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運命)과 소명(召命)사이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by 글짓는 목수

"네 안에 깃든 것을 일깨운다면 그것이 너를 살릴 것이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너를 죽일 것이다"


- [토마스 복음서 70장] -


1 Jesus said,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have will save you. 2 If you do not have that within you, what you do not have within you will kill you. " - Thomas 70 -


당신은 운명(運命)을 믿는가 아니면 소명(召命)을 믿는가?


운명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얘기한다. 소명은 사람이 하나님(신)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일을 말한다. 둘의 차이를 구분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운명이란 자신이 속한 세상의 상황과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소명이란 신이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 이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 삶을 돌아보며 과연 이 땅에 내가 온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삶을 고통이라고 얘기한다. 그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어찌 보면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를 오고 가는 시계추와 같다"

- 쇼펜하우어 -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쫓으며 고통과 권태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얘기한다.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속에 와닿는 것일까? 우리는 좋게 말하면 목표 나쁘게 얘기하면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 과정이 항상 고통의 연속이다. 그 목표와 욕망이 충족되면 일시적인 환희를 느끼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권태가 찾아오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럼 다시 다른 목표(욕망)가 필요하다. 그 욕망은 대부분 일시적인 환희를 가져올 뿐 삶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욕망과 권태를 오고 가며 인생의 대부분이 지나가고 인생의 뒤안길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이 왜 의미 없는 것들을 쫓으며 살았을까 후회를 하게 된다.


"어이구 이 돈 안 되는 인간아!"


나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은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은 인간의 가치를 돈이라는 자본적 가치로서 평가하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은 돈의 증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회는 금전적 물질적인 부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냉혹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 자본이라는 것을 창출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간다.


"무슨 일 하세요?"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이름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더 궁금하다. 이건 상대방의 존재를 하는 일과 일치시키는 것이고 상대방의 직업을 통해 그의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또한 타인이 자신에게 금전적,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의도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 순수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알고 싶었다면 당연히 상대방의 이름부터 물어봐야 하는 맞을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얘기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단지 그 이유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한 인간의 존재가치를 멸절시키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묻는다. '저 쓸모없는 인간' 우리는 간혹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해마다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국민총생산을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기술발전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물질의 풍요 속에 과연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풍요로워졌는지 물어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질과 영혼의 풍요는 비례하지 않는다.


사회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돈이 흘러가는 방향이다.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데 기여하는 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 사회와 국가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보는 뉴스에서는 항상 년 평균 경제성장률이라는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 더 치열해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와 방향이 즉 소명이 아닌 세상의 운명에 따라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운명은 자신의 길이 아니기에 모든 순간이 고통이고 권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계속 새로운 욕망을 갈구하며 순간적인 환희를 쫓으며 살아간다. 금전적 보상을 통한 육체적 정신적 쾌락과 편의를 쫓는다. 그것들이 충족되면 이제는 명예와 권력을 바라본다.


그렇게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들도 공허함이 찾아든다. 최고의 권력자도 자살을 하고 많은 이들의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도 자살을 한다. 물질과 인기와 권력이 결코 그들의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쫓던 것이 그들이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건 그들이 채우려고 했던 것들이 결코 자신을 영혼과 정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 낯선 땅에 온 이유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그리고 이곳에 삶 속에서 보고 느끼는 과정 속에서 그럼 나는 무엇을 쫓으며 살아왔고 앞으로 무엇을 쫓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아직도 그 답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 답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계속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에게 계속 되물을 것이다.


서두에 적은 복음서의 말과 같이 바와 같이 내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나를 계속 고통과 권태 속에서 살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인간들에게 저마다 가야 할 길을 정해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그 길, 즉 소명이 아닌 길을 가는 자들은 그 삶이 지옥일 것이고 그것을 아는 자들은 삶이 천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존재의 이유를 아는 자는 묵묵히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우리는 자신이 가야 할 소명의 길과 지금 가고 있는 운명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며 누군가는 소명의 길을 누군가는 운명의 길을 또 누군가는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간다. 모든 이가 세상이 바라고 요구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좇는 삶이 아닌 의미를 쫓는 소명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운명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소명을 따를 것인가?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도마 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