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43 (추가개정판)
"이과장님! 떴어요! 떴어! 인사 공고 외주구매팀!"
"정말?!"
"와! 드디어 떠나시는 겁니까? 이 과장님!"
"와! 외주구매팀! 꿀이네"
"이제 갑이네요 과장님 축하드립니다."
다들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정기 인사 공고에 다들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노총과장이 드디어 해외영업팀을 떠나게 되었다. 몇 년간의 숙원이 드디어 풀리는 순간이다. 이 과장은 뒤에 앉은 윤채준 대리가 가장 먼저 인사 공고를 확인하고 팀원들에게 알린다. 이 과장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엑셀 화면을 응시하다 윤대리의 말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놀라는 눈치다. 사내 게시판으로 접속해 자신의 인사 공고를 직접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깊은 탄성을 내쉰다. 그 모습이 마치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교도소의 긴 하수구 터널을 통과한 후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킥하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이제 과장님 다크서클 사라지시겠네"
연말 인사 공고 게시판에는 최지원 부장을 대신해 팀장대행으로 있던 주차장도 정식으로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팀장 승진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과장이 영업팀을 탈출한다는 소식만이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말은 다들 몸담고 있는 이곳 영업팀을 지옥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님! 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야! 넌 안돼!"
"올해까지 하고 보직 변경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셨잖습니까?"
"야! 어떻게 한 팀에서 두 명씩 나가냐? 그리고 다른 팀에서 아무도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데 어떡해?"
이곳을 떠나려고 고대하던 사람은 이노총과장만은 아니었다. 옆에 앉아있던 송중건 대리는 벗겨진 머리를 움켜쥐며 주차장에게 불만 섞인 표정으로 얘기한다. 그가 해외영업팀에 왔을 때는 두피가 보일 정도까지 숱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유럽 담당을 맡으면서 몇 년간은 국내외 그리고 낮밤 구분 없이 일해하면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이제 돌이 다돼가는 둘째 아이는 그의 잦은 장기 해외 출장으로 아빠와 있는 것을 어색해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년부터 계속 보직 변경을 요청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던 손을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간다. 그가 움켜쥐었던 머리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노총 과장과 송중건 대리는 지속적인 보직 변경을 요청해 왔다. 주차장은 그 둘에게 1년간 각각 인도+브라질과 유럽+터키의 업무를 더해주는 대가로 보직변경을 해주겠다는 언약을 했던 모양이다. 회사는 항상 직원에서 100%가 아닌 그 이상을 요구한다. 요구에 부응하면 땡큐이고 100%만 해도 손해 볼 건 없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와야지만 나갈 수 있는 법이다. 회사는 공식적으로 직원들의 순환 보직을 장려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영업본부의 강도 높은 업무와 더러운 고객 응대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있는 상태에서 그 누구도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는 자가 없었다. 더욱이 일 잘하는 인재를 타 부서에 줄 멍청한 부서장은 없다. 누군가가 온다면 둘 중 하나다. 일을 못하거나 아니면 그 위에 부서장과의 관계가 안 좋거나.
마침 인도 공장에 주재원으로 파견 나가 있던 김과장이 해외영업팀으로의 복귀가 성사되어 이 과장은 꿈에 그리던 쇼생크 탈출을 성공시켰다.
"축하드립니다 주 팀장님! 회식 한 번 하셔야죠?"
"어!? 어... 그래 고마워"
팀 내의 희비가 엇갈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구 과장이 뒤늦게 주차장 아니 주 팀장에게 영혼 없는 목소리로 승진 축하 메시지를 전한다. 구 과장의 비상한 머리는 언제나 빠르게 회전한다. 이제 공식적인 인사권을 가지게 된 주차장을 더 이상 무시할 순 없게 되었다. 정권이 바뀌면 빨리 처세를 바꿔야 한다. 쓸데없는 감정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태도로 일관하다 직장 생활이 꼬일 수가 있다. 그래서 직장인은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항상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상황과 분위기를 주시하면서 그때그때 색깔을 바꿔야 한다. 괜한 자존심과 줏대를 내세우다간 밥그릇이 날아가 버릴 수 있다.
"힘내! 송대리! 내년에는 우째되겠지"
"최부장님은 이제 못 돌아오시나 보네"
"최부장이었음 아마 어떻게든 내뱉은 말은 책임지셨을 텐데..."
"이 과장 가면 봉래 네가 이제 인도 다 맡아해야겠네 큭큭, 너도 이제 집에 가긴 글렀다. 하하하"
저녁 시간 주 팀장을 제외하고 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사 근처 돼지 찌게 식당에 모여 앉았다. 주 팀장은 영업본부 이부사장과 견이사의 호출로 일찍 퇴근했다. 아마 그들만의 축하 연회를 하려나 보다.
"와이프한테 내년에는 잘할 거라고 약속했는데..."
송대리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앉아 평소 마시지 않는 소주를 잔에 따라 혼자 들이켠다. 다들 놀라는 눈치다. 신실한 기독교인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내심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온전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다시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할 듯 보인다. 그의 그런 모습에 이 과장은 기쁜 내색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조용히 분위기를 살피며 술잔을 들이켠다.
"아놔! 그나저나 이제 주차장 아니 주 팀장 비위는 또 어떻게 맞추나? 어이! 전대리! 나도 떠나야겠다. 빨리 좀 치고 올라온나, 니가 씨~ 업무를 혼자 다 쳐야지 내가 맘 편히 떠날 거 아니가? 어이~"
구과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괜한 화살을 나에게로 돌린다. 그를 노리는 곳이 많다. 구 과장은 베이징 공장의 영업담당으로 매출과 영업이익 신장의 주역이다. 그래서 중국 베이징 공장과 상하이의 중국 로컬 영업팀에서 수시로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재이다. 영업본부의 이부사장의 승인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날아갈 태세이다. 그도 이제 아이도 생겼고 해외 주재원으로 연봉도 올리고 중국에서의 자녀교육까지 생각하는 눈치다.
최근 상하이의 로컬영업팀장과 자주 연락을 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와 직접적인 업무연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하이 로컬영업팀의 지원업무에는 발 벗고 나선다. 일은 내가 다 하는데 생색은 그가 다 낸다. 상하이로의 주재원 파견의 발판을 다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무래도 베이징보다는 상하이가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팀원들은 겉으론 서로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자신의 이익과 미래를 위해 철저히 계획된 것이다. 만약 그 이익과 계획이 다른 팀원들과 충돌되거나 방해를 받게 된다면 언제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직장은 야생과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며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 때론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공격도 해야 하고 때론 동료를 이용하고 때론 버려야 하는 냉혹한 세계이다. 오늘도 무사히 야생의 하루가 끝나간다.
"뭐야 4% 인상이야?"
"그러니까요, 어째 해마다 급여 인상이 물가 상승률이랑 똑같니?"
"회사 매출은 해마다 20~30%씩 성장하는데..."
"완전 꼼수 같은데요"
"직원 월급을 많이 올려주면 버릇된데요, 그럴 바엔 세금을 더 내겠다면서... 그랬다는데요"
"X발! 그게 말이가 방귀가?"
회사 게시판에 올해 노사가 합의한 급여 인상에 대한 공지가 올라왔다. 휴게장소에는 수많은 직원들이 연신 구름과자를 피워대며 올해 급여 인상 공지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다. 해외영업팀의 직원들도 모여 그 얘기로 열을 올리고 있다. DG 오토모티브 회장이 내뱉었다는 말이 직원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한 말이겠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한번 뱉은 말은 결국 돌고 돈다. 처음 했던 말 같다면 다행이지만 말은 전파되면서 변형되고 덧붙여지기 일쑤이다. 무엇이 진실이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리도 만무하다.
그 해 DG 오토모티브 회장은 성실한 납세 기업가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경북 지역 신문에서는 그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이 담긴 뉴스 기사가 전면부에 실렸다. 그는 거의 해마다 우수 납세 기업가로 표창을 받고 있다. 누가 보면 NPO(Non-Profit Org : 비영리조직)인 줄 알 것 같다.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회장 덕분에 직원들의 불만은 쌓여간다. 그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하는 지역 유지이자 갑부이다. 그의 재산은 나날이 불어나는데 직원들의 삶은 궁핍해 보인다. 그나마 몇 년 전 집권한 장남인 사장이 적극적인 회유로 직원 급여 수준이 소폭 향상되었지만 경쟁사인 한국 오토모티브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그런 큰 급여 차이로 인해 직원들의 이직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대리, 과장급은 겉으로 표현하진 않아도 대부분 경쟁사로의 이직을 고민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만약 물가나 집값을 고려했을 때 서울 혹은 수도권에 연고나 거주지가 없다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래된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 드는 금전적 혹은 비금전적 기회비용이 이곳 대구경북 토박이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TK(대구경북)가 고향이나 근거지가 아닌 직원들에게는 크게 미련이 있을 리 없다. 갈 수만 있다면 옮기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는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 무엇이 될 것인가? 현재 DG오토모티브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직원이라면 임원의 꿈도 꿔볼 수 있겠지만 대기업인 한국 오토모티브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곳에서 임원은 진골 출신, 즉 공채 출신이나 해외 유학파들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년을 채운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살벌하고 냉정한 세계이다. 뱀의 머리가 되느냐, 아니면 용의 꼬리가 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용의 세계도 경험해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노조가 돈을 쳐 먹은 게 분명해!"
"그니까요, 이번에 노조 위원장 차도 바뀌었던데요"
"도대체 얼마나 쳐 먹은 거야"
"노동자의 권익을 대표해야 할 새끼가, 지 배만 쳐 불리고 앉아있구먼"
노조 위원장은 회장 일가와 친분이 두터운 듯 보인다. 소문에 회장과 자주 골프도 치러 다닌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노사가 운동도 같이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실로 조화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과 하는 짓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노조위원장은 어떻게 노조위원들을 구워삶았는지 해가 바뀌어도 그는 바뀌지 않는다. 군부시절 독재 권력을 지닌 사람 같다.
"월급은 안 오르는데 집값만 오르네요! 이렇게 올라서 언제 집을 사죠?"
"야! 집은 니 돈으로 사냐? 은행이 사주는 거지 니 이름으로 하하하, 일단 사고 봐야지 월급으로 돈 버는 세상은 끝났어 집으로 돈을 벌어야지, 부동산이 답이다"
"뭐 집값이 대출이자보다 더 오르니 빚내서 집 사는 게 정답일 수도 있죠"
구 과장은 푸념 섞인 나의 말에 쏘아붙이듯 말한다. 그는 최근 대출을 끼고 이름 있는 역세권 신축 아파트 사서 이사를 했다.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값이 몇 천만 원 더 올랐다며 자신의 탁월한 선택을 자랑하듯 말한다.
물가 상승률에는 주택구입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해마다 올라가는 집값이 물가에 상승률에 포함된다면 국민들의 분노 게이지도 올라갈까 두려워서일까?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모아도 집값을 따라잡을 날은 묘연해 보인다. 땀 흘려 번 돈으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
한국이 ‘사기 공화국’이란 오명(汚名)을 가지게 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사기와 편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삼대가 빈곤을 면할 수 없다. 내 빈곤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부모는 없다. 웃기게도 법적으로 사기 친 돈을 강제로 환수할 수도 없는 허점을 가지고 있다. 희대의 사기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건 다 이 때문이다. 사기를 쳐서 걸려도 나랏돈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잠시 격리 생활을 하다가 나와서 인생의 반전 드라마를 시작할 수 있다. 만약 돈 많은 기업인이나 명망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마저도 할 필요가 없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자들이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나라가 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나 아파트 샀다”
“헉! 진짜?”
“어디에?”
“해운대 마린시티에”
“헐~ 대박! 어떻게”
“여태 모아둔 돈이랑 회사에서 돈 조금 빌리고 집에서도 좀 보태 주고 해서”
“그래도 거긴 엄청 비쌀 텐데…”
“미주랑 나랑 은행 직원 대출하면 대출 이자가 거의 없거든, 글고 미주랑 나랑 열심히 모았지 큭큭”
“야~ 대단하다. 친구들 모임에도 안 나오고 슬슬 피해 다니더니 열심히도 긁어모았나 보네”
“야~ 너도 빨리 모아서 집사! 집이 재산이다. 집 산지 두 달 됐는데 벌써 2천만 원 올랐다”
“헐~ 한 달에 천만 원씩 오르냐? 대박이네 넌 미주랑 둘이 합쳐 연봉 1억 넘으니 해운대에 집 살 생각이라도 하지 난 부산 안에서 집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자식아”
오랜만에 귀덕이와 만났다. 결혼 이후 그와 얼굴 보기가 부쩍 힘들어졌다. 얼마 전 그의 와이프가 임신한 이후로는 거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계모임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던 그였다. 그런 그가 오래간만에 부산에 내려온다는 나의 말에 급 번개 만남이 성사되었다.
친구들 중에서 그나마 귀덕이와 대화가 잘 통하는 건 나였다. 그건 같은 화이트컬러로 회사 생활을 하는 공통분모가 있어 서로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대화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총각 시절에는 다른 친구들과는 별도로 따로 만나 술 한잔씩 하는 일이 있었지만 유부남이 된 이후 그를 만나는 일이 유명인사 만나는 것처럼 힘들어졌다.
오늘 만남이 성사된 건 그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소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귀덕이는 꼬치 친구들 중에서 결혼도 내 집 마련도 가장 빨리 이룩했고 덤으로 2세까지 얻었다. 삼십 대 초반에 모든 것을 이뤄낸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재테크는 집이라며 자신만의 자산 증식 노하우를 얘기하며 나에겐 꿈만 같은 주택 구입을 종용한다. 나는 그의 자랑을 들어주며 쓴 소주를 들이켠다.
돈이 없어도 집은 살 수 있다. 하지만 내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돈은 은행에서 주고 명의만 자신의 것일 뿐이다. 은행은 빚을 남발하며 나날이 살을 찌운다. 그래서일까 금융권에 종사하는 자들의 연봉은 해마다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직원금리라는 기준금리와 시중금리를 초월한 특별한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다. 아무런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는 돈놀이(금융)를 하는 자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지고 실물 경제(제조)를 돌리는 자들의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집을 계약하는 것과 동시에 은행과의 채무계약도 이루어진다. 후자는 종신계약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며 회사를 하루라도 더 오래 다녀야만 할 이유가 된다. 그렇게 집과 직장의 노예가 되어간다.
“이야~ 은행이 참 좋기 좋네”
“나도 졸라 힘들다. 위에서 얼마나 스트레스 주는 줄 아냐?”
“야 스트레스 없는 직장이 어딨냐? 나도 그 연봉이면 뭐 상사 똥꼬라도 핥겠다 이 자식아 큭큭”
“지랄!”
“근데 너 혹시 재득이 돈 빌려줬냐?”
“어?.... 어 왜?”
“아니 얼마 전에 돈 좀 필요하다고 연락 왔길래?”
“어 재득이 사업이 잘 안 되나 보더라. 요즘 일감이 없어가 대출이자 내기도 힘든가 보던데…”
“그래? 많이 빌려준 거가?”
“뭐 적진 않지, 사실 녀석 사업 시작할 때도 좀 보태줬거든, 설비기계 살 돈이 모자란다고 해서”
“진짜?!”
“어쩐지… 재득이가 언젠가부터 니 말이라는 껌뻑 죽더니만 그게 다 그 때문이었구만…”
은행을 다니는 귀덕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은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그는 꼬치친구들에게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몇 백만 원까지 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럼 사실을 몰랐지만 언제부터인가 미묘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서로 너무 다른 색깔을 지닌 5명의 꼬치친구들은 모이기만 하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워낙 자기주장들이 강해서 항상 논쟁이 끊이지 않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친구들이 자신의 성질을 죽이고 귀덕이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었다. 내가 귀덕이 의견에 반박하거나 논쟁을 펼치면 나머지는 이상하게도 귀덕이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못내 서운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귀덕이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과거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무시당한 것은 나의 주장의 정당성이나 논리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친구들 사이의 우정도 자본시장의 논리에 따라 이해관계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꼬치 친구들과 금전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의 그 순수했던 우정을 잃지 않고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거란 허망한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돈이 우정을 대변하듯 친구들은 금전 교류가 전혀 없는 나와의 관계가 편했을진 몰라도 소중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항상 변함없이 나를 옹호해 주던 친구도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마음 가는 곳에 돈을 쓰기도 하지만 돈 가는 곳에 마음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