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스트를 마다한 마키아벨리

'군주론'1(마키아벨리)

by 안치용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년)는 근대의 문턱에 해당하는 르네상스 시기에 지금의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인 <군주론>에 대해서는 그 내용에 관한 찬반양론이 격렬하고 논란 또한 여전하지만 고전 필독서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반면 ‘마키아벨리의 사상 혹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추종하는 경향’인 마키아벨리즘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가 역력한 듯하다.


마키아벨리즘에는, 피도 눈물도 없이 목적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악마적 현실주의 느낌이 들어있다는 것이 대중의 막연한 인식이다. <군주론>을 읽은 사람은 물론 읽지 않은 사람까지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에 따라다니는 부정적인 뉘앙스는,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제안한 정치의 방법론이 매우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기에 생겨났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래 어쩌면 맞는 말이긴 해. 한데 좀 불편하네.” 이런 반응이 아닐까.


군주 혹은 정치적 지도자 가운데 스스로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동양이라면 흔히 공자 등을 인용하며 덕치 같은 것을 내세웠을 것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정치적 덕목을 앞세우지, 설마 마키아벨리스트적인 속내를 겉으로 드러낼 리는 없을 터이다. 따라서 공개적인 마키아벨리스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지도자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역사에서 마키아벨리스트로 불릴 법한 사례로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있긴 하다만, 트럼프에겐 마키아벨리스트라는 평가가 너무 과하다는 반론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알다시피, 정치에서 혹은 외교에서 내용상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국제정치에서는 예외 없이 마키아벨리즘이 작동한다. 덕치란 포장만 요란하고 실제론 마키아벨리적 사고로 무장한 정치가들이 국내외 정치를 지배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1513년)에서 하는 이야기는 정치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직면하는 대다수 사례와 일치하기에, 읽게 되면 치부를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진다. 그러한 맥락에서였을까, 마키아벨리 사후 교황청은 1559년에 그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계몽군주로 알려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선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1740년에 “마키아벨리는 틀렸다. 국가보다는 국민의 행복이 중요하다”며 즉위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반(反)마키아벨리>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실제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에 개입하여 슐레지엔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마키아벨리스트의 면모를 뚜렷하게 보인 인물이다.


정치철학 입장에서는 후대의 장 자크 루소나 버트란트 러셀 등에 의해 재평가받았다. 같은 이탈리아인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를 재평가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의 사상 자양분으로 흡수하였다. 열렬한 이탈리아 민족주의 조각가 이노센조 스피나치는 마키아벨리의 가묘에 “어떤 찬사도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다”라고 새겨 넣어 최고의 존경을 표시했다.


정리하면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론>은 찬반양론이 맞서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의를 인정받고 있는 반면 <군주론>의 사유 중 부정적인 측면들을 행태적으로 집약한 마키아벨리즘은 여전히 기피된다. 개인적으로는,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와 예민한 기피 자체가 <군주론>의 ‘인문적 성취’의 징표 중 하나라고 판단한다. 누구나 그렇게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구태여 드러내는 방식, 즉 외면하지만 엄연한 현상을 낱낱이 까발려서 독자의 가슴에 콕콕 찔러주는 방식에서 마키아벨리즘이 서 있는 위치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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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스트였을까 하는 흥미로운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모종의 정의가 필요한데, 마키아벨리즘이 <군주론>에서 피력된 마키아벨리의 사상(이것에 대해서 존재하는 논란은 그냥 넘어가고)만을 의미하는가, 혹은 <군주론> 외 마키아벨리의 다른 저서에서 드러난 사유까지 포함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마키아벨리의 전체 사상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분류법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편의상 마키아벨리즘은 <군주론>을 통해 특정하게 대표되는 부정적이고 불편한 사유체계로 보아도 무방하지 싶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스트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마키아벨리즘은 마키아벨리가 원한 마키아벨리즘이 아니다. <군주론>에 국한하여도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즘 너머에 위치한다. 이 글에서는 <군주론>을 통해 이러한 이중성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도록 하자. 오랫동안 지속된 히스테리에 가까운 격렬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사실 <군주론>의 내용에서 아주 특별한 것은 별로 없다. 정치철학적 함의와 역사주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속류(俗流)적으로 해석하면 <군주론>의 이야기는 15~16세기 피렌체의 삶이자 21세기 한국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일부 내용을 회고해 보도록 하자. <정치학>에는 ‘정체를 보전하는 방법’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는데, <군주론>과 흡사해서 흥미롭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재정체, 특히 참주정체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억압정책의 시행을 제시한다. 억압정책의 목표는 세 가지이다. 첫째, 피치자들이 기를 펴지 못하게 하라. 박정희 정권에서 공안(公安)기구를 비롯한 폭력적인 국가제도를 동원하여 국민 사이에 전반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나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편 것 등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두 번째는, 피치자들이 서로 불신하게 만들어라 이고, 세 번째는 피치자들의 정치가 활성화하지 않도록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어라 이다.


통치자의 분식(粉飾) 방법에 대해서도 말한다. 공익을 위하고 국가를 잘 관리한다는 인상을 주고, 품위 있는 처신과 군사적인 능력으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부하에게도 큰 권력을 맡기지 않음으로써 반란을 예방하고,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피치자들을 화나게 하지 않는 등 참주정체를 유지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론을 한비자나 마키아벨리 수준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체를 보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사소한 것이라도 불법은 경계해야 한다’, ‘대중에게 속임수를 써선 안 된다’, ‘공직자들은 공정해야 한다’, ’상벌은 분명히 해야 한다’, ‘공직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 등과 같이 지금의 기준으로도 타당하고 훌륭한 기준을 동시에 제안하였고 민의 지배와 법치 같은 민주주의의 뼈대를 수립하였다.


크게 보아 이 주제에 관한 한 마키아벨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사이에 크나큰 차이는 없는 것이 아닐까. 군주로 성공하려면 좋은 법과 좋은 군대를 가져야 한다 정도의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과도하게’ 합리적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견해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마키아벨리가 생존한 시기까지는, 일단 어긋나기 시작하면 많이 어긋난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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