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 남자 시즌 2-62
"반갑습니다. 협력사 담당자 여러분들! 금일 모두를 한자리에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최근 과도하게 상승하는 램프 사출금형비용에 대해 협의코자 함입니다. 다들 기탄없는 의견을 부탁드리며 금형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개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완성차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회의는 1차뿐만 아니라 2차 협력사까지 확대되어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처음에 완성차 연구소에서 진행되려던 회의가 한국 오토모티브의 메인 공장이 있는 곳에서 진행되었다. 이유인 측 최근에 완공된 한국 오토모티브의 국내 최대 규모의 램프공장을 견학하고 협력사에게 귀감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1만 2500㎡의 광활한 부지에 지어진 현대식 최첨단 램프공장의 규모부터 상당하다. 공장 내부로 들어간 협력사 담당자들은 입이 딱 벌어진다. 한국 오토모티브의 공장장이 직접 공장 라인에 내려와 협력사 직원들을 인솔하며 공장을 소개한다.
공장 내부는 깔끔하고 사출 라인 및 조립라인 간 공간도 넉넉하고 한눈에 보기에 뭔가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공장 Lay-out이 잘 짜인 것처럼 보인다. 사출동에는 1800톤급 대형 사출기부터 다색 사출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잠시 뒤 들어간 금형 제작실에는 5축 가공기를 비롯한 고가의 유럽제 최첨단 금형 가공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협력사 직원들은 입이 딱 벌어진다. 특히 2차 협력사의 입장에서 참 구경하기 쉽지 않은 설비들이다.
"아따! 돈지랄을 했구먼 완전! 이건 뭐 공장이여 박물관이여?"
자사의 금형 제작팀의 사공금 차장과 함께 참석했다. 완성차에서 필히 금형 담당자의 참석을 요청하여 같이 오게 되었다. 그는 한국 오토모티브의 공장동을 둘러보더니 한 숨을 내쉬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한 마디 내뱉는다. 그는 우리회사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전라도 출신의
직원이다. 그의 제조업 공정에 대한 심도깊은 이해는 나를 탄복케 한다.
"사공 차장님, 무슨 말이에요?"
"공장이 크고 화려하면 뭐더요, 효율성이 떨어지는디... 이런 규모의 공장에 저런 최신 설비까지 투자비나 고정비가 만만치 않다니께... 그리고 공장 라인 봤죠? 보긴 좋아 보이지? 공간 효율성으로 봤을 땐 말짱 꽝이랑께"
"예?!"
그는 설계팀에서부터 생산기술팀을 거쳐 지금의 금형 제작팀까지 온 DG오토모티브에서 꽤나 잔뼈가 굵은 직원이다. 그가 바라본 공장 구조는 입을 딱 벌리고 보고 있는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는 듯하다.
"이런 공장에서 년 3000~4000억 매출을 한다는 게 말이 된당께? 우리 대구 메인 공장이 년 3000억 가까이 소화해 내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겉만 보고 실속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사의 대구의 메인 램프 공장 부지나 공장 면적에서 이곳의 거의 1/5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처음 대구공장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첫인상은 무슨 도떼기시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각 공정 라인 간격도 무슨 닭장 같이 비좁고 복잡한 구조로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다. 하지만 그곳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축적된 공정기술이 녹아 있는 곳이다. 아는 사람에게만 보는 것이다. 그 라인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그 공간 속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만이 아는 규칙과 패턴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공간 효율을 극대화시키고 작업자들을 그 시스템에 트레이닝시킨 것이다.
작업자의 짧은 동선구조와 공정간 이동을 최소화시키고 자재 공급부터 생산, 납품까지 이어지는 lay-out은 시공간 운영의 최적화를 추구해온 결과물이다.
물론 그 속에서 일하는 인간은 거의 로봇 수준에 달하는 이동 패턴과 속도를 갖추었지만 그만큼 피로도가 가중되기 마련이다. 공장이 돌아가는 그곳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도 할 수도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생각할 시간도 아깝기 때문이다.
"허긴 뭐 작업자들 널널해서 좋긴 허네, 쾌적한 근로환경 속에... 거 참! 인간다운 모습이여 하하하"
"아! 그래서 한국 오토모티브가 허구언 날 적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군요"
그렇다. 한국 오토모티브의 램프 사업부는 사업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램프사업은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대기업의 공장은 효율만 생각할 순 없다. 대외적인 시선도 고려해야 한다. 근로자의 쾌적한 근로환경과 외부 인사들의 방문도 고려한 것이다. 대기업의 간판 공장은 정재계 인사들의 간헐적 방문과 언론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나라가 대기업, 대기업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기 8:7-
당시 성경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출처까지 확실히 기억하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말씀이다. 첫 직장을 중소기업에서 시작한 나는 가슴속에 원대한 꿈을 품고 이 구절은 되뇌곤 했었다.
"야~ 쨔샤! 니 시작이 미약하면 니 나중은 더~욱 미약할끼라! 큭큭,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먼."
당시 이미 중소기업을 다니며 이미 사회 물을 먹을대로 먹은 대학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그가 소주잔을 비우며 내게 받아친 그 말의 의미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때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한국에서의 신분상승의 기회는 학창 시절까지만 유효하다. 대학의 간판이 정해지고 첫 직장의 명함이 무엇이냐에 따라 대부분의 인생의 질이 결정되어 버린다. 그것을 이미 경험한 부모들은 어떻게든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걸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자식이 놓치지 않길 바란다.
기회는 변화다. 기회를 잡지 못하면 삶의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의 Chance(기회)와 Change(변화)가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학창 시절이 그 첫 번째 기회였지 않을까?
그럼 난 첫 번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