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92 (개정판)
"자! 다들 오늘 전시회 진행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오늘 와서 보니 부스도 잘 되어있네요 전략기획실에서 전시회 준비 하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회장의 건배사로 전시회의 모든 공식적인 일정이 마무리되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회장은 검은 머리카락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서리가 내려앉은 듯 새하얀 머리가 더욱 중후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 2:8의 비율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는 오랜 세월 비즈니스를 한 노년의 신사를 연상케 한다. 회장의 그런 모습은 모든 직원들 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다.
자세(Attitude)와 인상(Impression)은 비즈니스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말로 순간 고객을 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속임수는 들통나게 마련이다. 일관성 있는 자세와 인상이 고객의 신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회장이 30년 넘게 선박기자재 업계에서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쌓은 고객들의 신뢰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30년 전 선박용 파이프 피팅 소재 샘플을 들고 직접 발품을 팔며 일본의 현지 조선소를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시 작은 공장 하나로 시작한 회사는 이렇다 할 영업 조직도 갖추어지지 않아 사장인 그가 직접 영업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 때는 일본이 글로벌 조선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시기였고 그는 어떻게든 일본 시장 개척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조선소가 있는 곳이라면 일본 열도 전역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런 힘든 시기를 견디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파이프 이음관 샘플이 담긴 무거운 박스를 함께 들고 일본의 여러 조선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몇 시간씩 조선소 밖에서 샘플 박스를 지키며 그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 힘든 동행을 한마디 불평 없이 같이 했다고 한다. 그 때의 동고동락 때문인지 회장내외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이 파다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말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뎌낸 아내는 평생을 함께 하는 법이다.
그는 비즈니스 맨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품위와 기품 또한 많은 직원들의 존경을 샀다.
당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일본 조선소에서 쌓여온 신뢰가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의 선박기자재 업체 중에선 드물게 회사의 매출의 절반 이상이 일본 고객인걸 보면 일본 고객사의 자사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납기와 품질을 고객 신뢰 확보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사는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우수한 평판은 당연히 국내 조선소로 흘러 들어 갔다. 국내 조선소에서도 자사에 선박기자재 발주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국내 시장에서도 단연 최고의 협력업체로 성장했다.
"오늘 한 싱가포르의 선주로부터 어커머데이션 바지(Accommodation barge)를 추가 수주했어요, 그 동안 해외영업부와 싱가포르 주재원인 이대리의 역할이 컸습니다. 앞으로도 다들 지금처럼만 열심히 해주길 바랍니다."
"와~~ 짝짝짝!"
오늘 낮에 부스를 방문한 해양플랜트 브로커로부터 발주 계약이 성사되었다. 이전부터 해외영업부와 싱가폴 지사에서 적지 않은 시간 공을 들인 해양플랜트 분야의 유명 브로커였다. 오랜 물 밑 작업 끝에 전시회를 계기로 전격적인 계약이 이뤄진 것이다.
더 반가운 소식은 2+2의 어커머데이션 바지선 계약 중 한 척은 한국에서 또 다른 한 척은 중국현지에서 건조한다는 조항을 명기 했다는 것이다. 현재 야드(Yard)가 비어있다시피 한 중국 대련 공장에서의 생산을 허락 받은 셈이다. 이제 중국 공장의 숨통이 좀 트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만약 첫 번째 건조하는 2척의 바지선이 성공적으로 인도되면 또 다른 2척의 추가 건조도 이뤄질 수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닌 메이드 인 차이나까지 허용해 준 셈이다.
뭐 사실 가격적인 면에서 중국 제작이 싸기 때문이겠지만 중국 대련의 DB중공업에는 더없이 중요한 일감이 확보된 셈이다. 이번에도 회장의 한결같은 태도와 인상에 고객의 마음을 움직인 듯 보였다. 모두가 기대에 찬 모습으로 회장의 축사에 열렬히 환호하는 모습이다.
"오늘은 다들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해요 제가 한 턱 쏘겠습니다."
"와~ 회장님! 짱!"
“짝짝짝”
“짝짝짝”
“자! 그럼 우리 모두 일어서서 회장님과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건배 한 번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들 일어나 주시죠”
해외영업부 이차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장님에게 점수를 따려는 듯 보인다. 회장은 손사래를 쳐 보이며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앉아 있는 직원들을 부추기며 건배를 제의 한다.
“자 제가 회장님을 외치면 사랑합니다로 크게 외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장님!!”
“사랑합니다!!”
이차장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건지 회장으로부터의 무궁한 사랑을 애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건배사를 외친다. 회장은 직원들의 박수와 환호성에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잔을 들어 보인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장남인 사장도 덩달아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회장의 카리스마 있는 말과 행동에 자신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린 것이 못내 서운한 듯 한 모습이다.
해외 영업부 출장자들은 회장의 칭찬에 힘입어 부어라 마셔라를 외쳐댄다. 오늘은 왠지 다들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되어간다.
[오빠! 나 이겼어!]
그녀의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녀는 정말 오늘 한국 vs 싱가포르의 국가대항 여자 단식 배드민턴 대회에 출전한 듯 보인다. 그녀는 회사 해외 출장을 온 것인지 올림픽에 참가해 국위선양을 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각종 기호 문자를 이용해 축하의 이모티콘 메시지를 성의 있게 만들어 보낸다.
[하하하 오빠랑 안 어울린다. 어쨌든 땡큐!]
"이번에 중국에서도 어커머데이션 바지선을 성공적으로 잘 인도하면 추가적인 수주가 예상됩니다. 다들 이번 수주 건은 각별히 신경 써주세요, 특히 이번엔 납기와 품질에 문제가 없도록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옛썰! 회장님!"
취기가 오른 이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는 자세를 취하며 대답한다. 사실 납기와 품질은 영업의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영업이 신경을 쓸 수는 있겠지만 영업이 원하는 데로 따라오는 생산과 품질은 없다. 첫 어커머데이션 바지선의 국내 생산 때도 납기는 2개월이나 지연되었고 인도 후 품질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터라 회장은 다시 한번 납기와 품질을 강조한 듯 보인다.
당시 영업은 납기와 품질 문제에 대한 비용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견적을 제출했다.
건조경험이 없었기에 그것에 대한 비용을 산출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후 납기 지연에 따른 비용과 사후 품질 보증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줬다. 만약 다시 한번 더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회사가 버텨내긴 쉽지 않을 거라는 게 나뿐만 아니라 회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직원이라면 눈치를 채고 있는 상황이었다.
불황과 함께 찾아온 회사의 사업 다각화는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회사는 항상 불황을 대비하며 경영을 해야 한다. 불황이 닥친 뒤 대처는 이미 늦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DB중공업 같이 규모가 크지 않는 중견 혹은 중소기업들에게 선제적인 시장조사와 세계 경제의 흐름을 파악할 정도의 정보력을 갖추진 못했다.
반면 대기업들은 강력한 정보력을 갖추고 있다. 사내 유보금도 많으며 현금 흐름도 좋을 뿐 더러 기업대출도 용이하기에 불황이 와도 버틸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중견 혹은 중소기업들은 이런 큰 실패비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자칫하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한국에 해마다 수많은 중소 기업들이 도산하고 생겨나고 반복하는 이유이다.
“야! 희택아! 무조건 대기업이야.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중소기업에 들어가 허구한 날 대기업 눈치만 보며 사는 것 보다. 늦더라도 대기업에서 시작하는 게 답이야”
입사 전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망한 회사 때문에 밀린 급여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난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해준 말이 잊히질 않는다. 몇 년 동안 업무의 구분도 없이 밤낮없이 일했지만 몇 번의 품질 문제와 단가인하 압박을 버티다가 결국 대기업이 자신의 회사를 손절하고 하청업체를 변경했다고 한다. 회사는 동아줄이라 믿고 그 대기업만 붙잡고 있다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선배는 다른 곳에 재취업을 하려 여러 관련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도산한 회사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이만 먹고 또 다시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했다며 쓴 술잔을 연거푸 들이마시더니 눈물 섞인 하소연을 내뱉는다.
다들 대기업, 대기업 외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대기업만 존속하는 한국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르는 중소기업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싶겠는가. 대기업 공채에 수천 수 만명의 응시자가 몰리고 대기업 공시족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공중파TV에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공익광고를 수도 없이 내보내며 청년들에게 회사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인재가 되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현실은 그와는 정 반대인 듯 보였다. 그런 정부의 사탕발린 말에 더 이상 속아넘어갈 청년들이 아니다.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른 말을 내뱉는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봐 왔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 왔다. 정부도 결국 돈으로 굴러가는 집단이다. 대기업과 정부는 뗄래야 뗄 수 그런 숙명과도 같은 관계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중소기업을 운운하지마 뒤로는 대기업의 손을 들어준다. 나라의 곳간을 가장 많이 채워주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가식적인 정부의 말만 믿고 자신의 운명을 중소기업에게 내맡긴 순수한 청년들은 약육강식의 씁쓸한 기업생태계의 밑바닥을 경험하고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오는 이가 적지 않았다. 도서관에는 대기업 공채과 공무원 공시족들이 넘쳐났다. 다들 대학생들은 졸업을 연기하고 늦더라도 대기업 혹은 공기업에서 출발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빠른 하이패스라는 것을 깨달은 듯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공무원이 되어 철밥통으로 평생 생계걱정 없이 살고픈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지면 고통 받는 것은 직원들이다. 이후에 밀려오는 구조조정의 압박과 임금동결 및 비용절감은 고통분담이라는 명분으로 직원들의 노동 착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모럴 헤져드(Moral hazard : 도덕적 해이)에 빠진 오너 기업은 복구하기 힘든 위기를 예감하는 순간 회사에서 빼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빼내간다. 어차피 회사는 다시 만들면 된다. 돈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 중요치 않다. 사람은 새로 쓰면 되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몇 해 동안 여기저기서 "회사는 망해도 사장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은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장은 망해도 계속 사장을 한다. 사장이 다시 직원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자는 아마 정말 교과서처럼 선량하게 경영을 한 무모한 자 일 것이다. 직원과 고통을 같이 할 만큼의 인자함을 갖춘 기업가들이 얼마나 될까? 기업가는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이 아니다.
직장생활에선 눈치가 빨라야 한다는 말이 자주 듣는다. 회사라는 배가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모른 체 타고 있다가 배와 함께 침몰당하는 참사를 막으려면 회사와 업계의 정보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묵묵히 일만 하다 묵사발이 될지도 모른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애꿎은 가족들까지 고통 속으로 빠뜨리지 않으려면 상시 안테나를 높여야 한다.
구명조끼는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이다. 누가 입혀주지 않는다. 더 현명한 사람은 배가 침몰하기 전에 갈아탄다. 그 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애초에 그런 배에 탑승을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에겐 그 정도까지의 고급 정보가 제공되진 않기에 최소한 구명조끼라도 챙겨야 하는 것이다.
회사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