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여자의 심리
평범한 남자 EP 87 (개정판)
"와~ 이게 얼마만이니?"
"그러네 정말 오랜만이다."
"짜식~ 연락도 않고, 오! 이제 직장인 티가 좀 나는데..."
"미안해~ 티 나냐? 큭큭큭"
그녀를 만났다. 대학시절 유일한 이성친구이자 나에게 사랑과 배신의 힘(Episode 70 참조)을 일깨워준 여자 사람이다. 나의 교육 훈련은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어 교육 일정이 마치고 저녁에 뭘 할까 고민했었다. 과거의 일로 그녀와 개인적인 연락은 않고 지내고 있었지만 싸이홈피를 통해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끔씩 옅보곤 하다가 용기를 내어 연락을 했다. 그렇게 성사된 재회였다.
"야~ 희택아 뭐 먹을래?"
"뭐 아무거나~"
"소주 한잔 할래?"
"뭐 소주?!"
그녀는 크리스천이다. 대학시절부터 VIP인지 IVF인지 알기 힘든 영어 약자로 도배된 기독 동아리 활동을 하며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고 다녔던 아이다. 당시 내가 술만 먹으면 어찌나 핀잔을 주던지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잔소리가 듣기 싫어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캠퍼스에서 그녀를 피해 다녀야 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소주를 마시자는 말을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생활에 찌들려 그녀의 신념 아니 신앙도 변해버린 걸까?
"웬일이냐? 네가 술을 다 먹자고 하고?!"
"그냥 네가 좋아하니까?"
"헐~ 니가 언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거 해줬다고~"
우리는 신촌으로 향했다. 젊음이 느껴지는 그곳은 과거 그녀와 내가 캠퍼스를 누비던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 듯하다. 어느 한 포차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생활한 지 햇수로 5년이 넘어간다. 졸업 후 얼마 안 되어 서울로 취직해서 올라왔다. 강남역 근처의 작은 무역회사를 다닌다고 한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월세에 생활비에 빠듯하다며 하소연이다.
신촌"그럼 부산으로 다시 내려와!"
"싫어!"
여자들에게 서울은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뭔지 모른 마력이 있어 보인다. 대학 동기들 중에 상당수가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갔다. 그중에서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온 친구들은 남자들 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어떻게든 그곳에 남아 자신의 현실과는 다른 화려한 서울의 분위기에서 위안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녀도 서울의 높은 집값 때문에 반지하 월세방에 살면서도 서울을 향한 동경을 접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희택아~ 넌 여자 친구 있어?"
"아니 없어"
"짜식~ 설마 너 아직 나를 못 잊어서... 그런 건 아니지 하하하"
"나도 이제 눈 높다. 옛날의 희택이가 아이다. "
"내가 어때서?"
"이제 한 물 갔지 뭐 여자 나이 서른 넘으면 끝난 거 아이가? 캬캬캬"
"야! 너!"
그녀는 순간 버럭 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며 위협하는가 싶더니 주변을 잠시 의식하고는 다시 이성을 되찾는다. 그녀는 서울 생활 5년 만에 서울 사람이 다 된 듯 부산 사투리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가끔씩 우리 쪽 테이블을 쳐다본다. 나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그들의 주의를 끄는 모양이다.
"사투리 좀 적당히 써"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사투리 쓰는 게 뭐가 이상하노? 근데 넌 사투리 하나도 안 쓰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서울 사람들은 다 알더라. 지방애들이 서울말 하는 거 티가 나나 봐, 나름 열심히 고쳤는데...'
"난 전혀 모르겠는데..."
그녀는 서울 생활에 적응을 한 것인지 찌든 건지 알 수 없는 행동과 말들이 나에게 적지 않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는 서울 생활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서울에 사는 사람도 원래부터 서울 사람이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국 도처에서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다수임에도 소수의 서울 토박이처럼 되려 자신이 간직해온 말과 행동을 바꿔간다. 그리고 그것이 교양이라 생각한다.
교양은 말과 행동을 통해 표현되지만 똑같은 말과 행동이 교양이 되는 건 아니다. 방식에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교양은 있으나 마나이다. 겉과 속이 다른 건 둘 중 하나다. 장사꾼 아니면 사기꾼.
"희택아~ 나 올 가을에 결혼해~"
"어?!~ 축하해~"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좀 당황했지만, 사실 난 그녀의 미니홈피를 통해 교제 중인 남자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교회 오빠라는 것도 여러 사진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다. 같은 신앙이 아닌 사람과는 만남 자체를 가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치관과 생각은 성경과 하나님 속에 갇혀있는 듯했다. 그 이외의 세계는 자신과는 별개이며 알고 싶지도 않은 세계였다. 그중 하나가 나였을 지도 모른다. 나와 그녀는 다른 세계였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옛날 나사렛 예수처럼 어두운 곳에 발을 디뎌 그들 속에 섞여 그들과 함께 해줄 만큼의 신앙까지는 가지지 못한 듯 보였다. 그저 자신은 성스러운 하나님의 후광을 받아 좀 더 순결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다른이들에게 비춰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술 한잔 줄래?"
결혼을 발표한 사람의 표정이 밝지 않다. 난 그녀의 소주잔을 채워준다. 잔을 받은 그녀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1/3쯤 부어 넣고 얼굴을 찌푸린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어떻게든 마셔보려는 가상한 노력이 엿보인다.
"결혼식 올 거지?"
"니 하는 거 봐서 하하하"
"야~! 그러기냐?"
학창 시절 오랜 시간을 봐왔던 그녀다. 그녀는 할 말이 있으면 길게 뜸을 들이곤 했다. 상대방의 궁금증을 일으키려는 것 같지만 난 거기에 순순히 응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그녀는 스스로 지쳐 말 문을 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눈빛이 부담스러울 때쯤 입을 열었다.
"나 결혼하지 말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녀의 갑작스러운 결혼발표에 이은 파혼 선언인가? 연이은 충격 발언에 정신이 혼란스럽다. 그녀가 오늘 소주잔을 든 이유가 있어 보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오늘 그녀에게 술잔을 허락하신 모양이다.
"오빠가 나보고 아프리카로 가제"
그녀는 결혼을 한달여 앞두고 남편이 될 오빠의 아프리카 주재원 파견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의 오지 나라에 짧으면 3년 길게는 5년을 떠나 있어야 한다고 했단다. 그녀는 당시 그를 향한 사랑이 흔들린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환경이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그의 계속된 설득과 회유에 결국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녀는 내적 갈등을 느끼고 있다.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사랑을 나누었고 그 사랑은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았다. 그 이후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희생과 헌신은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흔들어 놓았지만 그녀를 잡아준 것은 그를 향한 사랑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아니었다. 단지 이미 벌어진 공식화된 상황과 주변의 시선이 그녀를 잡아 두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내 앞에서 결혼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들 사이에 인식된 모습(포장된)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은 철저히 숨기며 살아간다. 포장이 벗겨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장하고 또 포장한다. 나중에는 그 안에 실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감추고 숨기며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자신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고마워 데려다줘서"
"뭘 예전에도 항상 했는데 뭘"
"아... 그렇지"
"그래 들어가~ 오늘 즐거웠다"
"희택아~ 잠시 들어갔다 갈래?"
그녀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과거 수도 없이 그녀 집앞까지 데려다줬지만 들어보지 못했다. 그 말을 지금 하고 있다. 붉은 가로등 불빛 아래 술기운으로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게 보이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에는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눈빛으로 변해 있다. 그런 그녀가 낯설다. 그녀는 그녀의 집 앞까지 걸어오는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아냐~ 그냥 갈게"
한 순간의 정욕으로 그녀와의 수년간의 추억을 없애버리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그녀에게서는 정욕보다 더 큰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것은 사랑도 우정도 아닌 또 다른 감정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감정은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나는 등을 돌려 그녀의 마지막을 보지 않으려 손을 흔들며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