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2 '플라톤'
플라톤이 생존한 시기에 여자는 전적으로 대상화한 존재, 혹은 온전한 타자였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테나이에서 여자는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처럼 악처가 되든지, 아니면 훌륭한 통치자를 낳는 생식기계가 되든지 정도의 주변적 역할만을 수행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성과 노예 사이의 차이는 미미했다.
플라톤은 혈통을 이야기하면서 재미있게도 개를 거론했다. 혈통에 있어서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관점인데, 현대 유전공학이 알려주는 지식으로도 (물론 관점 차이가 존재하지만) 개와 사람은 대동소이한 생명체이다. 플라톤의 통찰에 암묵지가 개입하였을까.
철인통치와 관련하여 혈통 문제는 이제 양가성을 드러낸다. 개인의 혈통을 부정한 플라톤이 집단의 혈통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개 종자를 개량해 우수한 견종을 만들어내는 동물학자의 태도와 흡사하다. 혈통과 관련하여 인간과 개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플라톤의 태도에서 그를 “열린” 자유주의자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인간개량의 의지를 표명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우생학이 연상되면서 다시 예의 전체주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된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제일 변변찮은 남자들은 제일 변변찮은 여자들과 그 반대로 관계를 가져야 하고, 앞의 경우의 자식들은 양육되어야 할 것이로되, 뒤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네. … 젊은이들 중에서도 전쟁이나 다른 데서 빼어난 사람들에겐 아마도 포상과 그 밖의 상의 주어져야만 하며, 여자들과의 한결 잦은 동침의 자유가 허용되어야만 하겠는데, 이는 이걸 핑계로 동시에 최대수의 아이들을 이런 사람들한테서 얻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일세. … 빼어난 자들의 자식을 받아서는, 이 나라의 특정 지역에 떨어져 거주하는 양육자들 곁으로, 보호 구역 안으로 데리고 갈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반면에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은, 그리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자식으로서 불구 상태로 태어난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듯,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둘 걸세.”(플라톤의 <국가> 5권 중에서)
공동체 차원의 질서와 사회 전체의 진보를 희구하는 플라톤의 입장은 진보주의자의 핵심 덕목에 닿아 있다. 공동체 운영원리로서 철인통치는 사적 소유 없는 철인들이 사익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온전히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는 측면에서 재삼 강조하거니와 특정 혈연 집단의 이익추구에 매몰된 귀족정치하고는 명백하게 달라진다.
그러나 <국가>의 철인통치는 특정 혈연집단의 ‘이익’ 추구로부터는 자유를 획득하지만, 특정 혈연집단 ‘자체’의 구속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이익’에서 벗어났지만 종국에 ‘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간단히 말해 철인은 개인으로서 귀족주의를 극복하지만 집단으로서는 ‘의도와 달리’ 귀족주의를 강화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처자공유라는 아이디어가 공동체 전체에서 시행되지 않고 공동체 내에서 집단별로 구분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관점은 안타깝게도 히틀러 등에서 엿보이는 종의 우생학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은 철인의 후계자를 육성하기 위해 최선의 남자들이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잦은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논리로 ‘변변치 않은’ 남자들은 ‘변변치 않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다음 단계로서, 최선의 남자들과 최선의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최선’ 가능성이 큰 아이들은 공동체 차원에서 잘 양육되어야 한다. 당연히 개인들이 각자 제 자식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다. 공동체가 아이들을 부모들과 격리시켜 공동으로 양육하는 방식이 적용된다. 최선이 아닌 남자들과 최선의 아닌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생존 확률은 불가피하게 줄어든다. 최선의 남자들과 최선의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최선’ 가능성이 떨어지는 아이에게도 비슷한 운명이 제시된다. 우생학과 다윈주의가 함께 작동하는 무시무시한 체제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모자람 있는 인간이 그와 똑같이 모자람 있는 자손을 생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자는 요구는 가장 명석한 이성의 요구이며, 그 요구가 계획적으로 수행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인간적인 행위를 뜻한다.”
인용문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가져온 것이다. 종(種)과 민족의 요구를 최상위 가치로 수용한 나치는 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전체주의 사례로 간주된다. 시기를 무시하고 말하면 플라톤의 철인통치 집단 구상에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사실이다. 거기에다 비록 순진한 수준이긴 하지만 정치공작 사고까지 가미된다. 즉 동침과 관련하여 교묘한 제비뽑기 또는 정교한 추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추첨을 조작하면 저 변변치 않은 사람들이 운을 탓할 뿐, 통치자들을 탓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추첨을 조작해서 최상의 남자들이 최상의 여자들과 많이 잘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다른 이들은 “아,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이다.
그렇다고 플라톤과 히틀러를 같은 부류로 묶는다면 언어도단이다. 히틀러가 순도 100%의 전체주의를 지향했다면 플라톤은 단지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상했다. 플라톤의 구상에 어쩔 수 없이 히틀러적인 요소가 섞여 들어갔을 뿐이다. 비록 그것이 같은 성분이라고 하여도 히틀러에겐 100%로 나타나고, 플라톤에겐 10% 미만으로 나타나, 플라톤의 사상은 히틀러와는 판이하게 다양한 성상을 풍성하게 발휘할 수 있는 합금으로 변형된다고 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사상은 전혀 다르다.
히틀러의 거대한 근대국가 독일과 인구 21만여명의 소규모 정치공동체인 플라톤의 아테나이는 규모 외에도 많은 측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에 두 사람의 사상 또한 각자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살던 시대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노예제 또한 보편적이며, 장애인 인권 같은 개념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인간 등급이 확연하고 폴리스 간에 물리적인 충돌과 다툼이 만연한 시대 상황에서 검토된 결과론으로서 유사 우생학과, 자유ㆍ평등 같은 천부인권이 널리 받아들여져 계몽주의를 거치며 공식적으론 인간 등급이 철폐된 세상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된 시대착오적인 본격 우생학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단언컨대 플라톤이 시대를 바꿔 히틀러의 위치에 있었다고 하여도 결코 나치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자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