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연기하는 인생

평범한 남자 EP 84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아이고~ 도 팀장 어서 와!"

"안녕하십니까 차총경리님!"

"이게 얼마만이야? 그래 본사에는 별일 없지?"

"예"


올해부터 해외 계열사 경영감사가 실시되었다. 그 전까지는 국내 계열사 위주로만 진행되고 해외는 제출 자료로 대체했었지만 올해는 사장의 지시사항으로 해외 계열사도 포함시키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출장지가 연태 DB중공업이었다. 도과장과 둘이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회사 차량을 타고 공장으로 이동했다. 연태공장의 법인장인 차총경리는 회사 사무동 입구에서 나와 우리를 반겨주며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한다.


"도팀장! 회장님은 잘 계시지?"

"예 잘 계십니다"

"이게 얼마만이야 도팀장 핏덩이 신입 때 보고 거의 처음이네"

"예 하하하"


차총경리는 과거 도 팀장이 처음 입사했을 때 본사 전략기획실장이었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당시 어리바리하던 도사원이 우러러보던 그런 인물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도과장(팀장대행)은 과거 차총경리가 이끌던 본사의 기획실 수장이 되어 자신의 공장을 감찰 나온 암행어사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갑을 관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론 직급으로 보나 연봉으로 보나 아직 레벨이 다르긴 하지만 업무 성격상 도과장을 알로 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차총경리는 오랜 기간 DB 중공업에 몸담으며 기획실에서부터 생산, 품질부문까지 거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조선업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자이다. 아쉽게도 학벌과 라인이 없어 부장 이후 DB중공업에서 퇴직하고 회장의 배려로 당시 년 매출이 50억도 안 되는 국내의 신생 선박부품 자회사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3년 만에 회사를 키워 매출 300억 인 넘는 회사로 성장시킨 전공을 인정받아 해외 선박기계사업의 전진 기지(중국 연태)의 수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 여기 인사해 우리 관리부 방차장"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본사 기획실 도도한 과장입니다"

"안녕하세요 기획실 계열사 관리 담당 전희택입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요?”

“아… 아뇨 그럴리가요 하하하”


그녀가 또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낯이 익은 나의 얼굴이 앞 뒤 맥락이 끊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듯 보인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무광의 검은 구두와 하얀 발목 위로 주름 없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검정 투피스 정장 바지를 입고 있다. 지퍼가 반쯤 열린 남색의 회사 점퍼 안으로 카라 있는 블라우스가 유난히도 하얗게 보인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는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이미지다.


사장의 비밀 조사 임무를 받고 와서 뒤를 밟았던 그 방과장, 아니 지금은 차장이 되었다. DB중공업 최초의 여자 차장인 것 같다. 뭐 중국이라는 특수성도 있겠지만 국내에는 아직 여자 차장은 유래가 없다. 더군다나 그녀는 차장이라는 직급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젊다. 남자도 차장 직급이면 최소 삼십 대 후반이나 사십 대가 대부분이다. 삼십 대 중반인 그녀는 이십 대 후반이라고 해도 몰라볼 정도로 안티에이징(Anti - aging) 관리를 철저히 한 듯 보인다.


"도 팀장 감사업무 관련해서는 여기 방차장에게 모두 얘기하면 될 거야"

"예~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저에게 다 말씀해 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차총경리는 그녀에게 전권을 위임한 듯 회사 전반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그녀가 관리하고 있다며 그녀와 상의하고 결정하면 된다고 얘기한다. 유비의 책사인 제갈량쯤 되는 듯하다. 제갈량과 성별만 다를 뿐…


"그럼 방차장이랑 얘기 좀 나누고 있다가 나가자구!"

"예 어디를요?"

"아~ 본사 기획실에서 왕림했는데 거하게 한잔 해야지 안 그래?"

"내 다른 주재원들한테도 다 얘기해 뒀으니 일찍 저녁 하러 나가자구"

"일은..."

"아따~ 거 참~ 필요한 거 있음 방차장한테 얘기해 놓고 내일 와서 하면 되지"

"그러세요 도 팀장님! 필요하신 자료들은 제가 내일 아침까지 다 준비해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그럴까요? 하하하"


그녀는 다소 자연스럽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하게 도과장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런 그녀를 다정한 말과 행동에 암행어사의 본분을 망각한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긴장이 풀리는 듯 보인다.


"그럼 이따가 보자고"

"도 팀장님~ 저희는 옆 방 회의실로 가시겠어요?"

"아~ 네!"


차총경리가 보내는 눈빛 신호를 받은 방차장은 우리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와 총경리 집무실에서의 퇴장을 종용한다. 옆 방 소 회의실에는 각종 차와 커피 그리고 중국산 과자류들이 비치되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머물며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이미 회의실 세팅을 해놓은 모양이다.


"근래에 좋지 않은 일로 본사에 누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드리운다. 좀 전의 미소는 온 데 간데 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도 팀장에게 말을 건네고는 고개를 떨군다.


"얼마 전 저희 재무 직원이 본사에 무리를 일으킨 것 때문에 항상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 직원이 원래 그렇진 않았는데... 승진 누락에 앙심을 품었는지, 직원들을 선동하더니 그리고 또 어떻게 알았는지 본사 사장님께 연락까지 한 모양이더라고요. 모두 제 불찰입니다. 직원들 교육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흑흑"


고개 숙인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눈에서 눈물까지 흘린다. 도과장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눈물 섞인 하소연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연태 공장에 발생했던 사건은 알게 모르게 회사 중역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도과장도 자세히는 아니지만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그녀의 뒤를 밟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그녀와의 가끔씩 마주치는 눈빛에서는 그녀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다. 그녀는 정말 모르거나 아니면 연기력이 아카데이 여우주연상 후보 수준일 것이다.


"아닙니다. 그 일로 방차장님이 심려가 많으셨겠어요. 직원 관리만큼 힘든 일이 또 없죠?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죠 하하하"

"흑흑 그런가요?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띠리리링~"

"你说啥呀? 你事办得这么糟糕啊? 气死人了”(뭐라고? 너 일을 어째 이렇게 엉망으로 처리하니? 정말 짜증 나네)


방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던 그녀는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정색을 하며 언성을 높인다. 좀 전까지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전화기 저편에 있는 누군가를 잡아 먹을 듯이 윽박지르고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도과장도 돌변한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 적잖이 당황한다. 짜인 각본대로 연기를 하다가 '컷!' 사인과 동시에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촬영장의 프로 연기자 같은 느낌이랄까?


"죄송해요~ 급한 업무연락 때문에… 참! 감사 대응을 위해 제가 뭘 준비해드리면 되죠?"

"우선 지금까지 본사에 보고하셨던 수주 매출 금액에 대한 증빙 서류를 좀 준비해주세요, 수주는 계약서로 매출은 세금계산서로 월별 금액과 매칭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희택 씨라고 하셨나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중국어도 잘하신다면서요?"

"比不上你吧"(당신 하고는 비교가 안되죠)

"하하하 과연 듣던 데로 시군요~"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그녀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흥미롭고 성가신 녀석을 만났을 때 악당들이 자주 짓는 그런 표정이라고 할까?


거침없고 당당한 모습이 양주에서 만난 춘옌을 떠올린다. 그녀와 다른 점이라면 그 근원이 하나는 선함이고 다른 하나는 악함이라는 것이다.


때론 선(善)과 악(惡)은 표면적으로 비슷하게 보인다. 선함을 가장한 악함이 있고 악함 뒤에 숨겨진 선함이 있을 수 있다.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이지만, 그것을 아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인생은 평생 내 안의 선과 악의 대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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