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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8. 2019

완벽하지 않은 삶에 대하여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혜민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들어섰다. 푹신한 소파가 나를 빨아들인다. 졸음이 밀려온다. 그렇게 10분 아니 20분쯤 졸았다. 혜민스님의 책을 끌어안고서... 미안합니다 스님~
  학창 시절 쉬는 시간 10분의 꿀잠이 집중력을 배가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확실이 졸음 후 집중도는 상승한다.
 
   요즘 혜민스님의 글에 빠져들었다.
 사람에 대한 깊은 헤아림이 문장 곳곳에 묻어있어 어느 것 하나 와닿지 않는 것이 없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와 전체적으로 비슷한 색깔을 느낌이다.

  완벽해지려고 하지만 완벽해질 수 없는 인간은 완벽해지려는 과정 속에서 시련과 고난을 받는다. 인간은 신이 되려 하지만 신은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아 보인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닐?

    시선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한국은 타인의 시선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가? 남들이 가니까, 부모가 원하니까, 사람들이 우러러보니까. 자신이 뭘 원하고 되고 싶은지는 잊고 살아간다.

   "How can you love with same sex?"
   "How can you love with different sex?"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만과 필리핀에 있을 때 그곳에서 만나고 알게 된 동성애자들을 직접 겪어보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성적 성향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오랜 세월 자리 잡은 고정관념과 편견이 때문인지 어색함을 감추려 노력하는 나의 모습까진 감추기 힘들었다. 그들도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대만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시켰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동성애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사회 인식의 변화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숨긴다고 바뀌지 않는다. 숨기면 더 음지로 숨어들고 나쁘게 변질되는 것이다. 밝은 곳으로 들러내면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에게 동성애를 권유하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타인의 시선과 간섭으로 그들의 행복이 깨어지는 것이 싫은 것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다. 나의 방식과 현재의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와 나는 적이 되는 것이다.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지금 가서 어쩌려고? 거기선 뭐 쉬울 거 같냐?"
 
"부럽네~ 나도 너처럼 먹여 살릴 처자식이 없음 그냥 훌쩍 떠나버리고 싶네"
  
   적지 않은 나이에 호주로 가겠다는 나의 결정에 응원의 메시지보다는 핀잔과 우려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런 주변의 시선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도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나의 의지와 생각이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더욱 싫었다.
  
  난 성공을 하러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40년간 정해진 틀에 갇혀 달려온 내가 그 틀을 벗어나면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타인과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을 알아가고 내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풀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얘기한다. 도피성 이민이라고 버티지 못하고 실패한 자들의 최후의 선택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 호주라는 나라는 선택받지 못해 도피 온 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곳이다. 전쟁을 피해 가난을 피해 시선을 피해 자신의 나라를 등지고 난민으로 워킹으로 혹은 학생으로 이 땅에서 땀 흘리고 있다. 여기서 만난 많은 이들이 얘기한다.
 
 "적어도 여긴 한국보단 정직하다"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면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과거 힘들게 정착했던 이민자들은 이젠 떳떳한 사회 일원으로 고국의 동포들보다 더 윤택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여기로 오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꿈꾸기 힘들어진 고국들 등지고...

  타인의 시선과 생각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놔두지 마라!


  타인의 시선싫어도 관심은 받고 싶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많은 SNS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찾아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타인의 시선을 피해 온라인으로 숨어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곳에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자신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덜하다.
   아이러니 하지만 나의 행동과 존재의 가치는 결국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人間)이기 때문에...
   중요한 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 진정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고 진정성 있는 표현과 행동이 타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된 나는 잠시 주변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 속에서 나는 더 큰 가식과 위선을 만들어내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행복은 멀어져만 간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많은 SNS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찾아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 가장 두렵다.

  우리는 왜 자신을 드러내길 꺼리게 되었을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그러질 못한다. 사회 전반에 믿음과 신뢰의 가치가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아픔을 나누면 약점이 되고 이용당하는 세상이다. 더 후벼 파고 아픔과 슬픔은 배가 된다.
   
  과거 일본은 식민 지배 시절 우리의 민족적 특성을 잘 이용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한국은 역사적으로 민족 내부의 적(밀정)으로부터 무너졌다.  그걸 이용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다.
 OECD 국가 중 사기 범죄율 1위의 불명예는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속에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선 이웃과 민족도 팔아야만 하는 현실이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 개구리 왕눈이 가사 중 -  
 
  아파도 슬퍼도 혼자 참고 버텨야 한다. 독해져야만 인정받는 세상이 싫다. 여기 호주 한인들은 선인장처럼 살아간다.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독하게 홀로 간다. 반면 다른 민족(중국, 레바니즈, 베트남 등)들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부도 나눠가져 들의 영역을 넓혀간다.
  
   이젠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진 않을까? 내가 완벽하지 않듯 너의 불완전함을 보듬어 주는 관심이 필요하다.

   고통을 피하면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없다.

   인간의 뇌는 고통을 회피하도록 설계되었다.
   선사시대부터 나약한 존재로 수렵을 하며 살아온 인간의 유전자는 위험과 고통을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위험과 고통을 피하기만 해서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사냥을 해야 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적(타 종족)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걸 피하면 결국 굶어 죽거나 적에게 죽임을 당할 뿐이다.
  인류는 그런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 속에서 발전해 온 것이다.  

   다람쥐처럼 일상의 쳇바퀴만 돌리며 주는 먹이만 먹고 살아가는 이에겐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없다.
   고통 없는 편안함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고 나태함은 인간의 몸속에 지방과 귀찮니즘을 축적시키고 면역력 낮춘다. 차츰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끊임없이 의도적인 고통 속에 놓아라"
 
    노동의 고통이 없으면 운동의 고통(육체적)을 찾는다. 영상과 글을 소비만 하는 나태함에 빠지려 들면 글을 쓰면서 다시 생산의 고통(정신적)을 느낀다. 확실히 고통 뒤에 찾아오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 니체 -

  김수환 추기경이나 니체나 성인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성인과 소인의 차이일 뿐이다.

    과거를 답습하는 사람은 과거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주류는 비주류가 되고 과거 비주류는 주류가 된다. 무엇이 주류가 되고 비주류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가치가 미래의 가치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끊임없이 현재의 가치과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이 스스로가 발전하는 길이다.
  
 "야~ (어른이)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해라!"

  과거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도 없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시키는 것인가? 로봇을 갖다 써야지 (뭐 로봇이 비싸서 어쩔 수 없이 나를 쓰겠지만...)
   그렇게 사람을 쓰면서 로봇이 되어주길 바랬던 세상이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인 인간을 양성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만의 방식과 생각이 언젠가 주류가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서 창의가 생겨나는 것이다

   알지만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사랑에 대한 소유욕을 멈추는 것이 아닐까?

   나와 너는 다른 개체이다. 사랑으로 맺어져도 사랑은 결국 감정에 한 종류일 뿐이며 너와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내가 아는 목사님은 아들사랑이 넘치신다. 사람들 앞에서 아들에게 수도 없이 '답정너' 물음을 던지신다.
 
  "**는 누구꺼?"
  "아빠꺼!"
 
  무슨 노랫말처럼 장단을 맞춰서 묻고 답한다. 아이가 대답이 없으면 대답할 때까지 묻는다. 아이도 무의식적으로 대답한다.  

"너는 내꺼~"

  과거 멜로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던 대사이다.
사랑하면 가지고 싶고 소유당하고 싶어 지는 감정이 생긴다. 소유함으로써 안정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구속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소유하면 집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소유했기 때문에 더 상처 받고 아파하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기 전후에도 나의 것이 아니었다.

  감정(사랑)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 실체가 감정에 묻혀버린다. 바람과 기대가 생기고 그(그녀)가 아닌 내가 원하고 바라는 그(그녀)를 만들고 싶어 지는 것이다.  

  과거 나 또한 그러했었고 나를 사랑한 누구도 그러했기 때문에 지금 같이 있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에게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다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저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오는 존재일 뿐이었고,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신의 존재감은 언제나 어머니의 존재감에 가려있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어린 시절 머물던 시공간은 항상 어머니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다른 시공간에 머물고 있었고 나는 그런 당신의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갓 군대를 제대하고 사업한답시고 사고를 치고 집에서 쫓겨났을 때 갈 곳이 없어 아버지를 찾았다. 그때 당신은 여수의 어느 허허벌판  가스관 건설현장에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스케폴딩에 매달려 용접을 하시는 아버지의 아슬한 모습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도우려 현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용접하다 아다리에 걸려 여관방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아픔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며칠 동안 쏟아냈다.

  성인이 되면서 당신 지나왔던 시공간을 알아가고 때늦은 공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오랜 세월 멀어진 감정의 골은 이해와 공감만으론 좁혀지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이해하지만 가까워지기 힘든 관계인가 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망치를 들고 머나먼 타국의 땅에서 아버지가 지나온 길을 내가 다시 걷고 있다. 나의 청소년기 때 아버지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다.

  미래의 아버진 또 어떤 느낌일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내가 만약 결혼을 하고 나의 2세가 생긴다면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를 닮은 녀석이 이렇게 나에 대한 글을 적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겸연쩍은 기분에 닭살이 돋는다.

  그렇게 세월은 나에게 천천히 아버지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갑자기 스며드는 공감은 금세 사라지고 잊히지만 세월과 함께 스며드는 공감과 이해는 해를 거듭할수록 뼈 속 깊이 사무친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다.

  얼마 전 영화에서 본 대사가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기억력이 나빠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살인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슬픔 속에서 벗어나려 살인범을 용서하러 교도소에 면회를 간다. 살인범은 신앙을 얻고 모범수가 되어있었다.

"전 이미 주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내가 널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널 용서한단 말이!"

  부모는 황당했다. 초연한 살인범의 모습에 자비의 마음은 다시 증오 분노로 변해버렸다.
  신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과거의 죄를 씻으려 신앙을 가지고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피해자와 상처 받은 당사자가 아닌 신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용서는 기억의 고통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죄를 지은 고통 속에서 피해자를 만날 수 없는 죄인은 그렇게 신께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기 위해서... 부모는 자신과는 다르게 편안한 모습이 억울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용서를 빌면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습관처럼 죄를 일삼고 습관처럼 신을 찾는다. 주일마다 습관처럼 교회, 성당, 절을 찾는다.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일까? 신앙은 그렇게 오용(誤用)되기도 한다.


  책 속엔 자애, 관계, 공감, 용기, 가족, 치유, 본성, 수용 여덟 가지의 주제에 대해 주옥같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나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삶 속에서 겪은 많은 사건들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재미가 있는 것이다. 희로애락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혜민스님은 그런 희로애락 속에 숨은 진리들을 글 속에 잘 녹아내고 있다.
 
  좋은 글귀들은 사진 속에 저장하고 가끔씩 써먹어야겠다. 마음이 평온이 필요하다면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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