른 심각한 ‘디바이드’에 적절히 대처하는 데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어떻게 대처하든 모종의 결말을 보겠지만 지금 단계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전혀 새로운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인정(事實認定, fact finding)이 언제나 모든 일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이어온 여러 논의는 사실인정을 위한 기초작업에 불과하다. 그 위에 구축될 ‘포스트 코로나 세계’가 어떻게 시작하고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는 철저히 희망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 희망은 가장 강력한 실천이다. 우리는 여기서 희망과 실천, 혹은 희망의 실천을 논하면서 절대로 빠뜨리지 말아야 할 하나의 원칙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을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2014년)에서 빌려오고자 한다.
두 주인공 톰 크루즈(빌 케이지 역)와 에밀리 블런트(리타 브라타스키 역)의 영화 속 대화 한 대목은 사유와 연장을 근간으로 한 근대성의 확고한 분절을 함축한다. 크루즈가 “나는 군인이 아니야.”(I am not a soldier.)라고 말하자 블런트는 “맞아. 너는 무기야.”(Of course you are not. You are a weapon.)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파생할 포스트휴머니즘 등 적잖은 이야기는 묻어두고, 나는 영화의 대화를 간단히 다음의 대화로 변용함으로써 앞서 말한 원칙을 확인하면서 또한 적절하게도 이 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I am not a soldier.”
“Of course you are not. You are a hu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