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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06. 2020

일원론과 이원론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채사장

"나는 우주 속에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우주가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았는가?  이 물음은 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 3가지를 담고 있다.

그 세 가지 주제란 첫째, 우주란 무엇인가? 둘째, 나는 무엇인가? 마지막, 우주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이다.


 지구 밖의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무한한 우주 속에 나라는 존재는 한낱 미미한 질량 덩어리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21세기 현대 물리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속에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함을 알게된다. 거시한 우주와 미시한 우주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대립하지만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과학의 세계처럼 우리의 정신세계 또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구약과 베다로 대표되는 두 갈래의 신앙으로 갈라져 대립하며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가 믿고 확신하는 것(철학, 종교, 과학)이 진리라고 믿고 살아간다. 자신의 믿음과 다른 것은 알아보지 않고 배척하기 십상이다. 사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서 타인의 정신세계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다. 내 것도 알아가기 바쁜 세상이다. 내 것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이고 이단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분쟁 속에 수많은 철학과 종교 그리고 사상들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제로] 편에서는 1편, 2편의 현실세계와 현실 너머의 세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주와 나를 규명하고자 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책을 다 읽어도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기존의 신념과 가치관에 혼란만 가져왔다. 저자는 얘기한다. 진리를 알아가는 것의 첫걸음은 현재의 나를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원론적 가치관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거대한 우주 혹은 세계 속에서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는 미미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저자는 이것이 이원론적 가치관이라 얘기한다. 사실 이 세상의 절반 이상 사람이 이원론적 가치관을 견지하며 살아간다. 우주와 나는 분리되어 있고 나와 우주는 별개의 세계로 생각한다. 물론 상호작용은 하지만 내가 없어도 우주는 존재하고 돌아간다. 우주 속에 내가 있다.


  이원론적 가치관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절대주의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주에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것이 영원불변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된 고대 절대주의 철학은 플라톤에 의해 문서화 체계화되고 그가 제시한 이데아의 존재는 중세 기독교의 신의 존재와 그 맥락을 같이하며 상호 공존해 나간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것이 신이라는 존재로 연결된다. 절대적인 신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했고 우리는 그 신과 연결됨으로써 구원받고 영생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신은 유일하지만 신의 말은 여러 가지


  서양에서 시작된 절대적인 유일신의 존재는 [구약]이라는 경전으로 문서화되어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의 근간이 된다. 이후 신의 계시를 받은 메시아(구원자)의 존재를 두고 세 종교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이 메시아의 등장이라 말하고 이슬람교과 유대교는 아직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본다.


  기독교는 신(하나님)의 메시아인 예수 사후 사도 바울을 주축으로 기록된 신약을 구약과 더불어 경전으로 사용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최고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구약과 더불어 그가 기록한 코란을 경전으로 삼는다. 유대교는 유대인을 구원으로 이끈 모세를 가장 큰 선지자로 인정하고 구약의 모세오경(토라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신봉한다.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예수를 여러 선지자 중의 한 명 정도로 비하한다.


일원론적 가치관


  우주와 나는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서양의 신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반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동양의 가치관과 맥락을 같이한다. 서양이 신과 인간을 분리함으로써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인간과 자연, 백인과 유색인 등 세상을 두 갈래로 구분 짓고 신이 인간을 지배하듯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가치관을 보편화시켰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반면 동양의 일원론 사상은 내 안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음양, 선악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며 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그것을 찾아가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신에게 복종하고 헌신하는 삶이 아닌 침잠하고 사유하고 내 안에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내가 우주(신)가 되어가는 삶을 강조한다.


신(우주)은 내 속에 있고 내가 신(우주)이 된다. (梵我一如:범아일여)


  세상의 반쪽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문서가 [베다]이다. 인도에서 기원한 이 경전은 우파니샤드,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근간이 되며 고대 중국의 도교사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불교는 어느 정도 친근감이 있지만 나머지는 인도라는 나라가 우리가 동떨어진 느낌처럼 왠지 낯설고 생소하며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자는 그 이유를 역사 속에서 찾고 있다. 서양의 제국주의가 대항해시대와 식민 지배 시기를 거치면서 동양인의 가치관과 사상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결국 힘에 논리에 의해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약 동양의 인도나 중국이 세계를 제패했다면 지금 우리의 가치관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일원론을 돌아보다.


  서양에서도 일원론적 가치관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 짓는 이원론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그것은 급속한 산업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연의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와 피폐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우려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임마뉴엘 칸트가 등장한다. 그는 과거 2000년간 지속해오던 두 갈래의 철학(절대-상대)사조의 논쟁을 종결하는 관념론을 주장하며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지구중심 -> 태양중심)을 제기한다. 기존의 실제론에서 얘기하는 세계가 자아보다 우선한다는 개념에서 자아가 우선한다는 주장을 한다. 세계는 결국 내 머릿속의 이미지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신의 본질과 합일되기 위해서는 신의 개념도 떨쳐내야 한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또한 기독교 내부에서도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탄생했다. 독일의 신학박사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마음에 신이 내재하고 있다는 가르침을 설파했고 침잠 속에서 우리는 신의 실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당시 권위주의와 부패에 빠진 교회를 통하지 않고 신의 말씀에 닿는 방법을 제시했다.  안타깝지만 그는 당시 종교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여러 제자들에게 이어져 교회의 권위를 벗어나 자기 안에서 신을 만나려는 신앙인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21세기 양자물리학은 발견은 영원불변할 것 같던 절대적인 우주의 법칙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눈으로 보는 세계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찰자인 내가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따라 파동으로 존재하던 소립자가 입자로 바뀐다는 사실은 결국 나라는 주체에 의해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전제를 사실로 입증하게 된다.


"판단 중지"


   저자 채사장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자세는 현재의 판단을 중지하고 내가 가진 세계관을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색안경을 끼고는 다른 세계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만의 색안경을 끼고 살아간다. 그 안경을 벗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과 가치관을 내려놓는 것은 누군가에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관철시키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뤘다. 그냥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의 믿음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세상의 수 많은 곳을 들여다보며 진리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해라"  

                                                                                                               - 프리드리히 니체 -


  니체의 말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 채사장은 일원론적 가치관에 더 큰 무게 중심을 싣고 있다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그가 이 책을 위해 참고한 방대하고 다양한 문헌(철학, 종교, 과학 등)들이 그가 다방면으로 고민하며 집필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의문 속에서 가치 혼란이 가중되지만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결코 쉽고 행복한 과정은 아닐 것이다.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과 성인들도 그러했듯이 말이다.

기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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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SeqAtyaox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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