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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구조

[국가]3(플라톤)

by 안치용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다. 사회와 정치를 다루는 철인통치 이념에 비해 더 본질적인 철학의 문제를 다룬다. 이데아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보다 플라톤의 세계인식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데아를 설명하려고 만든 동굴의 비유는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동굴의 비유를 잘 이해하려면 비유 안의 배치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비유에서 인간은 빛이 들어오는 동굴의 입구를 등지고 입구 반대편에 놓인 벽을 바라보는 존재로 설정된다. 인간에 관한 설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뒤돌아볼 수 없게 강제돼 있다는 것이다. 동굴 안 인간의 상황이 이렇고, 동굴 밖과 (자기 앞만 바라보게 돼 있는) 인간 뒤편의 상황을 총괄해서 살펴보면, 제일 먼저 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고 그 앞에 실체(이데아)가 놓이며 실체와 인간 사이에 막 같은 게 존재한다. 빛-실체-막은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빛을 받은 실체의 그림자가 막을 투과해 동굴 벽에 투사되고 인간은 투사된 그 상(像)을 본다는 게 동굴 비유의 전체적인 그림이다. 플라톤의 <국가> 본문을 통해 다시 확인해 보자.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주듯 말일세. … 이 담(흉장)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像)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 우리와 같은 사람들일세. 글쎄, 우선 이런 사람들이 불로 인해서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인들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 실상 이들이 일생을 통해서 머리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당했다면, 어떻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플라톤의 <국기> 7권 중에서)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앞만 보도록 한 설정은, 특정한 방향으로 편향되기 마련인 인간의 사고를 잘 설명한다고 볼 수 있어 매우 적절하다.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목격되는 확증편향 같은 현상이 소소한 예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인간은 자신의 앞 동굴 벽에 펼쳐진 그림자를 보며 실체를 추정한다. 상상해 보면, 인지가 작동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점부터 사지와 몸을 결박당한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이 동굴 안에서 그 상태로 살면서 앞만 보도록 한 것은 인간의 사고체계, 고정관념, 이데올로기 등의 탄생과 작동방식을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앞만 볼 수 있고 머리를 뒤로 돌릴 수 없다는 비유의 원초적 한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식의 틀이자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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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림자’만 보는 존재라는 설정과 함께 이 비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장치는 실체와 그림자 사이에 존재하는 막이다. 그리하여 이 막 때문에 인간이 보는 그림자라는 게, 실체든 이데아든 그 무엇의 그림자든 그마저도 직접 투영된 그림자가 아닌 게 된다. 그림자가 막을 통해서 투영되기에 그 막이 만약에 붉은색이라면 비치는 그림자도 붉은 그림자가 된다.


인간의 인식체계 전반을 이해하기 쉽게 구조화한 이 비유는 개인뿐 아니라 집단ㆍ시대 차원에서도 적용가능하다. 막은 개인ㆍ집단ㆍ사회ㆍ시대 차원에서 본원적 인식 한계로 작동한다. 말 그대로 ‘인식의 스크린’ 혹은 미셀 푸코의 용어로는 ‘에피스테메’이다. 이때 막 자체가 판이하게 설정된 혹은 형성된, 개인ㆍ집단ㆍ시대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인식의 간극이 나타난다. 예컨대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저게 공룡이나 사자냐를 두고 벌이는 토론은 모종의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붉은 막을 투과한 그림자와 푸른 막을 투과한 그림자의 색깔을 두고는 어떤 색깔을 보았느냐에 관해 양자간에 결코 합의를 도출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동굴의 비유는 기본적으로 무엇이 진리인가를 판정하는 인식론 모델이지만 ‘무엇이 진리인가를 판정하는’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에 관한 존재론 모델이기도 하다. 즉 평범해 보이는 동굴 비유에는 인간의 삶, 인간의 존재가 외양상 주체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구성된 것일 뿐이라는 심오한 깨달음이 깔려있다.


수 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와 문인의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동굴 비유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본질적인 논점은,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불’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델에서는 타오르는 불(혹은 빛)이 있어야 한다. 불이 있어야 인식 자체가 성립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림자밖에 없는데, 그 그림자마저도 실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실체의 바깥에서 동굴 안으로 비추는 불이 없다면 동굴 안에서 벽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실체와 불 가운데서도 불이 우선한다. 실체가 없고 불만 있다면, 허무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있고 불이 없다면 ‘있음’이 있다 하여도 우리는 ‘있음’을 볼 수 없게 된다. 세계의 종말, 인식의 종말인 셈이다. 근대를 연 계몽주의(啓蒙主義)가 ‘Enlightenment’(영어), ‘Lumières’(프랑스어) 등 불을 포함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계몽(啓蒙)이란 말 또한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과 함께 어둠을 밝힌다는 뜻을 포함해 간접적으로 불을 지시한다.


동굴의 모델에서 불의 존재는 플라톤의 낙관주의를 방증한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불이 타오를뿐더러 실체, 즉 이데아까지 존재하여 인간은 동굴 안에서 동굴 밖을 탐색할 수 있다. 불이 타오르는 세상이 플라톤이 생각하는 세상이다. 반대로 얼마든지 불이 타오르지 않는 세상을 상정할 수도 있었다.


동굴의 비유로 제시된 인식 모델은 ‘그나마’ 이상주의 모델이다. 동시에 이데아와 현실이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원론 모델이란 점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쨌든 희망이란 걸 발견할 수 있다. 희망이란 건 실현가능하기 때문에 품는 것이 아니라, 품을 수 있기 때문에 또는 더 명확하게 말해 품어야 하기 때문에 품는다. 이데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이데아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데아가 존재하기에 이데아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동굴 안의 인간이 결박을 풀고 성난 얼굴로 뒤돌아볼 수는 없을까. 찾아보면 그런 드문 예도 있지 않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불교에서는 결박을 풀고 뒤돌아서서 이데아를 직접 본 그 사람은 부처일 것이다. 또는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선지자일 수도 있다.


이데아와 관련된 희망과 뒤돌아서서 보겠다는 근원을 향한 열망은, 이데아에 직접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여도-거의 직접 도달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존재와 인식을 향상하는 데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자신이 특정 방향만을 보도록 구속되어 있으며,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상이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설치된 특정한 유형의 막을 투과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 이데아를 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시선과 자신 뒤편의 막을 감안해 자신의 인식을 조정해 보다 이데아에 가까운 더 나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철인통치에 대해서는 플라톤도 실현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으리라는 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데아에 관한 고찰은 비록 실현가능성을 따질 수는 없지만, 분명 찬반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모델이란 측면에서, 나는 이 고찰에서 드러난 플라톤의 간절함에 주목하게 된다.


칸트 식으로 말해 인간이 발밑의 진창길을 걷지만 끊임없이 하늘의 별을 보는 존재라고 할 때 이 설명은 이데아를 염원하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몸을 갱신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별을 보는 존재. 인간은 왜 별을 볼까. 별을 본다고 발밑의 남루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별을 볼까.


불이 있고 그 불이 이데아를 비추고 있음을 믿는 한 이데아에 대해 상상하고 파악하기를 멈출 수 없는 그 원천에 대한 열망. 그 열망이 우리가 인간임을 입증하는 근거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분열된 존재로 역사를 일구었는데, 통일된 존재로서 분열되지 않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태고의 경험이 있었다고 많은 철학자나 작가가 상상하듯, 우리는 현존하는 존재ㆍ인식의 분열을 넘어서서 어느 순간 이데아와 접속하는 꿈을 꾼다. 진보주의자의 꿈이다.


그 꿈은 인간 개인이 혼자 꾸는 꿈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꿀 수 있는, 또는 꾸어야만 하는 꿈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진보주의자를 진보주의자로 구별시켜주는 가장 뚜렷한 표식이다. 나 혼자 외롭게 걷는 발걸음이 아니라 더불어 가는 발걸음. 함께라면, 예컨대 어깨 겯고 함께 걷는다면 하늘의 별을 보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진창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데아에 조금씩 다가설 수 있으리란, 조금 평이한 말로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함께라면 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 이 두 가지야말로 진보주의자의 대표적인 덕목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인간 본령에 관한 가장 오래된 진지한 탐색이었다. 분열과 낙담 속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이 믿음에 관해선 플라톤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더 나은 국가를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흔쾌히 플라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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