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을 뛰어넘는 사랑

평범한 남자 EP 88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와~ 기가 차는 구만, 동구도 여자 친구가 생긴 거야?"

"녀석 요즘 좀 수상하다 했어, 주말마다 바쁘다고 계속 피해 다니더만… 역시나 여자였구만"


오늘 동구가 친구들을 소집했다. 이유인 즉 자기 여자 친구를 소개하겠다는 것이다. 녀석은 꼬치친구들 몰래 비밀 연애 중이었다. 수상쩍은 기미는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남녀관계라는 것이 그렇듯 사귀는지 아닌지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애매한 시기에는 비공개 만남이 진행된다. 둘 중 한 명의 고백을 통해 상대방이 승낙이 이루어졌을 경우 공식적인 연인의 관계로 발전한다.


당시 남녀 간의 그런 애매한 시기를 '썸(some)'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구속도 없으며 설렘과 흥분만 즐길 수 있는 썸을 즐기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이성을 만날 수 있는 명분을 안겨 주었다.


동구가 정식으로 우리를 불러 여자 친구를 소개하겠다는 것은 그 썸의 단계를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관계가 어느 정도 견고해졌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학가의 한 이자카야에 모여 앉았다.


"안녕하세요 최은진이라고 해요"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의 그녀는 옅은 색 청바지에 알 수 없는 영문 단어들이 적힌 하얀 T셔츠 그리고 캔버스 단화를 신고 있다. 그녀는 수줍은 표정을 한 채 동구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의 그녀는 가녀린 몸매와는 달리 얼굴엔 볼 살이 올라 귀여운 인상이다. 동구를 포함한 5명의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녀는 약간 긴장한 기색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친구의 여자 친구가 같이 하는 자리에선 여자 친구의 경계심과 긴장을 완화하고 우리가 원하는 분위기로 이끌고 가기 위해 알코올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소주가 여러 잔 오고 가자 긴장이 조금 풀어진 듯 좀 전까지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있던 모습은 동구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근데 둘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내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의 답은 친구들이 이 자리에 와 있는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다들 몸을 기울여 동구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게 사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났어요"

“나이트요?”

“헐!”

“대박! 역시 동구답다”


은진은 입가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만남의 장소부터 예상을 뒤집는 반전이다. 그녀는 두 살 많은 연상이었다. 우리에게 말해줘도 잘 모르는 독일의 유명한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 후 귀국해서 국내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공부 중이며 한국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수수하던 모습으로 미루어 판단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녀는 한국에 들어와서 이 곳의 다른 환경과 문화가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우연히 학교의 지인들과 연말 송년회 때 찾은 나이트클럽에서 동구를 만났다고 한다. 지인들 강요 같은 권유에 끌려간 나이트에서 동구에게 낚인 것이다.


처음에 그녀는 그를 향한 경계심과 거부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빨리 부킹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구는 말없이 비스듬히 등을 돌려 앉은 그녀 앞에 놓인 술잔으로 맥주병을 가져다 대며 술을 권했다.


그녀는 술을 받지 않으려 잔을 치우려다 그만 컵을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잔은 타일 바닥에 부딪쳐 산산이 박살 났고, 당시 치마를 입고 있던 그녀에게 날아간 작은 유리파편이 그녀의 종아리에 박혔다. 선홍색 핏물이 박힌 유리조각과 하얀 살 틈으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당황함에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동구는 침착하게 안심시켰고 유리 파편들을 치웠다. 그리고 그녀의 종아리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 손수건으로 흘러내린 핏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밴드를 꺼내 그녀의 상처부위에 붙여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그에 대한 경계심이 사그라짐을 느꼈다고 한다. 홀로 지낸 오랜 유학 생활 속에서 누군가의 보살핌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그녀는 낯선 남자의 그런 섬세함을 처음 느꼈다고 한다.


그녀의 '쨍그랑' 소동으로 부킹도 같이 깨지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지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함께 룸을 떠났다. 그녀도 그가 준 밴드를 붙인 채 룸을 나왔다고 한다. 홀에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또 다른 웨이터에게 손목을 붙잡였다. 웨이터는 괜찮은 남자들이 있다면서 또 다시 다른 룸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녀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웨이터는 항상 있는 일인 듯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고 앞으로 향했다.


웨이터의 완력에 끌려가려던 그녀를 막아준 건 동구였다. 그는 웨이터의 손을 잡아 비틀었고, 웨이터는 우락한 그의 인상을 보더니 슬그머니 그녀의 손목을 놓고 자리를 피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또 한 번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좀 전 룸에서 하지 못한 말을 뒤늦게 했다. 동구는 그녀에게 귓속말로 여긴 굶주린 늑대와 하이에나들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럼 그 쪽은 늑대인가요? 아님 하이에나인가요?”


그러면서 멀어져가는 동구에게 그녀는 생뚱 맞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그냥 뭔가 말은 꺼내야 할 거 같은데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질문에 동구는 돌아서서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외로운 늑대라고 해두죠”


동구도 그녀의 질문에 걸 맞는 쌩뚱 맞은 답변을 그녀의 귀에 속삭이며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며 가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손에는 좀 전에 룸에서 그가 붙여주었던 밴드가 있었고 그 밴드의 포장 위에 작게 손 글씨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다음엔 누나가 붙여줘요, 010-123-4567]


"푸하하하"

"대박! 캬캬캬"

"이거 뭐 삼류 코믹 멜로 스토린데 하하"


동구와 은진도 멋쩍게 웃어 보인다. 인연은 참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그녀는 당시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그런 행동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뒤 은진은 동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여러 번 메시지가 오고 가고 그것이 전화통화로 이어지고 만남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조금씩 그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생김새와는 다른 그의 섬세함과 따뜻한 배려심에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동구는 누나만 셋인 집안에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누나들을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왔고 덕분에 우리들과는 달리 여자들의 심리를 꽤 뚫고 있다. 생긴 건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행동과 말에서는 섬세함이 느껴진다. 처음 맞닥뜨린 여자들은 상반된 외모와 행동이 매칭이 되지 않아 다소 당황하지만 시간을 두고 그와 같이한 이성들은 대부분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개미지옥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물론 동구도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녀에게서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한 세계를 경험했다. 굳은살과 기름때로 얼룩진 손과는 달리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그녀의 손이 둘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둘이 꼭 맞잡고 있는 손은 전혀 다른 세계와 만남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어느 영화 속에서나 본 듯한 기계공과 피아니스트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우리들과도 잘 어울린다. 연상이지만 연상답지 않은 아이 같은 성격에 우리는 누나라는 호칭만 붙여줬을 뿐, 그녀를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음악이라는 세계 속에서만 갇혀 지냈는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온실 속 화초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우리가 하는 세속적인 얘기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가 과연 동구와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은 서로에게 호기심을 불러올 수 있지만, 그 호기심이 풀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지기 마련이다. 가끔 라면이 먹고 싶긴 하지만 계속 먹으면 질린다. 내 눈에 비친 둘의 모습은 사랑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이 더 커 보였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야 ~ 그만 가자 다들 많이 취했네"


다들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다. 우리는 늦은 밤 대학가 대로변에 택시를 잡으려 비틀거리며 서 있다. 그 와중에도 동구와 그녀는 서로를 안고 서서 바라보는 눈빛이 느끼하기 그지없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서로는 아마 서로의 입술로 2차를 달렸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퍽!"


갑자기 검은 가죽 백이 동구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엄마!?"

"너 이런 놈이랑 어울려 다니라고 내가 한국 들어오라 한 줄 알어?"

"이게 무슨 짓이얏!"


동구의 양쪽 콧구멍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올려다보고 있다.


"너 이 쌔끼! 다시 한번 더 우리 딸 만나면 뒈질 줄 알아! 알겠어?"


아줌마는 다시 한번 그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하려고 했지만 은진이 말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분에 못 이겼는지 동구를 향해 침을 뱉고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인도 옆에 세워둔 번쩍이는 검은색 벤츠의 뒷좌석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그녀는 아줌마의 힘에 밀려 차 속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아줌마는 뒷좌석 문을 쾅하고 닫고는 운전석으로 향한다. 그리고 조수석 창문을 내려 우리 쪽을 향해 손가락질 한다.


"나 분명히 경고했어! 내 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아!"


아줌마는 코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는 동구가 조금 신경 쓰였는지 그의 코를 강타한 악어가죽인지 소가죽인지 모를 샤넬 백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더니 손 안에 넣고 구겨서 창 밖으로 던지고는 괭음을 내며 사라진다. 뒷좌석의 그녀는 창문을 열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동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친다.


"정말 미안해~! 나중에 연락할께"


우리는 넋을 잃고 이 상황들을 말없이 지켜봤다. 재득는 쓰러진 동구 앞에 떨어진 구겨진 수표를 집어서 펼쳐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동구에게 전해 준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지만 동구는 그 수표를 받아들더니 얼마짜리 수표인지 확인도 않은 채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다른 쪽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붙은 수표를 가져다 대었다.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연기는 피가 흐르는 콧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늦은 밤 대학가 앞에 벌어진 소동을 지켜보는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이런 싸움과 불구경을 놓칠 행인들이 아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행인들은 동구가 수표에 불을 붙일 때 약속이나 한 듯이 ‘아~~’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 막 타오르려던 사랑은 순식간에 타버린 그 수표처럼 재가 되어버린 듯 보였다.

세상이 정해놓은 계층이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넘나드는 사랑은 비공식적으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공개하는 순간 찾아오는 시련과 고통은 그 사랑을 지속하기 힘들게 만든다.


영화 [타이타닉] 속 계층을 뛰어넘은 두 주인공의 사랑이 애절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 계층을 뛰어넘은 사랑의 결말은 결코 해피하지 않다.


세속의 사랑은 계층의 벽을 뛰어넘기 힘들다.

끼리끼리 노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