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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28. 2019

가장 완벽한 계획

숙주와 기생충,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난 후

  "계획 있는 삶을 살아라"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방학이 다가오면 언제나 그랬듯이 스케치북에 동그라미 방학 일과표를 그렸다. 방학 전 굳은 다짐과 계획은 일주일 아니 채 삼일도 지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한다. 계획은 결국 욕심이었던 것이다.

  "그래 형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계획이세요?"
  "그냥 오늘과 내일을 후회 없이 살고 싶어요"

   얼마 전 교회 목사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앞으로 호주에서 어떻게 살아갈 계획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거창한 사업계획서 같은 그럴듯한 계획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과거 회사에서 해마다 년간 사업계획을 세웠지만 해마다 계획은 빗나갔다.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기술이나 학업(영어)을 병행하여 영주권을 획득하고 안정된 이민 생활을 영위하는 것?! 그런 교과서적인 계획은 그냥 계획일 뿐이다. 최초 많은 이들이 계획에 따라 살아가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탓하며 좌절한다. 반면 간절히 원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우연찮은 계기로 영주권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정말 케바케(Case by case)이다. 변수가 너무 많다. 그 모든 변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다.
 
  여기서 만난 많은 한국 사람 중에 최초 여기 왔을 때 계획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계획은 상황에 따라 바뀌고 또 바뀐다. 그러다 보면 지금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 다음 달에는 무슨 일을 하고 누굴 만나게 될지 모르는 현실에서 어떻게 계획을 세우겠는가?

  이제는 닥치는 현실에 빨리 적응하고 생존해 나가는 능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계획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받아왔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삶처럼 보였다. 과거 밤낮없이 주말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를 위해 일했던 것은 돈을 모아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행복한 가정을 꾸밀 거란 평범하지만 희망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땠는가? 월급보다 물가와 집값이 더 빨리 오르고 돈을 모아서 집을 사는 공식은 옛날 말이 되어버렸다. 내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빚으로 인생을 도배하기 시작한다. 한 없이 오를 줄만 알았던 집값은 내가 사면 주저앉는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변화 속에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계획의 지속적인 실패는 계획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가장(家長)이 되는 것이 가장 힘들다!'


   저성장과 불확실성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안정된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가정이라는 커다란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안정된 인생이라고 얘기하면서도 세상에 쉽게 반응하고 변화하는 유연한 인간을 원한다. 많은 젊은이들은 고민한다. 가정의 심리적 안정과 행복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구속되지 않는 일인으로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유연하게 살아가느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쉽지 않다. 다만 확실한 건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후자와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이다. 일인가구가 늘어나고 결혼과 출산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가족계획은 사라진지 오래다.


'가족은 힘이 되지만 때론 볼모가 될 수도 있다'


  가장(家長)이 되면 책임감이 강해진다고 얘기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책임이 무거워지면 때론 사리분별이 힘들어질 수 있다. 세상은 가족을 볼모로 나의 불의와 악행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생계가 경쟁 속에 놓이게 될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부당한 희생도 묵묵히 받아들인 수많은 가장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당신은 계획한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남들과는 다른 우월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거나 아니면 행운이 늘 따라다니는 것일 수 있다. 어린 시절 나의 미래의 계획과 지금의 나의 모습은 많이 달라 보인다.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세상의 변화를 겪었고 나의 가치관과 생각도 변해왔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더욱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영화'기생충'의 대사가 가슴 깊이 스며든다.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실패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계획한 대로 살아지는 인생이란 없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저지대 빈민가의 사람들이 물난리를 피해 임시 대피소인 학교 체육관에 모여 있다. 그 누가 하루 아침에 수해로 집을 잃고 거지가 될 거라 계획했겠는가?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다. 가난한 가족에게 펼쳐지는 사건들은 어느 하나도 계획대로 된 것이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에서 그들은 그냥 그렇게 그때그때를 살아나간다. 안타깝지만 빈곤할수록 계획은 사라진다. 가난할수록 외부와 주변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되어 계획이 의미가 없다.

Son, you even have a plan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결국 아들의 계획이 온 가족을 더 큰 불행을 몰아넣었다. 가난한 자는 계획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반면 가진 자는 그런 외부의 변화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계획이 실패해도 큰 피해가 없다.

  당신이 어느 쪽인가? 가난한 자인가 아님 가진 자인가? 전자라고 생각된다면 계획하지 마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숙주보다는 기생충에 가까울 수 있다.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대부분은 기생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이고 이 세상의 부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숙주들은 블로그나 인터넷 서핑으로 정보를 습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은 부유한 자(재벌 기업가)들과 권력(정치인)을 가진 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그 계획에 따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는 역할이다. 계획하지 않은 결과는 좋든 싫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리얼하게 연출한 영화 '기생충(영문명 : Parasite)'의 각 장면들과 배우들의 대사에 은유되고 함축된 메시지가 때론 웃프게 가슴 깊이 파고든다.

  기생충은 숙주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죽는 법이다. 배부른 기생충은 자신과 숙주를 동일시한다. 욕심이 화를 부른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면 살충제와 구충제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과거 그렇게 많은 기생충(민주 항쟁, 노동 투쟁등등)들이 희생되어 오지 않았던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세상의 부는 편중된다.  민중은 부가 편중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다. 가진 자들의 부를 뺏으려 든다. 과거 한국이 고도 성장 과정에서 쌓인 전체적인 국부(國富)는 증가했지만 일부 대기업 재벌들에게 편중 되었다. 부가 부를 창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따라 재벌들의 부는 더욱 증가했고 부의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의 전쟁이 시작된다. 가진 자는 자본주의 논리로 못 가진 자는 민주주의 논리로 부를 움직이려 든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같이 공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상은 서로 대립되면서도 공존할 수밖에 없는 애증관계이다.


  계획하는 삶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부터 세상에 의해 주어진 계획된 삶에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다. 그 계획에 빨리 순응하고 적응하는 자만이 그래도 나와 나의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된 건 아닐까? 가진 자들은 그 계획하는 자리를 우리에게 쉽게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얘기한다. 그 자리를 넘보는 건 결국 우리의 자멸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Para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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