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자가 남는 곳

평범한 남자 EP 85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그럼 방차장이랑 얘기 좀 나누고 있다가 나가자구!"

"예 어디를요?"

"아~ 본사 기획실에서 왕림했는데 거하게 한잔 해야지 안 그래?"

"내 다른 주재원들한테도 다 얘기해 뒀으니 일찍 저녁 하러 나가자구"

"일은..."

"아따~ 거 참~ 필요한 거 있음 방차장한테 얘기해 놓고 내일 와서 하면 되지"

"그러세요 도 팀장님! 필요하신 자료들은 제가 내일 아침까지 다 준비해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그럴까요? 하하하"


그녀는 다소 자연스럽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하게 도과장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런 그녀를 다정한 말과 행동에 암행어사의 본분을 망각한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긴장이 풀리는 듯 보인다.


"그럼 이따가 보자고"

"도 팀장님~ 저희는 옆 방 회의실로 가시겠어요?"

"아~ 네!"


차총경리가 보내는 눈빛 신호를 받은 방차장은 우리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와 총경리 집무실에서의 퇴장을 종용한다. 옆 방 소 회의실에는 각종 차와 커피 그리고 중국산 과자류들이 비치되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머물며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이미 회의실 세팅을 해놓은 모양이다.


"근래에 좋지 않은 일로 본사에 누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드리운다. 좀 전의 미소는 온 데 간데 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도 팀장에게 말을 건네고는 고개를 떨군다.


"얼마 전 저희 재무 직원이 본사에 무리를 일으킨 것 때문에 항상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 직원이 원래 그렇진 않았는데... 승진 누락에 앙심을 품었는지, 직원들을 선동하더니 그리고 또 어떻게 알았는지 본사 사장님께 연락까지 한 모양이더라고요. 모두 제 불찰입니다. 직원들 교육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흑흑"


고개 숙인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눈에서 눈물까지 흘린다. 도과장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눈물 섞인 하소연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연태 공장에 발생했던 사건은 알게 모르게 회사 중역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도과장도 자세히는 아니지만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그녀의 뒤를 밟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그녀와의 가끔씩 마주치는 눈빛에서는 그녀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다. 그녀는 정말 모르거나 아니면 연기력이 아카데이 여우주연상 후보 수준일 것이다.


"아닙니다. 그 일로 방차장님이 심려가 많으셨겠어요. 직원 관리만큼 힘든 일이 또 없죠?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죠 하하하"

"흑흑 그런가요?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띠리리링~"

"你说啥呀? 你事办得这么糟糕啊? 气死人了”(뭐라고? 너 일을 어째 이렇게 엉망으로 처리하니? 정말 짜증 나네)


방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던 그녀는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정색을 하며 언성을 높인다. 좀 전까지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전화기 저편에 있는 누군가를 잡아 먹을 듯이 윽박지르고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도과장도 돌변한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 적잖이 당황한다. 짜인 각본대로 연기를 하다가 '컷!' 사인과 동시에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촬영장의 프로 연기자 같은 느낌이랄까?


"죄송해요~ 급한 업무연락 때문에… 참! 감사 대응을 위해 제가 뭘 준비해드리면 되죠?"

"우선 지금까지 본사에 보고하셨던 수주 매출 금액에 대한 증빙 서류를 좀 준비해주세요, 수주는 계약서로 매출은 세금계산서로 월별 금액과 매칭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희택 씨라고 하셨나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중국어도 잘하신다면서요?"

"比不上你吧"(당신 하고는 비교가 안되죠)

"하하하 과연 듣던 데로 시군요~"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그녀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흥미롭고 성가신 녀석을 만났을 때 악당들이 자주 짓는 그런 표정이라고 할까?


거침없고 당당한 모습이 양주에서 만난 춘옌을 떠올린다. 그녀와 다른 점이라면 그 근원이 하나는 선함이고 다른 하나는 악함이라는 것이다.


때론 선(善)과 악(惡)은 표면적으로 비슷하게 보인다. 선함을 가장한 악함이 있고 악함 뒤에 숨겨진 선함이 있을 수 있다.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이지만, 그것을 아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인생은 평생 내 안의 선과 악의 대결인지도 모른다.




“全部张!好久不见”(전부장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哎呀,真没想到在这里再和你见面,林主任!”(이야, 여기서 또 다시 만나게 되네, 린주임!)


양주에 있을 때 영업담당이었던 린주임을 다시 만났다. 그는 연태에 와서 잘 적응을 한 모양이다. 얼굴색이 좋아보인다.


“전부장은 또 뭐야? 희택씨 린주임이랑 둘이 아는 사이야?”

“아 안녕하십니까 노과장님! 잘 지내셨어요?”


사무실에서 노과장과 마주친다. 그는 연태로 발령받아 지금 연태의 영업팀장을 맡고 있다. 그는 린주임의 직속 상관인 팀장이 되었다.


“린주임이 전에 제가 양주에 있을 때 양주 공장 영업 담당이었어요. 제가 소개해줘서 린주임이 여기 연태로 옮겨왔어요. 그리고 양주에 있을 때 거기선 제 직급이 부장이었거든요 하하하”

“아! 그런 일이 있었어? 안타깝네 부장님이 다시 사원으로 내려와서 하하하”

“린주임은 일은 잘 합니까?”

“어 뭐 시키는 일은 잘 하는 편이야, 참 오늘 저녁에 뭐 특별한 일 없지?”

“예 무슨 일이라도?”

“아니 뭐 그냥 간만에 둘이 따로 술이나 한잔하자고 연태까지 왔는데 내가 한잔 사야지 않겠어 그래도 옛 부사수가 왔는데… 하하하”

“예 알겠습니다.”


그날 저녁 총경리는 한국 주재원들을 모아놓고 기획실에서 온 나와 도과장을 위해 회식을 열었다. 연태에서도 꽤 유명한 음식점을 예약했다. 한 눈에 봐도 고급진 산해진미가 하나 둘씩 테이블에 오른다. 다른 한국 주재원들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인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다. 갑을 관계가 바뀌니 대우도 달라진다. 어딜가나 갑은 대접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도팀장! 본사 돌아가면 사장님한테 잘 좀 보고해줘, 여기 연태는 별일 없이 잘 하고 있다고 알겠지?”

“예 그럼요, 연태공장이야 뭐, 계열사들 중에서 제일 잘나가는 회사잖습니까? 매출도 좋고 이익도 많이 나고, 다른 계열사들이 문제죠 뭐, 나머지 계열사들도 연태만큼만 따라오면 그보다도 좋을게 없을텐데 말입니다.

“근데 요즘 다른 계열사들은 많이 심각해?”

“예 다른 계열사들 채무보증 때문에 본사까지 휘청거리려 해요”

“그 정도 인가? 쯧쯧, 그건 그렇고 도과장도 빨리 전략기획실장 자리를 굳혀야 할텐데 말이야. 내 다음에 사장님 여기 방문 하실때는 도과장을 적극 추천해야겠어”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야”

“아냐! 도과장이 나이만 어리다 뿐이지 실력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잖아, 사장님도 알고 계신텐데… 아마도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가 문제지 안 그래?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말이야 하하하”

“하하하 그런가요? 차총경리님 한 잔 하시죠”

“오 그래 도팀장! 자 건배!”


차총경리과 도과장은 쿵짝이 잘 맞아 보인다. 둘은 다른 한국 주재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체 둘이서만 환담을 이어간다. 경영감사를 온 것인지 파티 초청을 받아 온 것인지 헷갈린다.


“도팀장! 우린 한 잔 더 해야지”

“예! 총경리님이 가시자는데 제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차총경리는 도팀장과 따로 나눌 밀담이 있는 건지, 도과장만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늘 밤 도팀장을 제대로 구워삶을 모양이다.


“희택씨야! 우리도 한 잔 해야지”


환영 회식이 끝나고 노 과장과 단둘이 그가 즐겨 간다는 양꼬치집으로 이동했다. 노 과장은 웬만해선 취하질 않는다. 그의 그런 강인한 정신력이 중국 사업의 최고 실무자의 자리에 올려놓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난 그런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희택씨야~ 너 이미 알고 있었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노 과장님?"

"방차장이랑 차총경리의 관계 말이야!~"

"무..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시치미 떼지 말고”


회식자리에서 차총경리의 잇따른 건배 제의로 꽤 많은 양의 빠이주(白酒)를 마신 상태였다. 도수가 40도 넘는 알코올은 빠른 속도로 혈액 속에 녹아 뇌 속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뇌는 나의 시력과 청력의 반응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여자랑 차총경리랑 내연관계가 분명한 것 같애, 내가 발령받아 오기 전에 소문에 듣기로 관련된 이슈가 있었던 것 같아, 전략기획실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 아냐?”

"이..런~ 씨..파알!"

"뭐? 이게 미쳤나? 왜 이래?"

"이… 더~러~운 세상~"


술은 용기를 준다. 그래서 술을 찾는 것인지 모른다. 겁쟁이 인간은 술이라는 신비의 액체를 통해 용기를 얻는다. 안타깝지만 술에 의존한 용기는 무모하고 일시적이다. 그리고 중독된다. 술 먹고 큰소리치는 사람 치고 진정한 용자(勇者)를 본 적은 없다.


그런 면에서 나 또한 겁쟁이가 분명해 보인다. 그런 겁쟁이의 용기 같은 객기에 노 과장은 멈칫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노과장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만약 술이 취했어도 만약 노 과장이 기획팀에 있었다면 이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도망갈 구멍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직장인은 그 구멍을 항상 확보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구멍이 사라지는 순간 노예가 되어버린다.


"너 취했구나~ 안 되겠다 가자!"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 하는게 맞아요? 노 과장님처럼…"

"뭔 소리야?"

"도대체가! 누구한테 뭘 배워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노무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세종대왕

정도(正道)만 가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다른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왜 자신이 남들보다 뒤처지는지 모른다. 세상은 그 방법을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정작 정규 과정을 만들어 배포한 자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먼 옛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숭고한 지도자의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의 권력은 백성을 널리 무지 속에 가둬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조금씩 깨달아 간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만 살아가는 인간은 그들처럼 되기 힘들다는 것을… 나 또한 그것을 사회에서 보고 배우며 학생 때의 순진 무구했던 뇌는 떼가 묻어 조금씩 더럽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깨끗함과 순수함이 더러움과 불순함을 만나면 후자를 따라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맑은 물에 똥물이 튀면 똥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자신이 불순해지는 것을 용납치 않았던 굴원을 바라보던 한 어부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沧浪之水清兮,可以濯吾缨。

沧浪之水浊兮,可以濯吾足。”

(맑은 물엔 갓끈을 씻고 더러운 물엔 발을 씻으면 될 뿐)


- 屈原 <渔父词> 굴원의 어부사 중에서 –

굴원 어부사

노과장은 연태 공장에 부임한 이후 조직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우습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차총경리의 오른팔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방차장은 이미 차총경리의 양 손을 장악했다. 노과장의 의견와 생각은 모두 방차장의 마음을 얻어야만 개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총경리는 그녀에게 모든 주요 결재의 검토 권한을 부여했고 그녀는 비공식적인 부총경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 주재원들은 그것 때문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총경리의 신임인지 사랑인지 모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뒤늦게 부임한 노과장은 그런 상황을 모른체 방차장에게 반기를 들고 그녀와 대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내에서 자신만 왕따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 환대하며 우호적인 태도의 총경리도 더 이상 노과장을 찾지 않았다. 노과장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방차장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박학다식했으며 중국 지방 관료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지 모르지만 그녀 없이는 회사가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은 차총경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것이 편법이든 불법이든 사회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것이든 상관없다. 결과만 중요할 뿐이다. 지금 연태 공장은 DB중공업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자회사이다. 잘 나가면 그 어떤 허물도 감춰질 수 있는 것이다.


"방차장이 영업까지 컨트롤하고 있어 난 그냥 그녀의 하수인 역할일 뿐이야 처음 내가 여기 오기 전 사장이 내게 했던 얘기와는 너무 달라"


노과장은 여자 밑에 들어가서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불의에 대한 반항심인지 알 수 없는 정체가 불분명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이미 배는 떠나갔다. 그는 이미 이 곳에 왔고 왔으면 그곳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적응해야 한다. 그의 성공은 이제 그녀의 손아귀 안에 달려있는 듯 보인다. 적어도 이 회사 안에서는 말이다. 섞이던지 아니면 튕겨나가던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은데…”

“노…과장님!”

“왜?”

“아니면… 뭐 바~ 꿀 수 있어요?”

“…”

“그럼 그냥 아닌데로 살아야죠 뭐…”

“뭐?!”


노과장은 나의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도 그냥 푸념 섞인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게 자신보다 어리고 직급이 낮은 자 앞이라 당황스러운 것 뿐이다. 노과장은 아직 신입사원의 떼가 벗겨지지 않은 풋내기 사원으로만 생각했던 나에게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연태 공장의 경영감사 일정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과장은 회사를 떠났다. 그 꿈 많던 실력자도 정치는 젬병인 듯 보였다. 회사는 그간 그의 공로를 인정해 다른 곳으로 인사이동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이 떠난 모양이었다. 그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결정했을 것이다. 비록 당장 돈으로 보상받을지라도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는 귀국 후 본사에 얼굴도 비치지 않고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갔고 들리는 소문에 조그만 카페를 하나 차렸다고 한다. 다시는 회사라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회사는 실력자가 남는 곳이 아니라 버티는 자가 남는 곳이라는 것을 그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