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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주 Jan 26. 2020

나의 까미노, 나의 인생길.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km의 순례길을 완주하다.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총 32일간 순례길 걷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사실 첫날 가리비 껍데기를 가방에 달 때까지만 해도 순례길을 걷는 동안 지난 삶을 반추하고, 앞 날을 계획해 무언가 대단하게 새롭게 태어난 나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길에 서니 우습게도 인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나 철학적 성찰은커녕 처음 들어보는 배낭 무게가 주는 허리 통증, 내리쬐는 햇빛에 타들어가는 피부, 발가락 끝에 전해지는 물집 자극과 근육통, 베드 버그 상처 가려움증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길이 주는 고통은 오히려 나를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게 만들었다. 하루 30km를 버티려면 매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온몸의 감각을 깨워야만 견뎌낼 수 있었고 그 순간들이 반복되는 경험은 너무나 경이로웠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배낭 하나에 의지해 노란 화살표만 찾아가면 되는, 오로지 길에만 몰입하면 되는 순례자로서의 삶은 얼마나 치열하게 단순했던가.



  육체가 고통에 익숙해질 때쯤 이 단순한 길은 내게 주변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그 첫째는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경외. 순례자에게 땅은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디딤돌이었고 초록은 잠시 쉬어갈 그늘을 주었으며, 빛은 할 수 있다고 따뜻하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고 메세타 평원을 지나며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의 힘을 빌어 용기를 얻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여실히 느꼈다. 둘째는 결핍 속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삶의 감미. 배낭 무게를 줄여야 하다 보니 강제로 초극단(?)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게 되었는데,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일상의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감사하게 되었다. 셋째는 전 세계에서 모인 순례자들. 같은 목표를 향해 걷는 이들은 나이, 직업, 성별 그리고 국적에 관계없이 서로의 아픈 팔다리를 어루만져주는 친구였고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다정함과 인내, 희생과 품격을 배울 수 있었다. 나의 길은 친구를 만나 같이 걸으며 우리의 길이 되기도 하고 또다시 나의 길이 되기도 했는데, 한 친구는 이러한 가치를 '혼자 걸으면 빠르게 갈 수 있지만 같이 걸으면 멀리 갈 수 있다'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We are all broken, that's how the light gets in.




  그래, 우리는 삶의  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 받고 무너지고 동굴 속에 들어가   이룰 고통에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빛이 들어오는 방법이었다. 길은 나에게 온전히  자신을 돌아볼 여유와 혜안을 선물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나를 힘들게 했던 고집과 아집,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순간들로부터 하나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음의 자리를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 그리고 기도로 채웠을  비로소  길의 의미가 알알하게 다가왔다.


  나의 까미노, 나의 인생길.


  시간이 흐른 지금, 발가락 물집은 딱딱하게 굳은살이 되었고 근육통은 허벅지를  튼튼하게 다져주었다. 포르투에서는 까미노가 끝났음을 인정하기 싫어서 한참을 호스텔에서 나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기도 했다. 내가  위에서 살아냈던 너무너무 그리운 '그때  순간, 그곳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길이 가르쳐 준대로 앞으로도 '지금  순간, 여기에' 살아가 보려 한다.   걷고 나면 다시는 돌아갈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까미노 길처럼, 다시는 돌이킬  없는 나의 인생 또한 고귀하고 신비로운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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