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산다는 것

평범한 남자 시즌 2-44 (추가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어떻게 그런 일이..."

안에스더가 검은 상복을 입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내 앞에는 그녀의 약혼자인 요한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 미소 띤 그의 모습은 그녀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그녀는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벽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더 이상 울 힘도 없어 보인다.

"누나~ 힘내요. 요한 목자는 이제 고통 없는 하나님 곁으로 가셨을 거예요"

나의 조문 인사말에 그녀는 다시 울컥했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는 그녀를 부축한다. 더 이상 터져 나오지 않는 울음 대신 넘어갈 듯한 숨소리만 내뱉는다. 그녀의 팔을 부축한 채 그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다.

"희택형제, 미... 안 해요"

"괜찮아요. 더 울어요"

불안정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한쪽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고여있다.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상기된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요한은 이른 아침 세탁물을 배달하다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음주운전을 한 덤프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의 차는 튕겨져나가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그를 차에서 꺼내었을 땐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신을 확인한 자리에서 바로 실신을 했다고 한다.

요한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다. 세상을 엇나갈 뻔할 때마다 그를 바른 곳으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서로의 힘든 과거가 둘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둘은 교회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랑을 하고 또 다른 이에게 그 사랑을 실천했다. 그런 그들에게 그것도 과분한 행복이었을까?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다. 하나는 죽음으로 다른 하나는 평생 그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가족이 없는 요한의 빈소를 홀로 지키고 있다. 장례식장에는 안쓰러운 표정을 한 교회 사람들의 조문만 있을 뿐 그 이외 다른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언~니!"

띠아오챤과 쑨샹이 빈소를 찾아왔다. 띠아오챤이 빈소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달려들며 부둥켜안는다.

또다시 장례식장 안은 울음바다가 되어버린다. 띠아오챤은 정말 그녀의 슬픔을 나눠가지려는 듯 눈물과 울음을 쏟아낸다. 쑨샹도 그 둘을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大叔,你也来了?”(아저씨도 왔어요?)

“응, 你没事吗?” (응, 너 괜찮아?)

“没事, 可你怎么一点眼泪都没有?”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려요?)

“我从来没有人家面前流过眼泪” (난 누구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

“为什么?” (왜요?)

“不为什么, 我也不知道,就这么过来的” (왜는, 나도 몰라)

띠아오챤은 붉어진 눈시울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내가 이상한 듯 쳐다보며 묻는다. 나도 슬프다.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게 익숙지 않다. 내가 슬퍼 울면 상대방이 더 슬퍼할까 걱정되어서일까? 아니면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일까?

[울면 안 돼!]

어려서부터 울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온 탓일까? 우는 아이에겐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지 않는다. 좋아하는 만화영화[개구리 왕눈이]에서는 울지 말고 일어서서 피리를 불어라고 했다. 슬플수록 즐거운 척 하라며 이해하기 힘든 노래를 계속 따라 부르다 보니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누구도 그냥 울도록 놔두지 않는다. 슬픔은 나쁜 것이라 교육받았다. 하지만 슬픔은 온전히 그것을 느낄 때 사라지는 것이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아프면 아파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다. 기뻐도 티 내지 말고 슬퍼도 안 그런 척 아파도 참아야 하는데 더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내 앞에 당사자보다 더 슬퍼하며 눈물짓는 띠아오챤은 내가 이상하게 보일 만도 하다. 잠시 뒤 연변 아주머니 최씨와 딸 향미도 조문을 찾아왔다. 최씨 아주머니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이며 그녀를 위로한다. 그녀의 어린 딸 향미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빈소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오셨네요"

"그럼 우리 하늘나라로 가신 요한과 그 누구보다 힘들어할 안에스더 두 목자를 위해 기도할까요?"

나는 장례식장에 모인 목장 식구들에게 기도를 제안한다. 왜 내가 기도를 하자고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모두가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그 기도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하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창세기 3:19 -

장례식이 끝이 나고 목장 식구들과 같이 교회 근처의 산에 올랐다. 안에스더는 화장한 유골함 속의 요한을 흩뿌린다. 요한은 산바람에 흩날리며 숲 속의 나무들 사이로 날아가 흙 속으로 돌아간다. 요한은 평소 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와 주일 예배가 끝나면 가끔씩 이 산에 올랐다고 한다. 우리들도 가끔씩 그를 따라 올라온 기억이 있다. 그녀는 그를 보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의 유골을 몇 번 흩뿌리더니 또다시 슬픔이 터져 나와 자리에 주저 않고 만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그를 대신 보내준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 품으로 갔을 거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믿는 그녀도 그것이 위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이다. 예수와 하나님을 믿으면 죽음의 형벌이 축복으로 바뀐다고들 한다. 죽은 자는 천국으로 가는 축복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형벌과도 같다.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럼 그녀가 지금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서 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형상과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믿고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믿음과 사랑은 사실 형상과 실체가 있는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상실감에 고통받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을 믿음으로서 고통받는다.


"으아아아앙~"

땅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안에스더는 눈물로 젖은 흙을 움켜쥔다. 그녀는 지금 차마 내뱉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슬픔으로 대신하고 있다.




"웬일이야? 니가 나를 다 불러내고?"

"친구가 친구 불러내는 게 뭐 이상하나?"

"뭐 그건 그런데... 춘곤이는?"

"오늘 춘곤이 얘기는 하지 마라 줄래"

"둘이 싸웠니?"


미숙이 나를 찾아왔다. 대학가 근처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안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소주부터 들이켠다. 나는 그런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며 앉아있다. 그녀가 이렇게 홀로 나를 찾아온 건 처음이다.


"희택아 넌 연애 안 하니?"

"하하하"

"왜 웃어?"

"얼마 전에 춘곤이도 똑같이 물었었거든"

"춘곤이 얘기는 하지 말라니깐"

"얘기 다 들었어"

"..."


그녀는 친구로서 나를 만나러 왔지만 그건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다.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 친구의 연인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친구와의 결별을 얘기한다. 나는 남녀 간의 우정을 믿지 않는다. 남녀 간의 우정이라는 감정은 양쪽의 각별한 통제가 있어야만 지속 가능하다. 만약 누구 하나라도 이성(理性)의 선을 넘어버리는 순간 우정은 사라진다. 과거 나 또한 오랜 기간 이성(異性)과의 우정을 자신했었다. 나 또한 결국 그 감정을 선을 지키지 못했다. 물론 상대방도 그 선을 넘어오긴 했지만 서로가 그 타이밍이 일치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정이 사랑으로 변환되려면 여러 가지 상황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후회와 상처만 남길 뿐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친구의 연인이라면 상황은 심각하다. 남자의 우정을 깨뜨리는 가장 큰 두 가지 이유는 바로 돈과 여자이다. 금전관계는 나중에 어떻게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성관계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여자를 건드리는 친구와는 절대 같이 할 수 없다. 서로 칼부림이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이 많지만 남녀 간의 치정(癡情)만큼 어지러운 것도 없는 듯하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 것이다. 남녀가 사랑이든 정욕이든 일단 빠지고 나면 이성을 상실하고 둘 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도덕적 관념도 잊어버린다. 그만큼 태초부터 생긴 암수간의 끌림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인간세상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결혼과 같은 법과 제도 혹은 윤리, 도덕적 관념으로 통제해 왔다. 그것이 동물과 인간이 구별 지어지는 가장 특징이기도 하다.


"난 다시 행복하면 안 되는 거니?"

"무슨 말이야?"

"한 번 실패하면 아니 한 번의 실수로 계속 불행해야 하는 거니?"

"..."

"사업도 공부도 실패하면 다시 할 수 있는데... 사랑은 왜 그게 안 되는 걸까?"

"왜 안돼, 하면 되지"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하지만 자기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 다를 뿐이지, 애 딸린 미혼모가 사랑을

다시 한다는 거... 결코 쉽지 않아, 음... 뭐 사랑은 가능하겠지만 행복할 순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


나는 미숙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다. 사랑과 행복이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다. 사랑을 하면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사랑이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녀는 행복을 꿈꾸며 사랑을 했을 것이다.


"이제 사랑 안 하려고"

"..."


그녀는 술잔을 비우며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은 슬퍼 보인다.


"지이이이잉"


테이블에 놓여있는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바보 춘곤이]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자가 보인다. 그녀는 핸드폰을 덮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들이켠다. 바보는 순수하다. 우리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온갖 상념들에 휩싸여 살아간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한다. 집중하더라도 나에게 이익이 될지 안 될지 철저하게 계산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다. 바보는 다르다. 그냥 좋으면 돌진한다. 뒤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바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춘곤은 그녀에게 바보로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춘곤이랑 헤어지려고?"

"사랑과 현실은 별개인 것 같지 않니? 사랑을 쫓으면 현실에서 멀어지고 현실을 쫓으면 사랑이 멀어지고..."

"..."

"넌 춘곤이랑은 많이 다른 거 같네"

"무슨 말이야?"

"넌 현실적이잖아"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다. 난 사랑을 쫓고 싶지만 현실을 놓고 싶지 않다. 그래서일까 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심장이 두근대는 사랑도 열정을 쏟아부을 일도 없다. 나의 심장은 그냥 세포가 죽지 않도록 적당한 산소를 머금은 혈액만 공급하는 순수한 기능만 하고 있을 뿐이다. 심장이 터질듯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그녀처럼 이렇게 후회하는 모습의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후회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진다.


"희택아! 그냥 너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맞는 거 같아"

"평범?"

"아등바등 현실에 쫓겨서 사랑과 싸우고 때론 사랑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뭐 그런..."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겐 내가 평범한 것이다. 사회가 원하고 세상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길들여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것일까? 그러고 보면 평범은 나를 죽이고 세상이라는 톱니바퀴에 나를 끼워 맞춰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띠리리리링"


이번엔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의 핸드폰이 울린다. 춘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나의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고는 받지 말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술잔을 권한다.


"희택아! 먹고 죽자! 오늘은 다 잊고 싶네, 자 건배!"


그녀는 내가 미처 들어 올리지 않은 테이블 위 내 술잔을 향해 팔을 뻗어 부딪치고는 단숨에 들이켠다. 그런 그녀를 모습을 술잔을 들고 바라본다. 그녀는 비운 술잔을 테이블에 놓고 나에게 눈치를 준다. 나도 들이켠다.


오늘은 왠지 술이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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