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리포트>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 백선주(조여정)가 자칭 연쇄살인범 이영훈(정성일)과 인터뷰한다는 특별한 상황 설정하에 펼쳐지는 범죄 스릴러다. 기존 범죄 스릴러물에 비해 공간과 등장인물이 한정돼 있다. 따라서 방 안에 자리한 두 인물의 심리묘사와 주고받는 언어만으로 영화를 전개해야 하는 제약을 뚫고 어떻게 관객에게 몰입감을 끌어낼지가 관건인 작품이다.
조영준 감독이 “혀로 대결하는 칼싸움”이라고 설명했듯, 이 작품은 전형적인 스릴러의 틀을 벗어난다. 영화 성격상 반전이 핵심인데, 소수의 인물로 갈등과 배신의 구도를 만들기에 당연히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뒤집기를 배치하는 연출 능력이 중요하다.
관객과 심리 게임
<살인자 리포트>의 성패는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치밀한 구성일 수밖에 없다. 재미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는 얼핏 등장인물 사이에서 심리게임을 벌이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감독과 관객이 벌이는 심리게임으로 보아야 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주어진 정보를 계속 경신하고 캐릭터 이해를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흔히 말하는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 코드 개념으로 말하면 제작자 혹은 감독이 영화에 의미를 숨겨놓으면[encode)], 관객은 의미를 찾아 해독[decode]한다. 능동적 참여는 해독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때 관객의 해석은 제작자가 던진 그대로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어 받아들이는 방식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사회적 배경이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아예 던져진 의미를 거부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원론상 수용자, 즉 관객이 영화의 최종적인 의미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성 영역이 확대되는, 부호화가 강하게 들어간 영화가 많지는 않기에 대다수 상업영화에서 해석의 여지가 생각보다 많지는 않을 수 있다. 즉 ‘관객의 능동적 참여’는 관객이 영화를 보며 의미를 주체적으로 구성하고, 자신의 개별적 삶에 맞게 영화를 활용하며, 나아가 새로운 창작물로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칭하는 개념이지만, 영화예술의 특성상 능동성과 참여의 범위를 폭넓게 설정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산출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살인자 리포트>처럼 많은 반전을 포함하여 정교하게 구성된 작품이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요청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의미와 해석에 관한 참여는 제한적이다. 서사를 뚫고 가는 과정을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정했기에 관객의 능동성이 필요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이 애초에 확고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서사가 관객으로 하여금 단계별로 여러 단서를 조합하고 추리하도록 만드는데, 이 과정 자체가 능동적 참여의 한 형태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처럼 퍼즐을 맞추는 듯한 구도는 감독이 의도한 반전의 효과에 관객이 몸을 확 던질 수 있게 만드는 영화적 노림수이다.
더불어 이야기의 흐름과 정보의 배치를 매우 치밀하게 통제한 <살인자 리포트>에서는 반대로 관객의 엉뚱한 해석이 방지된다. 특정 시점에 충격, 놀라움 등 정해진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겉보기에는 관객이 추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감독이 깔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셈이다. 능동적 참여가 자유로운 해석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관객은 영화의 설계 안에서만 능동적이고, 과정에서 능동적일 뿐 열린 결말은 배제된다. <살인자 리포트>에 유도된 것과 같은 능동성은 제작자가 설정한 지배적 해독을 더 강하게 압박하는 촉매가 된다.
정의와 선악의 전복
영화는 연쇄살인범인 정신과 의사 영훈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사건의 도입부로 깐다. 더불어 영훈은 법과 제도가 자신의 환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거나, 혹은 가해자들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며, 정의의 실패가 자신에게 국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를 윤리적 딜레마로 몰아넣는다.
영화에서 그는 의무론적 윤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행동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정당화 아래 공리주의적 정의를 선택한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악인을 제거하는 행위를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윤리관의 역전이 일어난다. 영훈이 ‘악인’으로 변신한 동기가 선한 것이기에 그의 행위가 의무론적 윤리에 명백하게 위배되지만, 관객은 감독의 의도대로 도덕적 쾌감을 느낄 법하다.
또 다른 반전은 ‘선인’으로 보였던 인물에게 도사린 악이다. 기자 선주의 연인인 형사 한상우(김태한)가 겉으로는 과잉취재라며 연인을 걱정하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 인터뷰 현장을 감시하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며 선과 악이 역전되고 누가 실제 보호자인지도 헷갈리게 된다. 한쪽이 연쇄살인범이라는 극악한 범죄자이고 다른 한쪽은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정의를 담당하는 사법경찰관이란 설정이 반전을 향한 도움닫기의 발판으로 기능한다. 관객은 이 대칭적 역전 설계의 개연성을 평가함으로써 영화의 완성도를 가늠한다.
인터뷰
영화를 보기 전이나 영화 후반부까지 관객은 영훈이 왜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지, 왜 하필 이 기자와 인터뷰하는지에 관한 궁금증을 풀지 못한다. 당장은 연쇄살인범의 과시형 범죄 고백이거나, 혹은 이 기자가 연쇄살인범에게 협박받을 만한 무엇을 은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 가능하다.
영훈이 던진 “기자님께서 인터뷰에 응하면 피해자를 살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제안의 피해자가 제3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며 인터뷰 현장은 억울한 피해자를 신원하고 악인을 징벌하는 일종의 무대로 기획되었음이 밝혀진다. 영훈은 이 무대에서 신사답게 처신하고 피해자를 살려내면서 동시에 다시 한번 살인을 저지른다. 계획한 대로 무대에서는 완벽한 공연이 펼쳐진다.
이 기묘한 공연은 공연에 그치지 않는다. 영훈은 정신과 의사라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 인터뷰를 또 하나의 치료로 발전시킨다. 영훈은 선주를 자신의 무대에 세워 그녀의 심리를 탐색하고 그녀를 둘러싼 불의를 깨닫게 하며 최종적으로 선주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한다. 물론 살인이라는 물리적 치유가 병행됐고, 자연스럽게 선주 등의 동의를 받아낸다.
관객은 대략 세 가지를 확인한다. 영훈이 실제 연쇄살인범이고, 살인은 자신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술로 환자의 동의하에 이루어졌으며, 선주 또한 의술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감독은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에게 이 사실을 전달한다.
독특한 비질란테
<살인자 리포트>에서 영훈은 일종의 비질란테이지만, 전형적인 비질란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법치주의를 부정하고 사적 징벌을 행사하는 영훈은, 공권력의 무력함에 절망한 피해자의 동의를 받은 징벌의 대리인이 되고자 한다. 전통적인 비질란테는 사법제도의 빈틈을 메움으로써 사회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한다. 공권력의 징벌 독점이 초래한 정의의 비효율을 사적이지만 제도적으로 보완한다. 복수가 아닌 정의가 초점이다.
반면 영훈은 피해자 동의 아래 가해자를 처벌하는 사적 복수의 대행자이다. 따라서 보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응징이 이루어진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닌 특정한 개인의 행복과 치유가 고려된다. 여기서 공리주의 또한 무력해진다. 영훈에게는 사회적 정의의 실현보다 복수를 통한 특정 피해자의 치유가 더 근본적인 동기이기에 기존 비질란테의 문법을 벗어나며, 결국 의무론과 공리주의 같은 윤리관도 비켜난다. 그는 정의라는 사회윤리가 아닌 정신과 의사의 직업윤리에서 징벌 대리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비질란트의 외양을 취하지만 내용상 다른 특성을 보이는 캐릭터의 조정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 영화에 깔려 있는 핵심적인 반전이다. 관객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살인자 리포트>에 깔려있는 인지 부조화는 중층적이다. 연쇄살인범과 기자의 대결을 예상하고 관객은 극장에 들어서지만, 이러한 대결 구도는 영화를 보면서 여지없이 깨진다. 연쇄살인범이 실제로 연쇄살인범임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오히려 점점 그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는 걸 느끼게 된다. 인지 부조화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에 대한 관객의 수용성을 높인다. 예상한 윤리적 틀을 해명하는가 싶으면 다른 틀로 논의를 바꿔버리면서 치유와 복수의 쾌감을 발굴하는 방식이다. 관객에게 중층적 인지 부조화를 던져놓고 단계적 해소를 통해 스릴러의 문법을 전개하는 영화라고 하겠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