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자유의 여신상

평범한 남자 EP 83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제시카 누나랑 잘 지내냐?"

"어~ 뭐 그럭저럭 왜?"

"그래? 정말 별일 없지?"

"음... 뭐냐?"


동구와 오랜만에 돼지국밥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평소 주말에 부르면 재깍재깍 튀어나와서 나의 술 동무가 되어주던 녀석인데, 몇 주째 다른 선약이 있다는 핑계로 나를 피해왔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마주 앉은 녀석의 말투와 행동이 심상치 않다.


"도대체 뭔데? 이래 뜸을 들이노? 말해봐라"

"아니 요즘 내가 대학가 쪽에 펍에 가끔 가는데..."

"니가 대학가 펍에는 왜?"

"아 그럴 일이 좀 있어서"

"니 여자 생깃제?"

“뭐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그것보다 중요한게 어딧노 이 자식아!”

“제시카 누나를 봤거든”


녀석이 선약을 핑계로 나를 피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여자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묻는 질문에 답변은 않고 느닷없이 제시카의 행적을 나에게 보고한다. 그녀가 펍에서 외국 남자들이랑 섞여서 노는 모습을 몇 번 봤다는 것이다. 그녀는 술에 취해 동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굳이 아는 척을 않고 멀리서 몰래 지켜봤다고 한다.


처음에는 영어 강사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술에 취해 백인 남자 둘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설마! 잘못 본거 아이가?"

"진짜 맞다니까~ 자 봐라! 내 니 의심할 거 같아가 사진도 찍어놨다."

"..."

"괘안나?"

"어~"


녀석의 핸드폰 속에 찍힌 그녀의 옆모습은 밤이라 좀 희미하긴 하지만 그녀가 즐겨 입는 가죽 재킷과 자주 신는 이름 모를 브랜드의 부츠가 눈에 낯익다. 키가 180 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백인 남성 둘 사이에 끼어 양 팔을 두 남성의 목에 감고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사진만 바라보고 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구는 나의 소주잔을 채워주며 한잔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야~ 내 솔직히 그 누나 좀 헤프게 보이더라"

"마 됐다~ 고마해라~"

"그래 알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잊어뿌라"


사실 그녀는 술만 마시면 거침 없어지는 스킨십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성 간의 스킨십은 사랑의 표현이고 당연한 것이다. 다만 나는 아직은 보수적인 한국에서의 남녀 간 애정표현을 사람들 눈을 피해서 해야 하는 관례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해외파 신여성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애정표현의 자유로움이 한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향할 것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날 이후 더 이상 그녀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슨! Are you busy these days? 왜 연락이 없어요?"

"아~ 예 요즘 일이 좀 바빠서요"

"You're so mean~ 여행 갔다 와서 우리 한 번도 못 봤잖아요"

"예... 그렇죠"


제시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 전혀 모른 채, 어떻게 일주일이 넘도록 자신에게 만나자는 얘기를 안 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다. 그녀는 서양 물이 지겨워져 이제 잠시 동양 물을 마시고 싶은 걸까? 그녀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도대체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신체와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픈 그녀의 욕망을 제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제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순간 머릿속에 벌거벗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떠오르며 그녀의 얼굴이 여신상의 얼굴에 오버랩 된다.


"제시카 샘~ 그냥 이제 그만 연락하죠"

"What?! 도슨~ 무슨 말이에요?"

"그냥 이제 누나가 싫어지네요"

"헐~ 어이가 없네요"

"먼저 끊을게요"

"도슨!"

"뚜뚜뚜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그녀의 신체를 구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 자유로운 신체를 다시 탐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갑자기 구토가 올라오려 한다. 화장실로 뛰어간다. 내가 그녀와 체액을 섞던 순간들과 서양 남성들의 나체에 둘러싸여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며 밀려드는 역겨움을 견딜 수가 없다.


"우에엑"


헛구역질만 나온다. 헛구역질에 애꿎은 눈알만 벌겋게 충혈되었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 한잔을 마시고 위를 진정시켰다. 동구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서양 남자랑 몸을 섞은 여자가 한국 남자가 남자로 보이겠나?"


신체적으로 열등한 동양 남자의 의식 속에는 서양 남자에 대한 알 수 없는 적대감과 경계심이 무의식 중에 내재되어 있다. 서양 남성은 과거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의 유전자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반면 바다를 정복하지 못한 동양 남자들은 자신들의 여자들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서양 여성을 여성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열세한 신체적 조건과 왠지 모를 위축감으로 동양 남성과 서양 여성과의 조합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뺏기기만 하고 빼앗지 못하는 수컷은 자신의 암컷을 지켜야 한다. 그것마저 빼앗긴 수컷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


당시 사회적으로 영어 실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특히 영어 스피킹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대학가의 펍에는 영어를 배우려는 한국 여성들이 넘쳐났고 서양 남성들에게 몸과 웃음 주고 영어능력과 교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맹목적인 영어를 향한 동경심으로 가득 찬 여성들을 이용하는 서양 남자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자기 나라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않은 교양 없는 아메리칸 가이들에게는 자신들을 우러러 봐주는 한국은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이었다. 학원가에서는 영어권 원어민들 특히 미국인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비싼 돈을 들려 강사로 모셔가고 있었다. 그들은 특별 대우를 받으며 돈과 여자를 얻을 수 있는 코리아로 몰려들었다.


"띠리 리리"


핸드폰이 울린다. 또 그녀다. 받지 않는다.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진흙탕 싸움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몇 번의 전화가 더 왔지만 받지 않았다.


[야~ 너 뭐야? 내가 장난감으로 보여? 너도 내가 우스워? 이제 영어시험 끝났다고 날 차는 거야?]


그녀가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 메시지에서 그녀의 분노가 느껴진다. 사실 그 분노는 나를 향할 것이 아니라 과거 그녀를 버리고 떠난 아메리칸 보이 프랜드를 향했어야 한다. 그녀는 그녀 몰래 사라진 그에게 그 분노를 풀지 못하고 가슴속 깊이 응어리로 쌓아두고 있었다. 지금 응어리가 폭발하여 나에게로 향하고 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남녀 관계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엇갈림 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긴다.




[어제 밤 부산 시내 대학가 한 모텔에서 30대 중반의 여성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이 여성은 현장에서 발견된 주사기들과 주사기에 남아있는 그녀의 혈흔으로 미루어 필로폰 과다 투여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되는 상황이며 경찰은 모텔 CCTV에서 확보한 화면에서 백인 두 남성이 의식을 잃은 듯한 이 여성을 데리고 모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이에 목격자 찾고 그들의 신원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이야! 저 미친 것들 좀 봐라!”

“저 양키새끼들 여자 약 놓고 강간하고 그러는 놈들이지”

“요즘 대학가에 저런 약쟁이 백인들 많다고들 하데”


꼬치친구들과 오랜 간만에 동네 호프집에 모여 앉았다. 호프집 대형 TV에서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마약 범죄 속보 소식에 손님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 마디씩 한다. 만든다.


동구 녀석이 내가 제시카와 헤어졌다는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다. 슬픔은 술로 달래는 것이 친구들과의 의리라고 생각하는 녀석들이다. 물론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에게 술은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떨어질 수 없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었다. 다들 내 어깨를 두드리며 술을 건넨다.


“자자! 잊어뿌라! 마!”

“여자가 뭐 거 한나 뿐이가”

“그래 내 그 제씬가 제시칸가 그 누나 나도 별로 맘에 안들더라”

“됐다 고마해라!”


나의 심각한 표정에 다들 눈치를 살피며 발언에 수위 조절을 한다. 그들도 내 성격을 알기에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낮게 깔린 나의 음성은 보통 폭발직전에 나오는 톤이라는 것을 그들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항상 나를 폭발직전까지 몰고 가다 후퇴하는 전략이 몸에 배어있다.


“이제 연락은 안 오더나?”

“어! 어제 이후로”

“자 한잔 해라! 내 맘 같은 여자가 어디 있겠냐?”


동구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사랑은 어렵다. 원하는 데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더욱이 갈대 같은 여자의 마음 속은 더욱 더 알 수 없다. 일과 공부야 피땀 흘리면 그 만큼에 보답이 있지만 사랑은 피땀 흘려서 얻는 그런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오늘은 왠지 술이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