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90 (개정판)
"자! 다들 수고했어요 한잔씩들 하세요"
전시회의 첫날 일정이 끝나고 해외사업 본부장인 박상무를 비롯한 해외영업팀 직원 셋과 기획팀인 나와 현지 씨는 싱가포르 주재원인 병호씨의 안내를 받아 강가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야외 식당에서 만찬을 가졌다. 전시회 첫날 우리들이 수고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남기진 못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들만 부스를 오고 가며 기념품만 챙겨갔다. 근처의 메이저 조선소 부스에서는 대형 해상 플랜트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소문들이 흘러 들어왔다.
"와~ 여기 너무 예쁜 거 같아요!"
"병호씨는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 여기 사장님이나 브로커들 만날 때 몇 번 왔던 곳이에요"
"와~ 병호씨는 좋겠다 이런데도 자주 오고"
현지씨는 레스토랑 주변의 야경과 분위기에 취한 듯 보인다. 찌는 듯하던 더위는 숨어버린 태양과 함께 사그라지는 모양새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레스토랑에서 울려 퍼지는 라이브 재즈음악 선율이 세계 각국의 알 수 없는 언어들과 뒤섞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내일은 회장님과 사장님이 방문하실 예정이니까 다들 각별히 신경들 써주세요"
병호씨의 얘기로는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한다. 본사 해외영업과 주재원인 병호씨가 알게 모르게 물밑 영업을 해온 이름 꽤나 알려진 해외 브로커와 회장 그리고 사장과의 첫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아직 구체적인 거래나 계약은 없지만 일단 해양플랜트 시장의 유명 브로커들 사이에 얼굴과 명함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그 브로커는 과거 우리 회사가 해양플랜트의 주거용 바지선(Accommodation barge)을 생산해서 인도했다는 것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해외 바이어랑 식사할 때를 대비해서 고급 요리를 어떻게 주문하고 먹는지도 알아두는 것이 좋아요"
박상무는 오랜 세월 해외 곳곳을 누비고 다닌 해외영업맨이다. 그는 특별히 고급 와인과 랍스터 요리를 주문했다. 적지 않은 비용일 것이다. 회사도 힘든 시기에 이렇게 회사 돈을 써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뭐 그는 현재 관리본부장(재무, 인사, 구매)까지 겸임하고 있는 터라 회사 돈을 자기 것이나 다름없이 쓸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들에게 나쁠 건 없다. 언제 이런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랍스터를 먹어보겠는가? 그냥 주어진 상황을 즐기면 된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만 아니면 상관없다. 덕분에 우리는 방과 후 아니 일과 후 비즈니스 식사예절 교육까지 받고 있다.
[뭐해요?]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들어왔다. 한국 번호이다. 밑도 끝도 없이 간단명료한 세 글자의 의문문이다. 분명 나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내가 알더라도 친하지 않거나 상대방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경우일 수 있다. 어쨌든 문자가 너무 두서 없는 것이 답변을 해야 할 가치를 못 느끼게 한다.
[누구세요?]
원하는 답변은 접어두고 나 또한 간단명료하게 상응하는 의문문의 문자를 보낸다.
[아~ 미안해요 저 아까 YG엔텍 주미애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저장을 안 하셨군요 하하, 저녁에 무슨 다른 일정 있으세요? 아까 보니까 숙소도 같은 호텔 같아 보이던데… 시간 되면 근처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 ^^]
이제야 낮에 그녀랑 명함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숙소로 들어간 모양이다. 그녀 말대로 나이 많으신 부장이랑 둘이 왔으니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보인다. 호텔방에 있다가 심심해서 나에게 문자를 날려본 모양이다.
[아~ 안녕하세요~ 저흰 지금 밖에서 상무님이랑 같이 식사 중이에요, 이제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예요]
문자 보내기가 무섭게 답장이 날아온다.
[아~ 아직 식사 중이구나~ 그럼 숙소에 들어오면 연락 줘요, 전 호텔에 있을꺼예요]
나는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고, 마침 박상무가 웨이터를 불러 법인카드를 건네며 계산을 한다. 다들 평소에 먹지 못하던 어색한 음식을 먹어서 성에 차지 않는 모습이다. 사실 이런 고급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것 자체가 비즈니스 식사와는 거리가 멀다.
제대로 먹을 거면 수산시장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대게나 킹크랩을 몇 마리 골라 찜통에 푹 쪄서 커다란 쟁반 가득 담아 너나 할 것 없이 손으로 들고 게눈 감추듯 쉬지 않고 먹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껍데기에 밥까지 슥슥 비벼먹어야 갑각류 요리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난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다들 내일을 위해 일찍 들어가 쉬도록 해요"
"옙! 상무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그래요 내일 봐요"
"예 들어가십시오~"
해외 영업팀의 이차장과 정과장은 박상무를 택시에 태워 보내며 고개를 숙여 마중한다. 그들은 일찍 들어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
"자~ 이제 우리들끼리 한 잔 하러 가야지"
"그러시죠 이 차장님, 겐지 가잰지 뭐 맛은 있는 거 같긴 한데, 원체 먹은 것 같지가 않네요"
"병호야~ 좋은데 좀 안내해봐라~"
"아~ 예!"
"전 먼저 좀 들어가 보겠습니다."
분위기 깨는 나의 발언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어!? 그… 래 희택이는 뭐 먼저 들어가던지…"
"현지씨는 어쩔래?"
"저도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이제 기획팀은 따로 노시겠다?! 둘 다 해외영업을 떠났다고 너무 태도 돌변하는거 아냐? 섭섭하구만… 쩝"
“그런 건 아니구요…”
"그래 뭐 자유 의사를 존중해야지, 그럼 내일 전시회장에서 보자고"
이 차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난 그들을 잘 안다. 해외영업팀으로 입사했던 나는 그들의 음주 문화를 수없이 경험했다. 지금은 소속이 바뀌었다. 그들에게 절대 복종할 필요가 없다. 인사(人事)상 어떠한 이해관계도 섞이지 않은 아저씨일 뿐이다. 물론 기본적인 사내예절은 지켜야겠지만 불필요한 의전까지 그들에게 제공할 의무나 심리적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희택씨는 왜 안 따라가요?"
"그냥요"
"남자들끼리 한 잔 하고 하면 좋을 텐데…"
"현지씨는 참… 순…"
"예?!"
"아… 아무것도 아녜요~"
순진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를 물음은 입사 후 3년이 다되어 가도록 변화가 없다. 어쩌면 이렇게 때 묻지 않는 것일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 보통 직장생활에 찌들면 눈치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인데, 현지씨에겐 그런 게 없다. 그녀의 순진함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은 생각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때가 묻지 않으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때가 묻고 그냥 섞이고 융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제 아무리 깨끗한 백두산 천연 암반수라도 똥물이 한 방물만 튀겨도 똥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함은 더러움을 이길 수 없다.
"다 왔네요"
"먼저 들어가세요"
"희택씨는 안 들어가요?"
"예, 전 좀 있다 들어가려고요"
"어디 가시려고요?"
"뭐, 제가 그런 것까지 현지씨한테 알려줘야 해요?"
"…"
자꾸 캐묻는 그녀에게 쏘아붙이듯 던진 말이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일까? 그녀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던 모습이 굳어버렸고, 조용히 등을 돌려 호텔 로비로 들어간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 동안 그녀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내가 누려도 될 권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배적이다.
[저 호텔 로비에 왔는데요, 괜찮으심 지금 나오실래요?]
[예~ 내려가요]
자동응답 기능이 있는 걸까? 그녀는 나의 문자를 기다린 듯 바로 답장이 날아온다. 호텔 로비의 소파에 앉아 기다린다. 잠시 뒤 호텔 로비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온다. 시원한 트레이닝 복장에 하얀 테니스화를 신고 가벼운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 모습이 마치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 같은 느낌이다. 트레이닝 복장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여성은 처음 본다.
조금씩 주변 배경은 사라지고 그녀가 나의 눈동자를 가득 채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