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Aug 05. 2020

가족을 지키는 일

팔공 남자 시즌 2-56

"어이구! 다들 퇴근들 안 하십니까?"


  외주구매팀으로 자리를 옮긴 이노총과장은 퇴근시간 종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칼퇴근을 한다.  해외영업팀 자리를 지나가며 한 마디 던진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혈색이 좋아졌다. 그는 거의 매일 칼퇴근을 실천하고 있다. 퇴근 때마다 영업부 앞을 지나가며 약을 올린다. 팀만 옮겼을 뿐인데 삶의 질은 완전히 달라진 듯 보인다.

  반면 이노총 과장의 업무까지 떠안은 봉래 씨의 얼굴은 이전의 이노총 과장의 얼굴로 변해가는 듯 보인다. 그런 그를 야속함과 부러움이 섞인 얼굴로 쳐다본다.


"전대리님 저 이러다 죽을 거 같아요"

"봉래 씨 요즘 일 많지?"

"인도 업무에 브라질까지... 주차장은 팀장 되더니 이제 완전히 업무 손뗏어요"

"어? 브라질 업무는 가져간 거 아녔어요?"

"가져가긴요, 제가 다하고 있는데요"


  얼마 전 이노총과장의 업무까지 다 떠맡은 봉래 씨는 연일 죽을상을 하며 나와 같이 최장 야근 근무자 대열에 합류했다. 저녁시간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 한 끼로 그를 위로하려 한다.


  자리가 사람은 만든다는 말이 있다. 만든다는 말보다 변하게 한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주차장은 팀장이 되더니 실무업무는 이제 손을 뗀 듯 보인다. 팀원은 줄고 업무는 늘어나고 팀원들의 불만은 쌓여간다. 팀장의 리더십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팀장이 되고 나서 영업본부장과 영업 총괄이사의 눈치와 비유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이제 팀장에서 부장 승진으로의 발판을 다질려는 모양이다. 사실 회사에서의 성공 여부는 윗사람이 어떻게 끌어주는가가 관건이다. 수직 하향식 인사평가는 직원들의 맹목적인 복종과 충성을 조장한다. 회사의 발전과 미래가 아닌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 정말 그만둘까 봐요"

"좀만 참아봐 사람 넣어준다고 했잖아"

"그것도 당분간은 힘들듯 하네요"


  인사팀에서는 해외영업팀 인도 영업 담당으로 인도 현지 주재원으로 있던 김 과장을 소환했다. 그런데 5년간의 주재원 생활을 하고 얼마 전 귀국한 그는 병원에서 갑상선 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부부가 다 같이 암에 걸렸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현지의 열악한 환경과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생긴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일단 암 치료를 위해 무기한의 병가를 신청해 언제 해외영업팀으로 복귀할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김 과장님 참 현지에서 고생 많이 하셨는데... 결국은 몸이 망가지셨네요"


  일반적으로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을 가게 되면 관리자로 가기 때문에 많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국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실무부터 현지 인력들까지 관리 및 육성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다. 물론 그만큼의 급여의 인상이 있지만 그것은 몸과 정신의 피폐해짐에 대한 피해보상금인 것이다. 당장 더 많은 돈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써야 할 돈이 더 커질 수 있다.


"그나저나 요즘 여자 친구랑은 잘 돼가?"

"여자 친구도 힘들어 죽을라 그러네요, 그래서 그냥 때려치우고 대구로 내려오라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때려치우게 생겼네요"


  그는 대학 때부터 교제해온 오랜 여자 친구가 있다. 그녀는 서울의 한 케이블 방송사의 작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방송사 스케줄과 박봉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거의 매일 밤 그녀와의 통화는 그녀의 하소연으로 시작해서 하소연으로 끝난다고 한다. 이전에 회사일에 여유가 있을 때는 그런 하소연도 들어주며 그녀를 달래주곤 했는데 이제는 매일 야근에 시달리며 피폐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그런 하소연도 들어줄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여자 친구는 결혼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오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하는 게 두려워지네요"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않겠어?"

"둘이 합쳐져 더 무거운 하나가 되어버리는데도요?"


  결혼으로 하나 되는 삶이 행복보다 부담으로 느껴진다. 어른들은 얘기한다. [상투를 틀고 자식을 낳아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그 말이 예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많은 책임을 떠안는 과정인 것 같다. 그 책임이 세상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된다. 문제는 노동의 고단함 뿐만이 아니라 불의과 억압에도 버티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가족이 있기에 더러워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가족이 볼모가 되어 불합리한 일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기업과 사회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것일까? 불만 없는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인가?

  

"전대리는 결혼을 안 해봐서 몰라"


  가끔 회사에서 기혼자들과 얘기하다 부당함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면 갑자기 결혼 얘기가 나온다. 결혼을 하지 않아 부모의 마음과 가족의 사랑을 모르는 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옳은 것을 옳다고 얘기하지 못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싫다.


  가족을 위해 진실을 숨기고 불의를 자행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내가 더러워지는 길이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길이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말 없는 고양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