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노자 사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by 글짓는 목수

"예수는 플레이보이 같았고 ,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 난 노총각처럼 보였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59p 중에서 -


과거 예수가 플레이 보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는 실제 그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그의 형상은 후세에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는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또한 지도자이다. 시인은 감성적이다. 철학자는 이성적이다. 지도자는 사람을 움직이는 통솔력과 추진력을 지녔다. 이런 남자를 싫어할 여자가 있겠는가? 내가 여자라도 흠모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반면 노자를 떠올려 보자. 길게 늘어뜨린 하얀 수염에 거적때기를 걸쳐 입고 깊은 산 중의 다 쓰러져 가는 암자 같은 곳에 홀로 앉아 궁상을 떨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흡사 '나는 자연인이다'를 촬영하고 있는 주인공과 같다. 어떻게 방송 PD와 스태프들이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세상에 존재의 유무도 알려지지 않고 첩첩산중에서 홀로 유유자적하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다행히 노자의 지혜와 가르침은 산속으로 그를 찾아간 PD와 방송 스텝들에게 잊힐 수 없는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 속세로 내려와 그의 말들을 알리고 다니며 글로 남겼다. 그렇게 노자는 의도치 않게 자신을 후세에 남겼다.


예수는 살아생전 속세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부단히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노자는 속세를 떠나 있음에도 이름을 알렸다. 그럼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 것일까?

예수와 노자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업로드를 하고 공유하며 나를 알리는 것은 예수가 했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을 표현하고 알린다. 퍼스널 브랜딩(Personal Branding)이다. 여러 오프라인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나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은 공동체 사회에서 필수 불가결한 활동이다. 사회는 개인이 홀로 살아갈 수 없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는 너도 나도 잘난 사람들이 많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잘난 사람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구독자와 팔로워가 가장 많은 인플루언서이다. 그는 당시 갈릴리지역과 예루살렘까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문제는 이런 인플루언서가 부와 권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 말로가 좋지 않다. 물론 그 말로가 비극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 더 큰 영향력을 남겼다. 원래 고전은 비극적일수록 더 오래 기억되고 전파된다. 대부분의 고전이 비극인 이유이다.

하지만 만약 노자가 속세에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수염도 깎고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그럴듯한 옷을 갈아입고 대중 속에서 강연을 했다면 그도 예수처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임영웅처럼 수많은 여성들이 따르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 마음만 먹으면 플레이 보이가 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하지만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 날 때까지 자연 속에 머물다가 몸이 고장 날 때까지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유기농 혹은 자연식을 해서 내분비선이 건강했으리라 보지만 자연 속에서도 노화를 막을 순 없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52p 중에서 –


예수는 상승하는 나선형 고리이고 노자는 무한 반복하는 닫힌 윤회의 고리이다. 사실 나선형 고리는 상승과 하강을 구분할 수 없다. 전동 스크루 드라이버를 사용해 봤는가? 넣기와 빼기로 나선형 스크루의 전진과 후진은 조정한다. 무엇이 앞이고 뒤인가? 알 수 없다. 그저 상승하고 전진하는 것이라 믿고 싶은 것뿐이다. 과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모두 상승하고 전진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가 왕이 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그들은 하강과 후진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노자는 현명한 것일까? 그 자리에서 돌고 있는 원이랑 전진(상승)과 후진(하강)을 구분할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것이랑 무엇이 다른 것일까?

[너무 시끄러운 고독] in 별다방

소설의 주인공(한탸)은 어둑하고 더럽고 음침한 지하실의 종이 파쇄기 옆에서 시끄러운 소음에도 불구하고 35년간 수많은 책을 읽었다. 사회와 정부가 허락되지 않은 금서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고전들까지…. 그는 그 많은 책을 읽으며 아마도 종국에는 이 두 가지의 큰 세계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고전적으로 보이는 낭만주의 예수와 낭만적으로 보이는 고전주의 노자의 모순적인 두 가지 모습이다.


근원으로의 전진 vs 미래로의 후퇴


근원은 자연의 속성이고 미래는 속세의 속성이다.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서 발버둥 치는 것은 발전하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예수는 미래로의 전진을 외치며 속세에 모습을 드러냈고 노자는 근원으로의 후퇴를 읊으며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70p 중에서 –


하지만 지하실에서 교양을 쌓은 주인공은 세상이 예수와 노자를 빌어서 알리려는 것의 이면을 스스로 깨친 모양이다. 노자는 근원으로의 전진(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었고 예수는 미래로의 후퇴(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라고 스스로 깨달았다. 나처럼 쾌적하고 아늑한 카페와 도서관에서 수십 수백 권의 책을 읽어도 알 수 없는 것을 그는 너무도 시끄럽고 더럽고 음침한 곳에서 읽으며 깨달았다. 쾌적하고 편안한 학교와 학원이라는 공간에서 전문적인 교수법을 익힌 교사들과 전문 강사들에게서 배우고 익혀도 알 수 없는 것은 그들도 그렇게 배웠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과거에 배운 데로 다시 반복하는 닫힌 원처럼 혹은 하강하는 나선형의 방식(상승하는 줄 알았겠지만...)으로 다른 이들을 가르치려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교육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교육은 과거 보단 쾌적해진 교실에서 언제나 칠판 앞 강단에 선 잘 훈련된 교사만을 바라보며 배운다. '잘 배웠는데 왜 잘 살지 못하는 것인가?' 그건 ‘당신의 노력과 성실함의 부족이다’라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가 아닌가….

Writing early in the morning

사회에 필요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 오히려 사람에 불필요한 다수를 만들어 내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랜 시간 경험해도 바뀌지가 않는다. 평생을 교육받지 못한 파지 압축공의 지혜도 따라가지 못하는 교육된 사람들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는 냉혹한 말의 의미도 간파하게 되었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37p 중에서 –

<마태복음 11장 34절>의 말은 틀리지 않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이 명분을 얻는 것은 경전에 나와 있기 때문일까. 모순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은 이 두 모순적인 단어가 왜 함께 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소설인가? 파지 압축기 옆에서 35년을 살아온 자와 톨스토이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세상이 가르치는 것은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모순(부조리)과 전쟁, 구속과 불평이 만연한 세상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인가?

가장 현명한 두 가지 인간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두 가지 부류가 떠올랐다. 하나는 속으로는 만연한 것을 추구하고 지향하며 겉으로는 긍정적인 것을 가르치고 드러내는 자이다. 이 방식은 속세에서 가장 효과적인 성공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살지 않을 것이다. 가면 없이 사는 자는 세상 속에 어울려 살 수 없다. 이 페르소나가 양극단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면 아주 현명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현명한 인간은 소설 속 주인공 혹은 노자와 같은 자일 것이다. 그냥 그런 인간들을 관조하는 자이다. 마치 영화나 소설을 감상하듯이 혹은 신이 인간 세상을 구경하듯이 남 일 보듯이 바라보는 자이다. 구경하듯 볼 수 있는 능력은 세상을 이해했기 때문이고 또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 한탸는 지하에서 노자는 산 중턱에서 그렇게 세상과는 좀 떨어져서 그것들을 관조하듯 지켜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이 두 부류에서 벗어난 이상한 부류가 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간이다. 때문에 그렇게 유명해진 것이기도 하리라. 다만 예수는 절대 현명한 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래서 예수는 현자(賢者)라고 불리지 않고 성자(聖者)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를 성자(聖子)라고 부른다. 뭐라 부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결국 영향력이다.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향력은 현명하지 않은 멍청함이 만든 것인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은 때론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곤 한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한탸도 스스로 압축기에 자신의 몸을 밀어 넣은 것일까...


프라하의 어느 음침한 지하실에서 35년 간 쥐들과 동고 동락하는 인물에게서 이런 통찰을 얻게 될 줄이야. 35년간 매주 예배당에서 예수의 말을 들어도 알지 못했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책의 서문에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 in 좋아서 하는 카페 (덕천) 독서토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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