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긴 한 시간

평범한 남자 EP 86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이른 새벽어둠 속에 한산한 부산역 앞 광장에 서서 역사(驛舍)를 올려다본다.


서울로 교육훈련 출장을 간다. 회사에서는 직원 역량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사무직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최소 1회 이상의 사외 직무 교육 이수를 강제시켰다. 연말마다 다음 해의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그대로 이행해야 한다. 특별한 사유 없이 교육을 이수 않는 직원에게는 상응한 인사 불이익이 떨어질 거라는 인사팀의 공지에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모든 직원이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한다. 부서장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역시 회사 안에서 최고의 포식자는 인사팀이다. 다들 인사팀을 두려워하면서도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

부산역

"아~놔! 이 바쁜 시기에 교육 출장이냐?"

"이번에 안 가면 사내 년간 교육학점을 수료할 수가 없어서요"


도과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교육 출장 명령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나는 이른 새벽의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를 좋아한다. 이른 새벽 산을 오르며 마시는 숲 속의 청량하고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그 공기의 맛을 기억한다. 동이 트기 전 어둠 속 고요함과 함께 낮게 깔린 풀숲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을 좋아한다.


숲 속의 공기까진 아니더라도 새벽 역사 앞의 공기와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조용한 KTX 기차 안에는 이른 새벽부터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객들이 곳곳에 보인다.


좌석 번호표를 확인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열차는 서서히 미끄러지듯 역사를 빠져나간다. 부산을 빠져나가면서 KTX는 그 이름에 걸맞은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열차의 진동과 고속 주행에서 오는 피로감이 나의 눈꺼풀을 떨어뜨린다.

KTX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떴다. 목이 나의 머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나 보다 나의 머리는 가로 뉘어져 있다. 그런데 목이 편안하다. 무언가가 나의 머리를 받치고 있다. 그런데 나의 머리도 무언가를 받치고 있는 것 같은 무게감이 나의 머리 위에 느껴진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옆을 보니 왠 낯선 여자의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여성의 머리도 나의 머리 위에 포개져 있다. 그 여자도 나처럼 목이 꺾인 채 잠든 모양이다. 서로는 목이 꺾여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내가 움직이면 그녀는 깨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떡하나 하며 눈만 껌뻑거린다.

"헉~!"


곁눈질로 내려다본 그녀의 어깨가 무언가로 젖어있다. 젖은 어깨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올라온다. 내가 남긴 흔적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We will be soon arriving at Daejeon Station. Please make sure you have all your belonging with you when leaving the train. 各位旅客本次列车即将到达大田站,各位旅客请提前做好下车准备,谢谢!"


이제 대전이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다. 그녀는 깊게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없이 머리의 순수한 중량을 그대로 나의 머리 위에 얹혀 쌔끈쌔끈 숨을 내쉬며 자고 있다.


'어떡하지?'


한 시간이면 그녀의 셔츠에 묻은 나의 타액이 다 마를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순간 완전범죄를 꿈꾼다. 버티기에 돌입한다.


목이 조금씩 뻣뻣해지는 느낌이다. 고개가 꺾인 채 눈만 깜빡거리며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안타깝다. 가끔씩 사람이 지나갈 때면 재빨리 눈을 감는다. 그들은 다정한 연인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30분이 지나면서 목에서 쥐가 날 것 같은 통증이 찾아온다. 이러다 영영 목을 펼 수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까지 한다. 다시 그녀의 셔츠를 가로 봤다. 이제 젖은 흔적이 조금씩 말라가는 것이 보인다.


'그래 완전범죄가 쉬울 수가 없지'


또 문제가 발생했다. 방광에 과도하게 저장된 액체들이 신호를 보내온다. 아래 위로 난리다. 과거 일제 시대에 우리의 선조들께서 당했던 벽관 고문이 떠오른다. 그 좁은 공간에 갇혀 몇 달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던 그들은 자신의 몸이 송장이 되어가는 것을 눈을 뜨고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물론 지금 나의 고통이 그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힘든 정지 자세이다.

벽관 고문

이제 나의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녀의 셔츠는 말라가고 나의 셔츠는 젖어간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꾀에 자신이 당하는 경우를 겪게 된다. 간사한 머리로 진실을 은폐하려다 스스로를 옥죄어 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만들고 나중에는 그 실체를 알 수 없게 이른다. 당면한 난처한 혹은 부끄러운 상황에서 필요한 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머리를 따르다가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다칠 수 있다. 나처럼...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서울역에 도착합니다.........(생략 - 상기 대전역 참조)"

"음... 아~ 목이야~ 헉! 죄송합니다!"

"아... 뭐가요?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깨어났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기대어 잠들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 푸한다. 나도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몰랐다는 듯한 표정연기를 선보이며 괜찮다는 무뚝뚝한 말을 내뱉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그녀의 왼쪽 셔츠는 흔적 없이 말라있었다.


완전 범죄가 성립되었다. 세상에는 아마 알 수 없는 수많은 완전범죄가 있을 것이다.

열차를 빠져나와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방광 속 엄청난 수압에 오줌이 변기를 뚫을 기세다.


"아~~"


긴 탄성이 뿜어져 나온다. 내 생애 가장 긴 1시간을 보낸 것 같다. 완전범죄를 성공시킨 쾌감과 배설의 쾌감이 뒤섞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헉!"


손을 씻으면서 세면대 거울을 바라본 나는 또 한 번 경악했다.

나의 머리는 알 수 없는 끈적이는 무언가에 떡이 되어 있었다. 손으로 만져 맡아본 냄새는 아까 그녀의 어깨에서 올라오던 그것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내가 거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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