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1(토마스 모어)
16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정치학의 고전, 혹은 ‘정치학’이란 수식어를 빼고 그냥 인류의 고전이라고 하여도 좋을 <군주론>과 <유토피아>가 동시에 저술되었다. 두 책은 500년가량을 세계인에게 읽히며 다양한 방면에서 영감과 통찰을 주었다.
<유토피아>는 <군주론>(1513년)보다 3년 늦은 1516년에 저술된다. 토마스 모어는 1478년에 태어나 1535년에 죽었고,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에 태어나 1527년에 죽었다. 마키아벨리가 모어보다 9년 일찍 태어나서 8년 일찍 죽었으니 생존 기간은 거의 비슷하다. 두 사람의 생애가 물리적으론 겹치지만 아마 면대면으로 만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사로 보면 같은 시대에 속한 두 책과 두 저자의 운명은 달랐다. 마키아벨리가 실각의 좌절 속에서 재기를 노리며 쓴 책이 <군주론>이라면, <유토피아>는 전성기를 앞둔 모어의 패기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탈리아와 영국이라는 지역의 차이 외에 <군주론>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강력한 절대군주를 염원한다면, <유토피아>는 최고의 공화국을 모색한다. <유토피아>에서 그 제목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즉 이상향’을 뜻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지만, 원래 제목에서 공화국을 염두에 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용어는 모어의 창작물이다. 유토피아는 'u'와 'topia'의 합성어인데, 'u'에는 '없다'라는 뜻과 '좋다'라는 뜻이 같이 들어 있고, 'topia'는 장소를 뜻한다. ‘유토피아’에는 이 세상에 ‘없는 곳(no-place)’과 ‘좋은 곳(good-place)’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유토피아>의 원제는 훨씬 길다. “Libellus vere aureus, nec minus salutaris quam festivus, de optimo rei 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 이 라틴어 제목을 영어로 옮기면, “A truly golden little book, no less beneficial than entertaining, of a republic's best state and of the new island Utopia”(강조는 필자)이다. 어떤 공화국이 최고의 공화국인지를 유토피아라는 섬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는, 지금 장르 분류로는 소설이다.
각각 군주정과 공화정에 관해서 기술했다는 것 말고도 두 사람과 그들의 책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살펴보았듯,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사후 가톨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는 등 오랫동안 오욕을 뒤집어쓴 반면 최초에 라틴어로 출판된 <유토피아>는 1524년 독일어, 1530년 불어, 1551년에는 영어로 번역되어 읽히며 널리 사랑을 받았다. 가톨릭과도 각각 판이한 관계를 맺었다. 1935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 칭호를 받은 모어는 생전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면서 가톡릭을 수호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죽자마자 그의 책을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반(反)가톨릭, 혹은 반기독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具體)의 차이에 매몰돼 두 사람 사이의 커다란 공통점을 놓치면 안 된다. 두 사람은 모두 인문주의자로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환경 속에서 바람직한 인류문명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 그려낸 선각자이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맞섰다는 점이 아마도 두 유럽 인문주의자의 가장 큰 공통점일 것이다.
<유토피아>가 500년 전에 저술된 책이지만, 그 제목과 ‘나이’가 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공상적이다, 현실적합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비판한다면 오독했다는 소리를 들을 법하다. 16세기 당대의 기준으로 상당히 이상적이고 선진적인 사회체계를 모색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현대의 기준으로도 여전히 유효한 혜견(慧見)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1권과 2권으로 구성된다. 내용상 ‘권’보다는 ‘부’가 적합해 보이는데, 번역본 대부분이 ‘부’ 대신에 ‘권’으로 표기한다. 모어가 38세인 1515년에 벨기에 안트워프에 머물면서 제2권을 먼저 쓰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와 제1권을 나중에 써서 다음해 두 권을 합쳐서 간행한 것이 <유토피아>다. 그러나 1권과 2권이 별개의 주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앞에서는 풍자로 고발하고 뒤에서는 대안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권’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으로 받아들여진다.
<유토피아>가 당대의 엄혹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책이라고 한다면, 1권에서 가장 주목한 그 시대의 아픔은 ‘엔클로저(enclosure)’이다. 엔클로저는 영국에서 공유지나 미개간지 등 원래 공동체 소유로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땅에 울타리를 쳐서 타인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만든 대대적이고 공공연한 사회적 약탈 사건을 말한다. 흔히 제1차 엔클로저(15∼16세기)와 제2차 엔클로저(18∼19세기)로 구분하며, 모어가 출생한 15세기 말이면 이미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기에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작정하고 이 문제를 거론했다.
엔클로저는 15세기 영국에서 모직물 수요가 늘어나면서 발생했다. 영국의 엔클로저, 즉 공유지 약탈의 역사는 이보다 오래되었지만 15∼16세기와 18∼19세기의 두 시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제1차 엔클로저는 모직공업(毛織工業)의 원료인 양모생산 때문에, 제2차는 산업혁명 이후 급증한 농산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일어났다. 지방의 유력자들이 울타리를 쳐서 공유지와 농민 보유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농민 실업, 농가 몰락, 빈곤 증대, 이농(離農) 등과 같은 커다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모어 같은 당대 지식인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엔클로저는 저지되지 못했고, 수많은 희생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채 과거에 남겨졌다.
두 차례의 엔클로저는 산업혁명 전후에 진행되면서 영국 자본주의 전개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는 농촌에서 일어난 약탈이 사유화를 통한 계급 분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엔클로저에 의해 자기 땅을 잃은 중소농(中小農)은 지주나 농업자본가 밑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아예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공업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근간인 노동계급을 형성한다. 모어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나, 아직 자본주의의 자기전개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지는 못했다. 모어 사후인 1549년 영국 노퍽주(州)에서 농민 케트를 지도자로 하여 발생한 케트반란은 엔클로저와 직접 연결된 농민반란이다.
엔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 발생기(맹아기) 혹은 초기 단계에서 본원적 축적, 또는 원시적 축적과 관련된다. 거시적 관점에서 파악하면 엔클로저 또한 자본주의로 가는 길을 닦은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기계론적 역사관에 근거하여 역사적으로 발생한 것과 같은 엔클로저가 불가피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거나 엔클로저 비판이 무익한 것이었다고 손쉽게 단정하고 넘어가는 태도는 곤란하다. 그 태도는 역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망각한 것으로, 그러한 망각은 인간이나 국가가 거대한 흐름에 휩싸였을 때 그냥 떠내려가는 게 최선이라는 탈(脫)역사적 무력만을 산출하게 된다. 비록 역사의 전체 흐름을 꿰뚫을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확보한 전망 안에서 인간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고 그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쓴 모어 같은 사람의 존재 의의는 확고하다.
농촌에서 진행된 원시적 축적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주는 엔클로저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 어떤 사회적 연원을 갖는지에 관한 생생한 역사적 소묘로 기능할 수 있다. 자본의 발생과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자본권력의 구축 및 공고화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자본의 정치경제학적 특성은 일관되게 관철되는데, 엔클로저 또한 명백하게 정치경제학 현상이었음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엔클로저는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자산에서 테두리를 치는 형식으로, 즉 누군가 테두리 안에다 사유를 형성하고 테두리 밖에다 사유(私有)와 배타성을 선언함으로써 일단 완성된다. 사유화가 일어나면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배제를 통해서, 허술하긴 했지만 그동안 기존 사회안전망에 포괄된 다수의 농민과 지역주민이 사회안전망에서 내쫓김을 당한다. 이러한 축출은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동시에 상대의 동의 없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는데, 아직 근대국가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던 영국 정부는 수수방관하였다. 지역의 공동체들은 균열을 일으키며 극심한 사회변동에 휘말렸다. 장차 근대국가에 포섭될 왕정 하의 광대한 지역에서는, 역사에서 우아하게 ‘자유방임’이라고 표현한 통치권력의 묵인(또는 동조) 혹은 무능 아래 자본의 축적과 전횡,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출현이 목격된다. 시장과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출범케 한 거대한 역사의 첫 단계였다. 그 첫 단계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과정이자 정치적 과정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옛 말에 가난이 심해지면 남자는 도적이 되고 여자는 몸을 판다고 했다. <유토피아>에서도 빈곤과 도적질을 이야기하고 엔클로저와 연결짓는다. “당신 나라의 양떼들이 사람들까지 먹어 치운다”라는 대목이 바로 엔클로저를 직접 비판한 대목이다. 격렬한 사회변동의 시기에는 하층민 혹은 민중이 한계상황으로 몰려 적잖은 숫자가 희생되는 동시에 간혹 예기치 않은 새로운 역사의 흐름으로 연결되는데, 이미 언급하였듯 엔클로저에서도 같은 양상이 전개되었다.
“Sheep are eating men.”, “Sheep devour men.”과 “Man-eating sheep”은 양을 키우기 위해 인간을 짓밟은 당시 세태를 고발한 표현이다. 엔클로저가 테두리 치기인데, 테두리를 쳐놓고 그 안에 인간이 없고 양만 있는 풍경을 두고 <유토피아>에서는 양이 인간을 먹어 치웠다고 지적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양이 인간을 먹는 현상은, 공유지를 포함하여 가능한 많은 땅을 울타리로 둘러막아 목초지로 만들고 양을 키우는 1차 엔클로저 때의 이야기이다. 모어가 목격하지 못한 2차 엔클로저에선 양이 사라진다. 인간이 양에 먹힌 1차 엔클로저는, 모직산업에 공급할 원재료를 생산하기 위해 농촌에 목초지를 가능한 많이 만들고 양떼를 풀어놓았기에 겉보기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연출하였을 것이다. 농촌에서 모직산업에 원재료인 양모를 공급하고 그러기 위해 양을 키웠다는 사실은 그때 요즘 공급사슬이라고 부르는 것의 초보적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또한 전국 단위 혹은 국민국가 차원의 시장의 맹아가 출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전원 풍경에 숨은 사회과학적 의미이다.
1차 엔클로저에서 시장화에 따른 변화를 경험한 농촌은, 자본주의가 본격화한 2차 엔클로저에 이르면 더 강력한 시장화의 압력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차 엔클로저 당시 모직물이란 특정한 상품시장과 수직적인 연계를 구축한 농촌은 2차 엔클로저에서는 노동이란 더 진화한 자본주의 상품과 관계를 맺는다.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도시화와 맞물려 더 확대되고 정교해진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농촌은 식량을 생산하여 노동시장에 공급하는 형태로 재편성되었다. 농촌에서 강제적으로 유출된 ‘1차 엔클로저의 배제자 집단’의 후손은 2차 엔클로저 시점엔 도시의 공업 노동자 집단으로 전환한 상태인데, 농촌은 과거에 먹을 것을 빼앗고 쫓아낸 사람들에게 이제 먹을 것을 공급하게 된다. 1차 엔클로저의 후손을 먹기기 위해 2차 엔클로저의 농촌에선 새로운 약탈과 배제, 희생이 일어났다.
엔클로저가 1차에서 2차로 바뀌면서 인간을 먹어치우는 주체가 양에서 인간으로 바뀐 셈인데, 양을 먹이기 위해 인간을 먹는 것과 인간을 먹이기 위해 인간을 먹는 것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살풍경하였을까. 다행이라고 할까, 모어는 양이 인간을 먹는 것만 보았지, 인간이 인간을 먹는 것은 보지 못하였기에 그의 문제의식은 “Man-eating sheep”에 국한하였다.
모어의 엔클로저 비판은 당대 (지금 기준의 자본가는 아니지만 넓게 보아 자본주의적 자본가라고 할) 자본가에 대한 비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시장이 몇 명의 부자에 의해 거의 빈틈없이 통제될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방치하고 또 이들이 어릴 적부터 구조적으로 타락하도록 조장한다고 한 모어의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라는 세계사적 변동을 인식하기엔 모어의 생존시기에 아직 그 징후가 미미하였다. 그러므로 모어에게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펼친 것과 같은 자본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나타난 징후와 주어진 한계 안에서 모어가 시대의 동향을, 그것도 민중의 편에 서서 인식하고, 고통을 공감하는 한편 고통을 경감할 방도를 찾으려고 애썼다고는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