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기를 살아낸 인문주의자의 죽음

'유토피아'2(토마스 모어)

by 안치용


모어는 자수성가한 법조인 존 모어(John More)의 장남으로 1478년 런던에서 출생했다. 할아버지가 제빵사였던 것으로 보아, 모어의 아버지 때에 가문을 일으켰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존 모어는 판사가 되었고 기사 작위도 받았다.


존 모어는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기를 원했기에 모어가 6살이 되자 학교에 보내어 라틴어와 수사학 등 인문교양을 쌓게 하였다. 르네상스 시기를 살아낸 모어의 아버지와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비슷한 입장이었던 셈이다.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치긴 하였지만 모어의 일생은 대체로 탄탄대로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평온한 죽음을 맞기엔 그의 시대가 격변기였다. 당장 떠오르는 주변 인물로는 <우신예찬>을 쓴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 학자 에라스무스(1466?~1536년)를 들 수 있는데, 에라스무스는 격변기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게다가 <우신예찬>은 런던의 모어 집에서 집필된 것으로 전해진다. 르네상스 시기의 유명한 우정으로 전해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1499년 에라스무스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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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의 주변 인물 중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인물은 헨리 8세였다. 모어의 공직 경력은 헨리 7세 치세에서 시작했지만 헨리 8세(1491~1547년) 궁정에서 꽃피웠다. 헨리8세 치세(1509~1547년)는 영국 역사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기이다.


1523년 영국 하원 의장, 1529년 대법관에 오르면서 그의 정치 인생은 전성기를 맞지만, 1530년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 앤 볼린과 결혼하는 문제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대립하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한 장면에 주역으로 참여하게 되고, 끝내 국왕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1535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죽음을 불사한 이유는 신앙이었다.


가톨릭교도로서 모어는 1521년에 국왕 헨리 8세를 대신하여 <일곱 성사(聖事) 옹호>란 제목으로 루터에 대한 반박문을 쓰는가 하면 대법관으로서는 6명의 개신교도를 화형에 처했다. 그의 개신교도 화형을 두고는, 개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지키기 위한 광신적 행위라기보다는 정치와 종교가 뒤얽힌 혼란기에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이 많다. 대법관에 재직한 시기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 이혼 문제로 빚어진 헨리 8세와 로마 교황청 사이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종교개혁에 부정적이었던 모어는 당연히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질서를 확고하게 수호하고자 하였고, 그런 그가 앤 볼린의 자녀들을 권력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하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헨리 8세 궁정에서 승승장구했지만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자신의 양심을 배반할 수 없어서 모어는 1535년 7월 6일에 처형되었다.


모어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이긴 하지만 모어의 양심이 꼭 종교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그는 <유토피아>에서 드러나듯 공화정을 동경하였고, 현실에서 마주친 군주정에서는 군주정을 받아들이면서도 일부라도 공화정의 요소를 구현하기를 희망했다. 신민(臣民)보다는 인민(人民)을 정치 주체로 선호하였고, 권력의 정당성이 만일 가능하다면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의 동의에서 확보된다고 믿었으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표현의 자유를 중시했다. 1523년 하원 의장을 맡기 전에 모어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고 헨리 8세에게 청원하였다고 한다. 모어는 나아가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는 참주는 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국왕 아래서 신하로 봉직했으나 그의 이상은 현실 훨씬 너머에 존재했다고 하겠다. 그 국왕이 보기에 따라선 참주라고 할 수 있었으나, 모어에게 실제로 참주살해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할 때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고 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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