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89 (개정판)
"와! 직접 와서 보니 부스가 엄청 크네요"
"그렇죠 회사에서 그만큼 돈을 쏟아부었으니..."
기획실 업무 중에는 대외 홍보업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 매년 1~2회씩 국내외 해외전시회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 또한 기획실의 중요 업무 중의 하나이다. 지호 씨의 퇴사로 인해 그 업무가 고스란히 나에게로 넘어왔다. 각종 국내외 유명한 조선해양 관련 전시회에 참여하는 것은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 홍보와 해외 영업망 확충을 위해 필수적인 활동이다.
문제는 전시회 준비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시회 참여 신청부터 부스 설치 그리고 전시회장 운영까지 할 일이 많다. 이번에는 현지 씨와 내가 전시회 기획부터 운영까지 맡게 되었다. 현지씨는 전시회 운영보다는 싱가포르 관광에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그녀는 해외출장이 결정 나고부터 그녀는 틈만 나면 인터넷으로 싱가폴 관광지를 검색해 본다.
해외전시회는 국내 전시회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다. 해외로 전시회에 필요한 물품 배송부터 꼼꼼히 챙겨야 한다. 한 번 떠난 배는 돌아오지 않는다. 현지의 부스 설치 업체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도 쉽지 않다. 옆에서 수시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생각지 못한 이상한 부스가 만들어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준비가 완료되고 나서 떠나는 해외출장은 매력적이다. 사실 전시회가 시작되고 나서는 크게 할 일이 없다. 그냥 전시회 부스를 지키면서 영업인력들을 도와주거나 부스 비품들을 채워 넣고 전시물들을 관리하는 잡다한 일들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전시회 마지막까지 남아 전시물과 각종 홍보물(카탈로그, 기념품 등)을 다시 정리해서 회사로 보내야 하는 게 좀 짜증 날 뿐이다.
싱가포르의 유명 해외 해양 전시회에 참석 중이다. 이번에 회사에서 야심 차게 밀어붙이는 해양플랜트 분야의 영업망 확대 및 추가 수주의 기대를 안고 해양플랜트의 시장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싱가포르 해양 전시회에 참여를 결정하였다. 조선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대기업들과 비슷한 수준의 부스(Booth: 회사별 전시회 공간)를 배정받고 많은 해외영업 인력을 파견했다.
"오~ 好久不见,棅晧! " (오랜만이에요 병호씨!)
"잘 지냈어요? 희택 씨!"
"덕분에 하하하 맨날 중국에서만 보다가 싱가포르에서 보니 느낌이 남다르네요"
"그런가요? 짱개 냄새가 사라져서 그런가요? 푸하하"
몇 달 전 이미 해양플랜트 시장 조사와 현지 선주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싱가포르에 연락 사무소를 오픈하고 상주 인력을 파견해 놓은 상태이다. 그 연락 사무소를 책임지고 있는 자는 나랑 동갑인 병호씨였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그는 나보다 입사가 1년 정도 빨랐고 중국 대련의 DB중공업에서 해외 파견직으로 3년을 채우고 한국으로의 복귀를 꿈꾸었지만 대리 승진과 동시에 또 다시 해외로 발령이 났다. 계속되는 해외파견 생활에 힘들어하던 그였다. 승진이라는 달콤한 유혹 때문에 또 다시 회사의 강요 섞인 권유에 수긍하고 말았다. 한번 해외로 끌려나가면 다시 들어오긴 쉽지 않다.
"Are you Chinese?"(중국인이예요?)
"Yes I am" (예)
"我们公司是主要生产些船舶上层建筑和船舶吊机。我们公司在韩国最大的船舶配套公司,主要客户是..."(저희 회사는 주로 데크하우스와 선박크레인을 생산하고요,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박기자재 회사입니다. 주요 고객으로는....)
그는 나 못지않게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입사 이후 계속 중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중국어 실력이 늘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상황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부스 안으로 들어온 중년의 허름한 복장을 한 중국사람에게 유창한 중국어로 친절하게 회사 소개를 한다. 그 중국인은 잠시 서서 전시 모형물들을 보면서 그의 얘기를 듣다가 한 마디 던지고는 부스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这一家从来都没听说过的呀” (이 회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와 병호씨는 종이가방에 기념품만 챙겨서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뭐야 저 사람! 어디 노숙자같이 생겨가지고선~"
"아니에요~ 저래 보여도 브로커일 가능성이 높아요. 겉으론 허름해 보여도 거대한 선주들과 커넥션이 있는 브로커일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해양플랜트는 고객(선주, 발주사)들이 직접 조선사나 플랜트 제조사와 컨택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대부분 브로커를 끼고 하죠, 그리고 저런 브로커는 가운데서 엄청난 수수료를 먹어요. 대신 책임지고 선주에게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기에 인도해야 하죠, 그리고 우리 같은 생산업체는 사실 그런 뒤에 가려진 선주나 고객과 만날 일을 잘 없어요. 배가 완성되면 그때나 얼굴을 비추죠. 그냥 브로커와 모든 일을 진행한다고 보면 되요"
"아 그렇군요"
"사실 우리 같은 작은 조선기자재 회사는 여기 해양플랜트 시장에 명함 내밀기도 쉽지 않아요, 여기서는 인지도 없이 영업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는 여기 싱가포르에 온 지 반년이 다 되어가지만, 성사된 계약은 한 건도 없다. 영업비용으로 브로커라는 자들에게 밥값, 술값 등등으로 쏟아 부은 비용은 회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덕분에 싱가포르의 유명한 식당과 술집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고 한다. 회사 돈으로 좋은 음식과 구경은 다하고 다니는 듯했다.
난 부스를 빠져 나와 전시회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 사실 도과장의 지시사항으로 주변 고객사와 경쟁사들의 부스 현황을 체크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현지 씨에게 부스 관리를 맡기고 주변 부스를 탐색한다.
우선 고객사인 국내 대형 조선소들의 부스를 둘러본다. 역시 대기업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거대한 규모부터 화려한 부스 디자인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들이 부스 방문객들에게 그냥 나눠주는 기념품은 시계부터 넥타이핀, 지갑, 명함케이스 등등 값비싼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회사는 볼펜이나 포스트잇 등 별 볼일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혹시 몰라 VIP를 위해 100개 정도 발주한 원가 5,000원짜리 싸구려 골프지갑은 특별히 계약이 성사되거나 중요 고객에게만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골프지갑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왜 대기업, 대기업~ 하는지 다 이유가 있구먼'
나는 여러 부스의 다양한 디자인과 전시물 및 기념품 등을 디지털카메라에 담았고 동시에 큰 종이가방을 들고 다니며 부스에서 나눠주는 기념품도 주워 담았다. 그렇게 전시회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가방이 기념품으로 가득 찼다. 팔면 돈 꽤나 될 것 같아 보인다.
"어서 오세요~ YG엔텍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전 저기 앞에 있는…"
"DB중공업이시죠?"
"아~ 예 어떻게?"
"거기서 부스 정리하시는 거 봤어요, 이번에 부스 엄청 크게 하셨네요"
"아 그러시군요, 예 좀 크죠 하하, 전희택이라고 합니다."
"네 전 YG엔텍 영업부 주미애라고 해요"
우리 회사 부스 맞은편에 구석에 있는 작은 부스를 지나다가 마주친 여자다. 뒤로 묶어 올린 꽁지머리에 차분하게 내려앉은 앞머리가 이마를 가리고 있다. 어두운 남색 계열의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과는 달리 활동적인 모습이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녀도 스스로도 그걸 느끼는지 옷을 자주 매만지며 불편한 듯한 모습이다.
생기 발랄한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가 있는 부스는 관람객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하고 심심한 곳에 자리 잡았다. 2평 남짓한 조그만 부스에 홀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나라도 붙잡고 얘기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명함을 내민다. 나도 그에 질세라 명함을 꺼내 형식적인 비즈니스 미팅하듯 악수를 나눈다.
"DB중공업 요즘 잘 나가나 봐요?"
"아뇨~ 이런 걸 허장성세(虛張聲勢)라고 하죠"
"왜요~ 제가 듣기로 DB중공업 그래도 꽤 잘 나가는 회사라고 알고 있는데요, 나도 그런 큰 회사에서 일하고 싶네요"
"그런가요? 하하하"
그녀의 부러운듯한 말투에 회사의 실상을 말할 필요까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회사는 선박용 파이프 피팅(Pipe Fitting) 파트를 생산하는 회사이다. 최근 국내 매출 감소로 해외시장 개척의 특명이 떨어져 이렇게 조그만 부스를 차려놓고 나름 해외개척 영업 중이라고 한다.
회사의 전시회 부스도 정부의 '중소기업 해외시장개척 지원'이라는 슬로건 아래 한국무역협회(KITA)의 지원금을 받아 나온 것이라고 한다. 사실 조그만 중소기업이 이런 큰 전시회를 자비를 들여 나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아무런 커넥션도 없이 대형 전시회에 나온 들 누가 들여다볼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기관의 지원과 추천이 담긴 플랫카드와 홍보물 등이 있어야 그나마 이름이라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근데 혼자세요?"
"아뇨~ 부장님이랑 같이 왔는데… 어디 가셨는지 부스로 돌아오시질 않네요"
"하하하 심심하시겠어요"
"뭐… 보시다시피 좀 그렇네요 하하하"
그녀의 회사는 우리회사와 같은 공단 안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녀는 해외영업으로 입사했는데 입사 후 해외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회사 사장은 국내 영업만 하던 회사를 이제 수출기업으로 바꿔보려고 해외영업 인력을 뽑은 게 자신이라고 한다. 부장이라는 사람은 국내 영업만 20년 동안 해온 사람인데… 이제 해외영업을 하라고 자리를 옮겨놓았다고 한다. 자신이 볼 때 부서 이름만 해외영업이고 하는 일과 업무행태는 여전히 국내 영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가 규모가 작다 보니 부서간 업무 구분이 불분명하다고 한다. 자신도 해외영업인데, 국내 영업도 하고 가끔씩 자재구매 및 생산업무도 돕는다며 불만을 호소한다.
"희택 씨도 해외영업?!"
"아뇨 전 기획팀이에요"
"와~ 기획이면 브레인들이 있는 곳 아닌가?"
"하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녀는 나랑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말이 가끔씩 존칭이 생략된 말을 섞어서 하기 시작한다. 난 그녀의 기세에 눌려 그냥 그녀의 패턴대로 말을 이어간다. 뭐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 그냥 재미있다는 느낌이다.
"Excuse me!?" (실례합니다)
"Welcome to YG Entech, Please come in" (YG 엔텍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What kind of products do this company make?"(이 회사는 무슨 제품을 생산하죠?)
"Well... our company makes pipe fittings for ship mainly, Please look at this catalog"(음... 저희 회사는 선박용 파이프 피팅을 생산합니다. 이 카달로그 좀 보시겠어요)
한 외국인이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 하던 말을 멈추고 돌아서서 잽싸게 외국인에게 다가가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서 그 외국인의 혼을 쏙 빼놓을 기세로 말을 늘어놓는다.
'와~ 저런 인재가 왜 이런 조그만 회사에서 일을 할까?'
나는 한참을 서서 그녀가 외국인에게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쳐다본다. '열정'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지금 내 눈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주변에 모든 것들은 희미해지고 오로지 일의 대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태껏 내가 보지 못한 그런 류의 여성이다. 그녀는 내가 간다는 말도 못 들은 체 고객에게 집중하고 있다.
열정적인 여성은 그냥 이유 없이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