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차

나의 Camry 에 대한 상념들

by 글짓는 목수

"똥차를 왜 그리 자주 씻냐?"

"똥차니까 자주 씻지 ㅋㅋㅋ"


모처럼 화창한 봄날의 주말 오후,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해 손세차를 한다. 먼지와 새 똥(호주는 새 똥이 너무 많다)으로 범벅이 된 녀석을 거품을 낸 스펀지로 더러움을 벗겨낸다. 세차하는 자동차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니 친구가 이렇게 물어온다.


내차는 2001년식 올드 캠리(Camry 2nd Generation)이다.

Camry 2001

호주에 온 이후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운전해 봤다. 낯선 땅에서 택시 일을 하며 여러 종류의 차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에게 온 차가 바로 이 녀석이다. 이전에 몰던 렌터카를 통해 몰던 각종 신형 세단과 SUV들과는 확연히 다른 연식과 디자인, 한눈에 봐도 외관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아는 지인을 통해 거저 얻은 차였다. 물론 레지(차량등록), 핑크 슬립(등록 전 차량 점검), 보험료, 각종 부품 교체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이 들였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에 자차가 생겼다. (이곳은 오래된 중고차들이 많고 이민자들과 워킹, 학생들의 오고 가며 타던 차들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호주에선 자동차 잘 모르면 그냥 캠리!"


호주에선 이런 말이 있다. 캠리는 일본의 명차답게 호주에서도 베스트 셀링카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도로에서 캠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캠리는 사면 손해 볼 일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성비가 우수하다. 매매가 잘 일어나기에 중고차 가격도 잘 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는다. 한국에서도 과거 명차로 인정받았던 SM5(1세대) 세단이 바로 이 캠리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명품 캠리의 명성을 익히 들어서 지인이 귀국 때문에 내놓았다는 얘기에 주저 없이 테이크 오버(인수)를 했다.


울림과 떨림


엑셀레이터를 밟을 때마다 부릉부릉거리는 엔진의 울림이 인상적이다. 울림이 있으면 떨림도 있는 법이다. 엔진의 떨림이 운전석을 타고 뼛속까지 전달된다. 내가 차를 타고 있는 건지 경운기를 타고 있는 헷갈린다.(좀 심한 과장의 표현 ^^)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첫차였던 엘란트라(94년식)의 느낌이 떠오른다. 소리 없이 달리는 전기차가 대세로 떠오르는 시대에 자동차의 떨림과 울림은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 간에 떨림과 울림도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었으면 이런 차를 탈 수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며 나도 당당하고 자신 있게 타고 다닌다. 도로에서 심심찮게 올드 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은 자동차의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루며 달리는 곳이다.

동전함과 손목관절 운동기구

차 안에는 언텍트 전자결재 시대가 무색하게 동전함이 있고 뒷좌석에는 승객의 손목 관절을 위한 창문 여닫이 운동기구가 장착되어 있다. 당연히 차량에 블루투스 기능이 없지만 된다. 라디오 주파수를 잡아서 블루투스를 연결해주는 별도의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후방 센서나 카메라도 당연히 없다. 덕분에 거울과 육안을 십분 활용해 사방을 관찰해야 한다. 과거 후방카메라와 센서에 의존해 주차를 하며 사라졌던 나의 공간 감각을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조수석에 팔을 얹고 쌍팔년대 로맨스 영화 속에서 후진하는 장면을 다시 재현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캠 내장

웃픈 추억들


이 녀석은 나에게 많은 시련과 함께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붐비는 도로 위에서 갑자기 방향지시등(깜빡이)이 켜지지 않아 직진만 해야 했던 적도 있고, 야간 주행 중 경찰 검문에 걸려 정차 후 경찰의 지시에 따라 창문을 열려고 파워 윈도 버튼을 눌렀는데 창문이 열리지 않아 문을 열고 나오려는 나를 경찰이 위험 인물로 판단하고 총을 꺼내는 일도 있었다. 알고 보니 차량 윈도 휴즈가 나갔 단다. 주행 중에 보닛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찾은 카센터에서는 올드 캠리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한다. 누유된 엔진오일이 주변의 들러붙어 열에 의해 타면서 연기나 올라오는 거라며 주행에는 큰 문제가 없단다. 연기가 나도 안전할 수 있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당연하게 한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조치를 취해 달라는 나의 말에 엔진 청소와 개스킷을 교체해 주었다. 그나마 연기가 잦아들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이곳저곳이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아직까지 잘 달린다. 차량의 본연의 임무에는 손색이 없다. 심장은 열심히 잘 뛰는데 주변 보조 장치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290,307km

30만 가즈아!


녀석과 함께 한지 1년이 넘어간다. 며칠 전 주행거리가 29만 km를 넘어섰다. 일반 승용차의 수명을 넘어섰다. 한국에서는 주행거리 10만 km 넘은 차도 오래됐다고 하는데 30만 km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곳에는 20만 km를 넘긴 차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차량의 노화가 늦은 편이라고 한다. 한국처럼 겨울에 얼었다 여름에 녹았다 하는 혹한과 습도 높은 폭염이 반복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차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와이퍼 교체

오늘 세차를 하고 난 후 자동차 와이퍼 고무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확인했다. 떨어진 와이퍼 고무를 본드로 붙여서 썼다. 이제는 본드로도 힘들 거 같아 보인다. 근처 자동차 부품점을 찾아 새 와이퍼를 사서 갈아 끼워줬다. 갈아 끼우자 어떻게 알았는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뽀득뽀득하게 유리를 닦아내는 와이퍼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된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웃게 된다.


노년이 중년을 업다


나의 인생의 반을 살아온 차다. 나는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이 녀석은 차로 치면 이미 노년의 나이이다. 노년이 중년을 업고 다니는 격이다. 그동안 녀석은 수많은 주인을 섬기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아마도 녀석의 마지막 주인은 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수많은 웃픈 에피소드들을 안겨준 녀석에게 갈수록 애착이 더해간다.


"너는 네 장미에게 바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해진 거야"

- [어린 왕자] 중에서 -


친구의 말처럼 누군가에겐 똥차로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애마일 수 있다. 새것일수록 애착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될수록 애착이 가는 법이다. 새것은 더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만 오래된 것은 더 오래된 것으로 대체될 수 없기에 그 가치는 더해간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가치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오랜 시간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태워준 나의 하캠(하얀 캠리)에게 감사한다. 헤어지는 그날까지 무탈하길 기원해 본다. 

캠리는 목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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