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2(마키아벨리)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우리가 상상하는 공정한 방관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의 ‘공정한 방관자’는 <도덕감정론>의 핵심 개념이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공정한 방관자(또는 관찰자)의 시인(是認)과 동감(同感)이 인간에게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즉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한다’이다.
생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표현을 자신의 묘비명(墓碑銘)에 넣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 애착을 가졌다. 실제로 그의 묘비명엔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그러나 묘비명에 <도덕감정론>과 함께 <국부론>이 포함되어,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소망과 달리 후대에 주로 <국부론>의 저자로 전해진다.
(아담 스미스 자신이 아닌 스미스를 보는 외부) 관찰자의 시인과 동감, 그리고 아담 스미스 본인의 소망 간의 이러한 간극이 말하자면 아담 스미스 철학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아담 스미스 문제’(Adam Smith Problem)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담 스미스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사회를 추동하는 핵심 에너지원이 ‘동감’(도덕감정론)이냐, ‘이익’(국부론)이냐 하는 의견의 충돌이다. 물론 이 충돌은 늘 일어나고 언제나 결론을 맺지 못하지만 ‘아담 스미스 문제’가 제기된 건 흥미롭게도 스미스란 한 사람 안에서 이러한 상충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보다 생존연대가 빠른 마키아벨리에게도 ‘아담 스미스 문제’와 유사한 상충이 목격된다는 것이 전공자들의 의견이다. 한쪽에서 ‘악마의 사도’라고까지 비난하지만 다른 쪽에선 근대 정치의 지평을 연 선각자라고 칭찬한다. 또한 군주제 옹호자라는 널리 알려진 인식과 반대로 일각에서는 그를 공화주의자라고 칭한다. 이러한 마키아벨리 안의 상충은 ‘아담 스미스 문제’에서 드러난 스미스의 상충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이 현상은 앞서 언급한 대로 마키아벨리에게서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즘 외에 다른 사유를 담은 마키아벨리즘이 존재하기에 빚어진다. 또한 마키아벨리즘을 ‘속류적’ <군주론>으로 해석한다 해도,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저자로서 책 속에서 현실주의자의 탁월한 혜안과 날카로운 안목을 과시했지만 역사적 현실 속의 구체적 개인일 때 정작 자신은 운명의 여신으로부터 배신당해 불우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평생 피렌체 사람으로 조국 혹은 고향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살았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두 물결이 합쳐지던 격동기인 1469년 피렌체에서 4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참고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마키아벨리보다 14년 뒤인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마키아벨리 가문은 피렌체 명망가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엔 가세가 기울어진 상태였다. 피렌체의 주인인 메디치 가문이 세력을 떨칠 때 마키아벨리가(家)는 크게 힘을 펴지 못했고, 특히 1460년에 피렌체 대학의 법학교수였던 당숙 지롤라모가 반(反)메디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이후 가문은 더욱 영락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Bernardo Machiavelli)는 경제적으로 무능했으며 많은 빚을 졌고 끝내 그 빚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제적 무능과는 대조적으로 베르나르도는 그리스ㆍ로마의 인문학에 깊은 열정과 문헌학적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인문학적 열정으로 인해,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하였듯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마키아벨리는 좋은 스승에게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7살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성장하면서 르네상스 시기 최고 인재의 자질을 갖추었다. 그가 피렌체 대학에 진학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나 문필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소양을 쌓았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마키아벨리는 29살인 1498년에 피렌체의 제2서기국의 일원으로 피선되어 공직에 나간다. 비교적 어린 나이인 그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이례적이다. 아마도 당시 피렌체가 정치적 격변기에 처했기 때문일 것이다. 격변기의 중심인물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년)였다.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기독교적 공화정을 실험하던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의 신부 사보나롤라가 그즈음 실각하였고 그해 5월 23일 아침에 그와 그를 따르던 두 명의 도미니코 수도사가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마키아벨리는 그해 2월 사보나롤라가 아직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에 치러진 선거에 나가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에게 패배하였다. 사보나롤라가 몰아낸 메디치 가문의 복귀를 모색하는 파벌에 속하지 않았지만, 사보나롤라 세력과도 거리를 두었기에 당시 정치지형에서는 선거 승리를 기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보나롤라 정권이 무너지고 사보나롤라를 화형에 처한 직후인 같은 해 6월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앞서 사보나롤라 추종자에게 패배를 당함으로써 크게 보아 반(反)사보나롤라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이런 의도하지 않은 상황은 반(反)사보나롤라 국면에서 당연히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보나롤라 실각과 함께 그를 지지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대거 숙청당하면서 마침 재능 있고 패기 넘치던, 서른 살이 안 된 마키아벨리에게 역량을 펼칠 행운이 찾아온 상황과 별개로, 사보나롤라의 정치실험이 이후 종교개혁 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정치사상사에 유력하게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후대의 이 같은 평가를 알 리 없는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사보나롤라를 잠깐 언급하고 지나갔다. 짧은 언급이지만 마키아벨리가 사보나롤라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은 그의 반(反)기독교 성향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