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언론 사이

문학은 어디에 서 있는가

by 글짓는 목수

“느끼지 못한다면 사유할 수 없다.”


사유와 사색의 시작은 언제나 감각에서 비롯된다. 빛, 소리, 냄새, 온도 같은 것들이 먼저 몸에 닿고, 그다음에 생각이 따라온다. 눈과 귀와 코 그리고 혀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오감이 신체적 반응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정신적 사유와 사색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고 작가에게는 글감이 된다. 감각은 상상의 시동을 거는 열쇠이다.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온 문장들 속에서 떠올린 생각 때문에 또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지고 있다.




문학도 예술처럼 감각에서 시작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분명 예술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문학은 늘 예술로만 불리기를 거부당해 왔다. 문학은 언어를 이용한 예술이라는 이유로 때문에 예술도 학문도 아닌 애매모호한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자리를 이어왔다. 학문은 학위가 필요하다. 문학은 학위 없이도 쓸 수 있다. 언론처럼 그 어떤 주장과 생각을 표현하지만 또한 언론처럼 표현한다고 해서 언론처럼 보호를 받지도 못한다. 문학은 늘 그 사이에서 애매한 얼굴로 서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문학이 예술과 언론 사이에 놓인 어떤 중간 지대에 존재한다고 느껴왔다. 이 감각은 문학을 읽을 때보다, 문학을 쓰려고 할 때 더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문장을 쓰는 순간, 우리는 ‘표현’과 동시에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감각을 자극한다. 언론은 사실을 자극한다. 문학은 이 둘을 동시에, 그리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수행한다. 모호하지만 오래 남는다. 감각이 분석되지 못하고 사실이 증명되지 못한다. 그런 감각과 사실이 불러오는 감정은 명확히 해석되지 못해서 더욱 오래 기억된다. 아니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해석 때문에 더욱더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모호한 것과 모호한 사람을 불편해한다. 문학이 불편한 이유이다.


감각에서 출발하지만, 언어로 도착하는 것


그림은 언어 없이도 감정을 전한다. 음악은 설명 없이도 사람을 울린다. 하지만 문학은 다르다. 문학은 반드시 언어를 거쳐야 한다. 이‘언어’, 즉 말과 글이라는 재료가 문학의 축복이자 족쇄다.

언어는 감각을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언어는 언제나 대상을 가리키고, 설명하고, 규정한다. 아무리 시적인 문장이라 해도, 독자는 그것을 읽는 순간 해석을 시작한다. 감각은 한 번 더 번역되고, 감정은 문장 속에서 구조를 갖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은 예술과 갈라진다. 예술이 감각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면, 문학은 감각을 “말하게” 만든다. 그리고 말해진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감각이 아니다. 의미를 품게 된다. 주장처럼 보이고, 태도처럼 읽히며, 때로는 세계관처럼 오해된다. 그래서 문학은 감각에서 출발했음에도, 늘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언론처럼 읽히지만, 언론이 될 수 없는 이유


문학이 언론과 닮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둘 다 언어를 사용하고, 둘 다 세계를 다룬다. 둘 다 현실의 인간과 사회를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은 종종 “왜 이런 말을 했는가”, “왜 이런 시선을 취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언론이 아니다.

언론은 사실을 빠르게 전달해야 하고, 명확해야 하며, 책임의 기준도 비교적 분명하다. 즉시성이 중요하다. 언론은 시시각각에만 살아있는 언어를 쓴다. 반면 문학은 속도를 늦춘다. 영속성을 지닌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난다. 문학은 사건보다 사건 이후의 인간을 바라본다. 팩트보다 의미의 흔들림에 관심을 둔다.


언론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다면, 문학은 “그 일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명확한 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은 언론처럼 읽히면서도, 언론의 기준으로 평가될 때 늘 어긋난다. 너무 느리고, 너무 개인적이며, 너무 모호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날카롭지만 금방 무뎌진다. 문학은 무딘 것 같지만 갈수록 날카로워진다. 언론은 팩트로 거짓을 말하고 문학은 거짓으로 사실을 드러낸다. 그건 당장에는 알 수 없고 시간이 좀 많이 흐르고 나서야 드러난다. 그때가 되면 그 문학은 고전이 된다. 세월을 견딜 수 있는 언론이 바로 고전이다. 그래서 기자는 직업이지만 작가는 소명이다. 간혹 직업에서 소명으로 옮겨가는 자들도 있다. 직업에서 소명을 찾은 자이다.


언론의 책임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책임을 지지 않을 권리를 가진 다는 것이다. 문학은 허구를 쓴다는 전제로 책임을 회피한다. 그래서 언론은 당당하지만 문학은 소심해진다. 거짓말쟁이가 당당하다면 양치기 소년이 된다. 허구를 쓰는 자는 떠들어대지 않는다.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더 무거운가?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문학은 예술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지는가? 나는 책임의 양보다 책임의 노출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술도 책임이 없지 않다. 이미지와 음악은 사람을 선동하고, 감정을 조작하며, 폭력을 미화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종종 “해석의 문제”로 남는다.


문학은 다르다. 문학의 책임은 문장 위에 드러난다. 문장은 발화처럼 보이고, 화자는 작가의 얼굴처럼 오해된다. 그래서 문학은 더 쉽게 비난받고, 더 자주 소환된다. 문학은 늘 “왜 그렇게 말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문학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책임이 언어의 형태로 노출되는 예술이다. 허구로 회피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스스로 그 책임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문학은 늘 불안정하다


문학은 예술처럼 자유롭고 싶어 하지만, 언론처럼 읽히는 순간을 피할 수 없다. 문학은 말하고 싶어 하지만, 말하는 순간 오해될 것을 안다. 이 불안정함이 문학의 약점일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문학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애초에 안정적인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문학은 경계에 서는 예술이다. 사실과 허구 사이, 감각과 사유 사이, 발언과 침묵 사이에 서서 계속 흔들리는 존재다. 강변의 갈대와 산 위의 억새와 같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그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은 종종 불편하고, 즉각적인 쾌락을 주지 않으며, 읽고 난 뒤에도 해석되지 않는 여운과 질문을 남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문학은 오래 남는다. 문학은 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마치 삶에 답이 없듯이….


예술과 언론 사이


문학은 예술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언론처럼 세상과 부딪힌다. 문학은 감각에서 시작하지만, 의미로 끝나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문학은 늘 오해받는다. 너무 말이 많다고, 혹은 너무 침묵한다고. 너무 개인적이라고, 혹은 너무 정치적이라고. 그러나 그 모든 오해는 사실 하나의 증거다. 문학이 여전히 중간 지대에 살아 있다는 증거.


예술과 언론 사이, 아무도 오래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 자리에서 문학은 오늘도 문장을 고른다. 조금 느리게, 조금 위험하게, 그리고 여전히 인간 쪽으로. 삶 속에서...


당신은 어느 쪽에 서 있는가...


Writing early in th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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