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과 등단 사이

어디에 오를 것인가...

by 글짓는 목수

등산은 자신과의 승부이지만 등단은 자신과의 승부가 아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등단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노력하고 인내하고 쓰고 또 써도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오를 수가 없다. 등산은 누구에게나 노력하는 자에게 공평하게 정상을 허락하지만 등단은 그렇지 않다. 이건 들판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행운에 가깝다.




Blue Mountain in Aus


1월 1일 아침, 어느 신문사에서도 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등단에 실패했다. 1년이 넘는 시간 수 없이 투고와 응모를 있어갔지만 누구도 나의 글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행히 몇몇 브런치의 독자들만이 꾸준히 나의 글을 지켜봐 왔다. 그 덕에 계속 써내려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하다. 표현은 일종에 인정 욕구와도 같아서 계속 무시되면 의욕도 점점 사멸되어 간다. 물론 이제 그런 인정 욕구에 크게 목매지는 않는다. 다만 작가라면 일말에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다. 적잖은 시간 독서모임을 하면서 같은 책을 읽어도 읽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나뉜다는 것을 알았다. 문학은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공모전은 소수 평가자의 취향에 맞춰야 하지만 그 소수의 취향을 알 길이 없기에 마치 복권과 같은 확률에 도전하는 것 같다. 더욱이 사람들의 글 수준이 상향 평준화 되면 더욱 그렇다.


신춘문예, 작년에 이어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제 바야흐로 전 국민 글쓰기 시대가 도래한 모양이다. 나도 그 경쟁에 참가한 한 명의 선수였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 선수 같은 기분이다. 언제부터인가 글쓰기가 마치 올림픽 종목처럼 되어버린듯 하다. 사상 유례가 없는 경쟁 속에서 등단한 작가는 실력 있는 작가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리라. 작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생각을 바꿨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글쓰기는 바둑처럼 승부의 세계가 아니다. 명확한 평가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 글의 특성이다. [먼저 온 미래]에서 장강명 작가는 이런 문학과 바둑의 세계를 차이점을 비교해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우월을 가려야만 하는 습성을 지녔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권위와 명예가 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 또한 그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응모한 것이 아닌가?

신춘문예 응모

내 글은 문예공모나 출판사의 구미에 그다지 당기지 않는 글인가 보다. 10편의 소설(중편 1, 단편 9) 중 하나 정도는 당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기대를 키우면 실망도 커진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동안 써온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였을 것이다. 공부와 운동은 등산처럼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글은 그런 것이 없어 막연한 기대만을 품게 한다. 희망고문이다.

왜 나는 그 자들의 평가에 기대려 했을까?


어리석었다. 이건 평가자들이 우월하기 때문인가? 그들의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우리는

항상 그런 몇몇 권위자의 주관적인 평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평가 기준이 없는 종목에서 까지도. 그건 세상의 시스템이 그런 권위자와 전문가의 평가와 판단으로 다음 권위자와 전문가엑 바통을 넘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기성 문학(旣成文學)에서는 이렇다 할 충격적인 혹은 획기적이고 놀라운 그런 감흥 같은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 1년이 넘게 독서모임에 찾아다녔다. 독서광들과 함께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변화된 점이 하나 있다면 갈수록 외서 쪽으로 눈길이 옮겨 간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발간되는 최신 문학은 결이 비슷한 것들만 계속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한국의 문학은 작품이 아닌 시장의 상품으로만 취급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건 국내 영화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자금줄에 허덕이는 독립영화는 점점 사라져 간다. 문학예술계도 양극화다.


문학에 철학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감성은 터치하지만 그 어떤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달음이나 놀라움은 부족하다. 마치 마동석의 보증 수표 영화와 같다. 재미있지만 여운이 없다. 눈물은 나지만 뜨겁지는 않다.

독서 모임 - 시벙

"국내 문학은 다 거기서 거기 같아요."


독서 모임에서 많은 이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외서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확실히 외서는 그런 틀을 깨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물론 번역의 역할도 큰 것 같다. 이제 번역 수준이 뛰어나서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는 것이 분명하다. 최근에 독서 모임에서 지인들을 통해 알게 된 듣보잡 외서들이 나에겐 더 큰 영감과 글감들을 던저주고 있다. 물론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책일 수 있지만 모두가 호 하는 책 보다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 내겐 더 의미가 있다. 그건 내가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한다.


나는 모두가 싫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글은 AI가 더 잘 쓸 것이다. AI는 인류가 여태껏 써온 온라인상의 수많은 글들을 수없이 학습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블로그나 개인 SNS에 남긴 일상의 무던한 감동의 글은 지겹도록 학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글은 사람들이 온라인에 공개적으로 업로드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AI에게는 그런 글은 흉내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AI시대 창작과 교육


이제는 창작의 보편성은 사라질 것이다. 문예창작과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과거 그렇게 틀에 짜여진 방식으로 글을 배우고 훈련한 작가들이 만약 계속 그렇게 익숙한 것에 더 끌리고 더 많은 점수를 준다. 그럼 그건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틀에 갇힌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AI시대에 교육은 거대한 변화를 맞이해야 하지만 과거의 교육 방식으로 교사가 된 자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의 교육을 할 수 없다. 이건 모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AI와 공존해야만 하는 시대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AI로 대체되지 않으려면 AI를 어떻게 도구로 쓸 수 있는 인간이 되는 법을 알려주고 훈련시킬 수 있는 스승과 교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권위자와 교사들도 이런 게 처음이다. 이제 창작은 개인이 가진 고유하고 유니크한 생각과 철학 그리고 관념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해진다. 개인만의 고유한 속성(철학), 즉 색채와 문체가 있는 작품만이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한 두 번 잘 쓴 글은 의심받을 수 있다. 글도 AI가 더 잘 쓰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권위자와 전문가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구분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 보인다. 음... 과연 그럴까? 그들은 응시자의 단편적인 한 가지 글만 본다. 단 한편으로 그 작가가 고유의 문체를 가졌는지 알 수는 없다. 작가의 문체는 적잖은 시간을 거쳐온 글들의 흔적들이 만드는 것이다. 권위와 전문 영역은 언제나 변화를 우려하는 입장에 서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과연 AI보다 더 감수성이 높고 더 논리적이며 다방면으로 골고루 공정하게 볼 수 있을까? 나는 이것에 회의적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사실이 확인되면 당선은 취소됩니다.]


모든 신문사와 출판사는 공모전에서 위와 같은 문구를 넣고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은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나는 그들이 AI보다 영민하다고 믿을 수 없다. 이건 이제 AI를 제대로 접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한국에 온 이후 여러 북토크를 찾아다녔다. 이미 기성 작가들도 AI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그 과정 속에서 집필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비중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 당사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글과 말이 같은가?


글은 말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글은 화석화되지만 말은 살아있다. 글은 남지만 말은 소멸된다. 하지만 글이 쓰인 시점에 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의 글이 말과 같은지를 알 수가 없다. 이제 작가는 강연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썼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올 것이다. 언행일치가 아닌 언자 일치가 된다. 지금 많은 작가들이 책을 내면 북토크를 하고 강연을 한다. 이건 자신을 증명하고 글과 매칭시키는 과정이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자의 글을 읽고 싶다. 여전히. AI가 쓴 글이 더 큰 감명과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지금 AI로 만든 영상과 음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살아서 호흡하며 말하는 작가의 눈빛과 고유한 어조까지 오프라인에서 따라 할 순 없다.

어쩌면 이제 문학 공모전은 새로운 검증의 시스템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잘 길들인 AI에게서 상품을 계속 뽑아내는 작가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건 영상과 이미지 그리고 음악 콘텐츠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보다 더 낫다는 평가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문학은 아닐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다만 문학은 삶의 이야기가 작가의 머릿속에서 한 번 살다가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럼 작가의 입에서 다시 한번 재생될 수 있을 것이고 글에서 드러나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말과 글은 하나가 된다.


이제 문학은 글과 말을 함께 검증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가지 않을까? 대중은 문학의 진정성을 믿고 싶어 한다. 말과 글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작가와 작품은 분리된다는 말로 대신할 것인가? 과거 성인(예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들은 그런 글을 우려했다. 변형되고 카피되고 왜곡되어 퍼져나가는 것을….

이제 등산으로 나를 이기는 훈련은 지속하되 등단을 위해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는 글을 쓰진 않겠다.


등산은 이롭지만 등단은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1st suuset in 2026 乘鶴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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