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자신의 영혼보다 더 사랑한 이탈리아인

'군주론'3(마키아벨리)

by 안치용


<로마제국 쇠망사>로 유명한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으로 (로마인 기준으로) 야만족과 기독교를 거론한다. 멸망을 일으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인 셈인데, 기번은 소프트웨어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기독교의 초월적 경향이 로마인을 사로잡으면서 그들의 전투적이고 시민적인 삶의 방식을 도태시켰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북아프리카 히포에서 주교로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연하겠지만 로마제국이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였다.


서로마가 무너진 476년 이후에 1000년을 더 존속한 동로마는 마키아벨리가 태어나기 얼마 전인 1453년에 무너졌다. 반면 로마에 의해 세계종교로 부상한 기독교는 로마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아 마키아벨리 시절에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방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교황청 자체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사실상 하나의 국가로 기능하였다.


마키아벨리 생존 즈음의 이탈리아에는 규모는 다르지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혼란과 대립이 만연했다. 옛 로마제국의 영광은 완전히 잊힌 채 군주국 공화국 신정정치체제 등 여러 정체의 많은 국가가 서로 갈등하고 전쟁을 벌이는 국면이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은 중세의 혼란을 극복하고 군주제를 바탕으로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도정을 밟고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특별한 구심점 없이 소국이 난립한 채 내부적으로 쟁투를 벌였다.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아, 피렌체, 시에나, 로마 교황청, 나폴리 왕국 등으로 잘게 갈라진 이탈리아에서 피렌체인으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강성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한, 지금 기준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정치적 난맥상은 그 후로 오랫동안 이어진다. 반면 문화적으로는 마키아벨리 생존 시기에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으로 유럽 문명의 부흥을 주도하였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학자와 기술자가 이탈리아로 대거 유입되어 인문과 기술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십자군전쟁부터 이어진 일련의 국제 상황은 이탈리아에 초기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생시켰다. 또한 시민계급의 모습이 목격되는 등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상이한 근대성의 모습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마키아벨리에게는 아마도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이나 이탈리아의 근대성이란 것이 만족스럽지 않았으리라. 문예부흥이나 근대성의 맹아 등은 후대의 분석이고 당대인은 역사의 전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마찬가지로, 가정하여 그러한 세계사적 전환을 인식하였다고 하여도 그에게는 통일된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번영이 개인적으로 최상위 가치였기에 큰 관심사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통일된 국민국가를 구성한 상태인 이탈리아 입장에서 또한 이탈리아인의 입장에서 “항의할 법정이 없는 군주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은 그 결과를 본다. 그러므로 군주는 국가를 획득하고 보전하여야 한다. 그때 수단은 늘 고결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란 마키아벨리의 견해는 애국충정이 묻어나는 절절한 호소로 받아들여짐 직하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타개해 보려고 애쓴 애국자의 모습을 떠올림 직하다.


29살에 공직에 나간 마키아벨리는 외교 문서를 쓰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보나롤라 몰락 이후 들어선 피에로 소데리니 정부에서 외교와 전쟁 업무에 배속됐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책사들이 그러하였듯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를 누비며 피렌체의 사활을 건 외교전에 종사하며 상당한 수완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소신이 반영되어 시민군을 주축으로 한 피렌체 군대가 1509년 피사를 회복하는 등 그의 공직에 몇몇 영광의 순간이 있었지만, 약소국 피렌체 공화정의 젊은 외교관은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날개가 꺾이고 만다.


교황은 종교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이탈리아반도의 맹주를 노리는 세속 군주였는데, 마키아벨리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던 시기에 새로 교황이 된 율리우스 2세는 팽창주의를 추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 루이 12세와 대립하게 된다. 1511년 교황ㆍ베네치아ㆍ스페인 동맹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친(親)프랑스 피렌체 공화정은 1512년 4월 라벤나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풍전등화에 처한다. 곧 밀어닥친 스페인군이 피렌체를 유린하고, 교황과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메디치가의 군대가 피렌체 시민군을 격파하면서 이해 9월에 피렌체 공화정은 친(親)메디치 쿠데타로 종말을 고했다. 마키아벨리의 14년 공직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그해 11월 공직에서 쫓겨나면서 피렌체 외곽으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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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513년 2월에는 반(反)메디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른다. 정치보복으로 같이 체포된 사람 중 주모자급들이 처형당하자 이 소식을 접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에게 구명을 요청하는 소네트를 지어 바쳤다. 구명 요청이 주효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가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면서 경사를 축하하는 특별사면 대상자가 되어 구사일생으로 감옥을 나왔다.


<군주론>은 감옥에서 나온 후 조그만 산장에 칩거하며 집필하였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줄리아노가 자신의 석방에 힘써주었다고 믿었기에 줄리아노를 통해 공직 복귀를 도모하며, 애초에 <군주론>을 줄리아노에 헌정할 생각이었다고 전해진다. 교황 레오 10세의 즉위로 피렌체와 로마가 모두 메디치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의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는 다시 정치에 복귀하기란 불가능한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쫓아내고 고문한 세력에게 연줄을 대려고 한 마키아벨리는 어찌 보면 배알도 없는 출세지향의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권력자가 누구든 피렌체를 우선한 애국자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혹은 흔히 영혼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관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까.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유보하자. 우리가 아는 사실은 복귀를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군주론>은 줄리아노 대신 메디치가의 다른 유력자 로렌초 메디치에게 헌정되었지만, 로렌초는 이 책을 들추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책이 후대에 누린 명성에 비해 너무 참담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낭인 생활은 거의 인생 말년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 일어나 요즘 베어 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날은 얼마나 일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벌목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네. 그 축들이란 자기들끼리든 주변 사람들과든 언제나 무슨 말썽거리라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아닌가. ···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렀다가 나는 새를 잡는 곳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한동안은 이러한 달콤한 상념들 속에 잠긴다네. 그 다음에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 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 것 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에는 다시 그 술집으로 가는데, 그곳에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주한 한 사람, 방앗간지기 한 사람 그리고 가마 굽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바로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서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설들. 그뿐인가. 돈 한 푼을 두고는 종종 드잡이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 소리가 멀리 산카시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밟고 있지만, 그래도 여신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
녁이 오면 나는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나를 따뜻이 반겨 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내가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물론 그들도 친절히 답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다네. 나 자신이 온통 그 시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기억 속에 넣어 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것을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De principatibus)』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군주론>을 집필할 당시의 심경을 전할 마키아벨리의 글이다.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 서재에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처연하기 그지없다. 그의 이러한 낭인생활은 공직생활과 엇비슷한 시간 동안 진행되어 1526년에야 원한 만큼의 지위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공직에 복귀했다. 삶의 역설은 마키아벨리의 몰락을 통해서 <군주론>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공직에 머물며 말년까지 승승장구했다면 <군주론>이 탄생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그랬다면 그 삶이 자신에게는 만족스럽고 편안한 것으로 기록되었겠지만 불멸의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을 터이다.


영락한 시기에 남긴 책은, 실각 직후인 1513년에 쓴 <군주론>(발간은 사후인 1532년) 외에도 <로마사논고(원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논의’)>, <피렌체사> 등 여러 권이 있다. 앞서 언급한 ‘마키아벨리 문제’는 그의 저술에서도 발견된다. 내용상 군주제의 옹호라고 비춰질 수 있는 <군주론>을 공직 복귀를 노리며 메디치 가문에 헌정한 반면 <군주론>보다 늦게 저술된, 공화제를 지지하는 반대 성향의 <로마사논고>는 메디치가에 맞서는 공화주의자들에게 바쳤다. 그러나 지금은 전세계적인 필독서가 된 <군주론>은 물론 <로마사논고>가 그의 생전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면이 깎이는 그의 안타까운 인생 행로는 말년에 최종적으로 운명의 조롱에 직면하고 마키아벨리는 이번에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526년에 미관말직을 맡아 공직에 어렵사리 복귀했으나 이듬해 메디치 정권이 또다시 붕괴하고 공화정이 재건되면서 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권의 끝판에 별것 아닌 일을 하고도 부역자 취급을 당해 정치와 공직에서 배제당했다. 이런 사건을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27년 6월 그는 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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