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91 (개정판)
“다행히 빨리 끝났네요! 회식이 길어질 줄 알고 그냥 혼자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그게 사실 일행들은 2차 가고 전 그냥 빠져나왔어요"
"예!? 정말요? 그래도 괜찮아요?"
"뭐 상관없어요"
그녀는 대오(隊伍)에서 이탈한 군인의 심정을 아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도 같은 직장인으로서 남자들의 조직생활의 룰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갑시다! 뭐든 먹으러~"
"Ok~ 고! 고!"
싱가포르의 밤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질서 정연하던 낮의 도시 풍경과는 달리 어둠을 틈타 더위를 식히러 거리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번잡한 풍경 속에서 정겨움이 느껴진다. 그녀는 호텔방에서 미리 갈 곳을 검색해 둔 모양이다. 그녀도 나와 같은 취향인 듯 보인다.
거리의 노점이 늘어선 노천 푸드 코트를 찾았다. 갖가지 음식들이 구워지고 튀겨지는 향과 연기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동남아의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내뱉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백색소음이 되어 서로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예? 뭐 예~"
"아저씨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요 하하하"
그녀는 나보다 어리다. 어린 자들은 무릇 연장자를 불편해 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연장자를 손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느낌이다. 내가 나이만 많았을 뿐 하는 행동은 그녀가 연장자 같다. 대화도 상황도 모두 그녀가 주도한다. 난 무엇인지 모를 중력 같은 힘에 의해 그녀에게 이끌려가는 기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기운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강해지고 약해지고를 반복한다. 물론 자신의 기운이 강해진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의 기운을 죽이는 것만은 아니다. 강한 기운이 상대의 기운을 보강해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내가 가지지 않은 기운을 보충해주는 기분이다. 기운은 돌고 돈다. 내가 누군가에게서 받은 기운은 또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발산하게 된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간의 기운이 전달되고 좋은 기운이든 나쁜 기운이든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어떤 기운이 전염되느냐에 따라 그 조직과 사회의 분위기가 좌우된다.
지금 그녀의 기운이 나에게 스며들고 있다. 그 기운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데려다 주는 듯하다.
"오빠! 회사 브레인이죠? 기획실에서 일하고 아까 보니까 중국어도 잘하는 거 같던데, 못하는 건 뭐예요?"
"하하하 음… 글쎄 연애?!"
"푸하하 나랑 똑같네"
“하하하”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 또한 장단을 맞춰준다. 그녀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맥주 안주엔 역시 꼬치가 최고다. 그녀도 나도 이견 없이 동의한 메뉴이다. 눈앞에 놓인 음식에 둘은 잠시 대화를 잊고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고 입에 넣은 짭조름한 꼬치의 맛과 쫄깃한 식감이 머릿속에 도파민을 분비한다.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돈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은 이성과 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인파 속에서 묻혀 이국적인 음식을 음미할 수 있는 순간이 행복하다.
"오빠는 취미가 뭐예요?"
"나? 음… 그냥 산에 올라가는 걸 좋아해"
"산?! 완전 아저씨네"
"야~ 산이랑 아저씨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내려올 껀데 왜 올라가요?
"음… 그럼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사냐랑 뭐가 다를까?"
"오빠! 이거 완전 소크라테스 컨셉인데 하하하"
그녀는 어느 정도 허기를 잠재운 듯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서슴없는 말투와 행동이 나의 경계심을 허물었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된다. 그녀도 반말과 존댓말의 경계를 넘나들며 짧은 시간 빠른 친밀감이 형성된다. 그녀는 시종일관 호기심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다른 관심거리가 생기면 바로 그곳으로 집중하는 관심 변환 속도가 LTE급(당시는 LTE가 아닌 3G가 시작되던 시점입니당)이다.
"넌 취미가 뭔데?"
"음… 다 먹었죠? 가요!"
"어? 어!"
"나머진 오빠가 계산해요"
그녀는 나의 물음에 답은 않고 계산서 위에 10달러짜리 싱가포르 지폐를 얹혀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나머지 금액을 얹혀 종업원에게 주고는 그녀를 놓칠세라 노점의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뒤쫓는다.
"어디 가는 거야?"
"음… 따라와 보면 알아요.큭큭. 참! 혹시 피곤하심 먼저 들어가셔도 돼요"
"음… 아냐 뭐 나도 숙소 들어가서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뭐"
그녀는 휴대용 관광지도를 손에 들고 주변 건물들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어딘가로 향한다. 움직이는 동안 옆에 내가 있는지도 모른 체 길을 찾기에 여념 없다. 그녀와 내가 도착한 곳은 어느 학교의 체육관 앞이다. 밤인데도 체육관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체육관 안에는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싱가포르 현지인들로 북적거린다.
"여긴 왜?"
"아까 물어보셨잖아요? 내 취미가 뭔지"
"아~! 배드민턴?"
그녀와 나는 체육관 한 귀퉁이에 서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우리나라 못지않은 배드민턴 강국답게 아마추어 동호회 선수들의 몸놀림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예사롭지가 않다. 눈을 돌려 바라본 그녀의 눈빛은 또 다시 반짝이고 있다.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모습이다.
"Hi~ I'm Miae, I'm from Korea, and I'm an amateur badminton player, Can I join with you guys?" (하이~ 한국에서 온 미애라고 해요,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예요, 같이 할 수 있을까요?)
"Wow! Really? Of course, Come on in~"(와우~ 정말요? 물론이죠 들어와요)
그녀는 방금 게임을 마친듯한 코트에 가서 현지인들에게 능숙하게 말을 건넨다. 배드민턴을 치는 그들만의 룰이 있어 보인다. 그녀가 트레이닝 복장을 입고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는 한 싱가포르 여성과 악수를 하고는 라켓을 하나 빌려 들고는 코트 중앙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2:2 여성복식 배드민턴 경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코트에서 제자리 뛰기를 몇 번 하며 몸을 풀더니 네트 앞에서 서브를 넣는 자세를 취한다. 셔틀콕이 네트를 넘기 무섭게 다시 넘어오고 그녀는 순간 이동을 하듯 민첩하게 움직이며 받아친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나의 입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의 플레이에 빠져든다.
상대 선수들도 그녀의 예사롭지 않는 몸놀림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가지고 나온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그녀의 움직임을 담는다. 그녀의 움직임이 빨라 윤곽이 흐릿하게 찍힌다. 서브를 넣기 전 매서운 눈빛의 정지 자세를 담았다. 사진 속에 담긴 그 모습을 여러 번 들여다본다. 여태껏 보였던 장난스럽고 개구쟁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정말 프로선수 같은 자세와 진지한 표정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그녀의 활약으로 상대팀을 적지 않은 스코어 차이로 이겼다. 어느새 주변에는 많은 동호회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녀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국가대표 선수라도 온 것 마냥 코트를 둘러싸고 그녀의 화려한 플레이를 감상한다.
"오빠~ 나 괜찮았어?"
"어~ 완전!"
"이게 제 취미!"
"취미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그녀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난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잠시 뒤 한 싱가포르 여성이 다가와서 1:1 단식경기를 제안한다. 그녀는 나름 동호회에서 실력자인 듯 보인다. 뒤에 수많은 동호회원들은 한국 vs 싱가포르의 국가대항전 경기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그녀는 나를 가리키며 오늘은 같이 온 동료와 약속이 있어 곤란하다며 내일 저녁에 다시 오겠다며 국가 대항전 경기를 내일로 미룬다. 상대 여성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내일 다시 온다는 말에 다시 한번 그녀에게 확답을 받고는 자신의 코트로 돌아간다. 주변을 둘러쌌던 사람들은 서로 웅성거리며 자신들의 코트로 돌아간다.
"오빠 가자~ 많이 기다렸죠?"
"아.. 아니"
"정말 내일 또 올 거야?"
"음… 와야겠죠? 약속을 했으니"
그녀는 내가 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체육관 밖으로 걸어간다. 땀으로 젖은 그녀의 옷에서 그녀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 땀냄새가 싫지 않다. 땀 흘리는 여자에게서 이전까지 느껴보지 알 수 없는 끌림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