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42 (추가개정판)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어떤 놈이 자동차 구매팀에 우리 BOM(Bill of Materials: 자재 명세서)을 보냈어?"
아침부터 국내영업팀 수장인 빛나리 장부장의 고함 고리로 시끄럽다. 목소리의 파장을 느껴봤을 때 뭔가 심상치 않는 사건이 터진 듯 보인다. 국내영업팀의 김준표 과장과 고정안대리 그리고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빛나리 장부장의 파티션 앞에 일렬로 서있다. 파티션 위로는 형광등 불빛에 반짝이는 벗겨진 머리와 쉴 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는 반복하는 손가락질만 보인다. 그리고 입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총탄 소리가 전 사무실에 울려 퍼진다.
"좆됐다! 결국 이렇게 터지는 구만"
"예? 무슨 일 예요?"
"국내 영업 신입이 최근 양산 들어간 국내 차종 헤드램프 BOM을 구매팀으로 보내줬나 봐!"
"그런데요?"
"야! 그런데요는... 감이 안 오냐?"
"..."
"베이스 코팅(Base Coating)!"
"아!"
휴게 시간 해외영업팀 멤버들이 모여서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숙덕거리고 있다. 램프 업계에도 자체적인 기술개발과 공정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동차 램프에는 수십 가지의 플라스틱 사출 구조물이 조립된다. 자동차의 램프가 빛과 열을 내는 제품이고 외부 날씨와 기후에 영향을 많이 받는 제품이다 보니 내열(耐熱), 습기(濕氣), 진동(振動)등의 까다로운 품질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한 차종에 들어가는 사출 구조물만 수십 가지가 넘고 그 재질도 다양하다. 그 말은 수십 개의 사출금형을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출 구조물의 품질은 사출금형을 어떻게 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만큼 금형의 설계 및 제작 기술이 중요하다. 사이즈와 내용물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지만 금형 한 벌에 적게는 몇 천만 원에서 몇 억씩 하기 때문에 램프 하나 만들기 위한 개발비용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에 달한다.
자동차의 헤드램프(Head Lamp: 전조등)에는 빛을 전방으로 반사시키기 위해 반사경(Reflector)에 알루미늄 증착 코팅기술(은박 색 표면 코팅)이 적용된다. 과거 플라스틱 반사경에 증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사출 건조 후 증착할 표면에 베이스 코팅(기름 성분)을 거쳐 증착 챔버에(Chamber)에 넣어 증착을 해야 했다.
몇 해전부터 금형 제작 기술이 크게 향상되고 베이스 코팅을 하지 않고도 증착 후 배광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공정이 생략된 것을 완성차에게 알리지 않았고 몇 년간 베이스 코팅비용을 완성차에게 청구해서 받아온 것이다. 물론 고객사의 원가 표준 개정 때마다 공정 실사에 대응하기 위해 베이스 코팅 공정시설을 그대로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 사실은 대외적으로는 특히 고객사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그런데 신입사원은 완성차 구매팀에 자사의 헤드램프 내부 BOM 그대로 보내버린 것이다. 완성차의 BOM에는 베이트 코팅이 있을 리가 없다. 구매팀 담당자가 그걸 확인하고 자동차 구매팀장에게 얘기가 흘러들어 간 모양이다. 장부장은 일단 출도전 미완성 BOM을 잘못 보낸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한 차종이 아닌 여러 차종의 BOM이 모두 Base Coating 이 빠져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강제 CR 크게 한 방 때려 맞겠는데요"
"아냐 그러긴 힘들걸"
"예?"
"... 무슨 말이신지"
"야야! 생각을 좀 해봐 봐! 우리만 램프 만드냐?"
"아!"
"오 역시 구과장님 생각은 항상 한 발 앞서 가시네요"
구과장은 해외영업팀에서 가장 영민(英敏)한 두뇌를 가졌다. 사실 그게 나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된다. 완벽한 사수를 둔 부사수의 존재감은 미비해지기 마련이다. 영웅의 아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눈총만 받으며 살아가는 이치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평생 영웅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아닌 누구누구의 아들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랄까?
구과장의 말대로 램프 업계의 양대 산맥인 중 하나인 한국 오토모티브는 한국 자동차의 계열사이다. 두 회사는 수직구조처럼 보이지만 사실 수평구조이다. 한국 오토모티브가 회장의 실질적인 캐시카우(Cash Cow)인 회사이다. 만약 DG 오토모티브가 강제 CR을 당하게 된다면 한국 오토모티브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 회사도 마찬가지로 베이스 코팅비용을 동일하게 받아왔던 것이다. 물론 같은 그룹이니까 뭐 다른 호주머니로 돈만 옮기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복잡해진다. 오너의 호주머니를 건드릴 무모한 용기를 가진 부하직원을 없을 것이다.
"야! 완성차 내부적으로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걸, 알면서도 그냥 쉬쉬하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야~ 못 건드려 절대! 안 그래도 한국 오토모티브 램프사업 맨날 적자라고 죽는소리하고 있는데 저기서 또 깎이면 램프 사업부 아작 날걸... 큭큭큭"
"이거 완전 치킨 게임 같네요 정말"
한국 오토모티브가 램프사업에 뛰어든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램프부품이 전장부품으로 *원단위가 올라오면서 모듈사업에 뛰어든 한국 오토모티브가 램프사업까지 확장한 것이다. 기존의 영세한 램프 기업들을 인수하고 DG오토모티브에서 인력도 빼내가면서 대규모 투자를 해서 최신식 램프공장을 건립했다. 그 이후 양사 간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램프 가격의 하향평준화를 이루었다. 결국 완성차 그룹은 부품사업까지 확장하며 기존 부품사들의 밥그릇까지 뺏어가며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우리도 빨리 해외 완성차를 제대로 뚫어야 돼, 안 그러면 SW오토텍 꼴 난다니까"
DG오토모티브도 계속되는 한국 자동차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 다른 글로벌 완성차의 제품 수주와 매출 비중을 올리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힘을 쏟고 있다. 그런 활동들은 최대 고객인 한국 자동차가 모르게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사장 직속인 글로벌 영업부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내가 소속된 영업본부의 국내영업팀과 해외영업팀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소문에 새로 취임한 회장의 장남인 사장은 그곳에 갖은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영업본부의 영업직원들은 한국 자동차를 벗어난 글로벌 영업부 직원들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적어도 영혼까지 팔아야 하는 더러운 갑을 관계가 아닌 대등한 비즈니스 관계로서 고객들과 업무를 진행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려 가는 부당한 출장과 부당한 자료 요청으로 인한 야근으로 찌들어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혈색이 달라 보였다. 해마다 하는 건강검진 결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글로벌 영업부과는 달리 영업본부의 국내영업팀과 해외영업팀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고지혈증과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었다.
같은 회사라고 다 같은 직원이 아니다.
"하아~ 희택아! 씨X!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
"그게 인생이야 인마!"
토요일 저녁 춘곤이 찾아왔다. 나의 원룸 근처의 막창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대구에 온 뒤뒤 초창기에는 내가 힘들어서 녀석을 자주 찾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된 것 같다. 나는 직장생활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깎이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나만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춘곤은 달랐다. 마치 방금 낚싯줄에 걸려 올라온 물고기처럼 온몸을 파닥거리며 거세게 저항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에게는 소용없다는 것을. 그냥 빈 소주잔이나 채워주며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런 위로마저 없다면 녀석은 폭발해 버릴지 모른다.
"그 년이 날 쫓아내려고 작심을 했나 봐"
"왜?"
"이젠 사무실에 들어와 앉을 시간도 없다. 완전 무슨 노가다 잡부된 느낌이다. 이제 학교 학생들도 숙덕거리면서 놀려댄다. 수학선생이 졸지에 공무(工務) 됐다고..."
"진짜가?"
"나 그만둘까 봐"
"그러지 말고 좀만 참고 버티봐라"
"씨X! 세상 정말 X 같네"
"마! 그걸 이제 알았냐? 다들 그냥 그렇게 산다. 니가 좀 늦게 안 것뿐이다. 자! 한 잔 하고 잊어 버려라!"
소주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려고 발명한 술이 분명할 것이다. 경기가 나빠지고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소주는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밥은 못 먹어도 견딜 수 있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간다.
배고픔이 사라졌지만 공허함을 더해 간다. 삶의 괴로움과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가장 저렴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소주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가 분명하다. 통치자는 술로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잠재우는 동시에 세금을 걷어드려 나라를 운영한다. 기업가는 노동자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술(소비)로 바꾸어 돈을 번다. 국가와 기업은 그렇게 상생하며 국민을 이용한다. 연탄불 위에 노릇하다 못해 거뭇하게 타들어가는 막창을 집어 입 속으로 집어넣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막창은 차가운 소주와 같이 들이부어 달래주며 삼켜야 한다.
"희택아, 넌 연애는 안 하냐? 귀덕이도 장가갔는데 니도 가야지 이제"
"결혼은 무슨 얼어 죽을... 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일은 일이고 연애는 연애지"
"난 너처럼 멀티태스킹이 잘 안 되네, 참! 넌 미숙이랑은 어째 돼가노?"
"하아~"
"와? 먼 일 있나?"
“그게…”
춘곤은 미숙이 얘기에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소주잔을 들이켠다. 얼마 전에 그녀와의 술자리에서 그녀의 임신 사실을 들었다고 한다. 춘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미숙이는 대수롭지 않은 태연한 표정으로 같이 병원 좀 가자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춘곤은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내심 그녀의 반응에 안심했다고 한다.
미숙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냥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춘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몸도 매일 술과 담배에 절어 아기를 낳을 몸이 아니란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산부인과를 찾았고 주변에 흥분과 기쁨의 표정을 한 부부들과는 달리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들의 차례를 기다렸고 작은 생명은 조용히 사라졌다. 춘곤은 수술을 마친 그녀를 부축해 뒤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는 배를 끌어안고 신음하는 그녀를 위해 미역국을 끓여주었다고 한다. 춘곤은 그때 처음으로 생일날이나 먹는 미역국을 앞에 두고 이렇게 슬플 수도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는 힘겹게 미역국을 떠먹는 미숙을 보다 울음이 터졌다.
“미안해~ 정말 미숙아”
“괜찮아, 그만 울어”
미숙은 눈물을 글썽이는 그를 보며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근데… 춘곤아~”
“응…?! 흐흐”
“하아~ 인간적으로 이 미역국 너무 짜지 않니? 하하 아.. 야~”
“하하하”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울면서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사랑에서 연민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사실 나도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있긴 한데..."
"진짜? 누군데?"
"교회 누나"
"오~ 정말? 연상? 요즘은 연상연하가 대센가 봐 큭큭! 잘해봐라!"
"근데 임자 있다 하하"
"뭐 결혼했어?"
"아니 아직, 남자 친구도 같은 교회에 있어, 뭐 나하고도 친하고"
"야~ 난 애엄마도 만나는데, 한번 들이대 봐라!"
"됐어! 둘 다 좋은 분이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이야"
"음... 쨔쉭! 닌 꼭 골라도 어째 그런 여자를 고르냐? 휴~ 여복은 지질히 도 없어요 하여튼"
‘가질 수 없는 너’ 당시 노래방에 가면 항상 부르던 노래였다. 인생을 오래 살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해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여자는 절대로 내 맘대로 고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면 나를 싫어하거나 아니면 이미 누군가의 여자였다. 그것도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이었다.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처럼 내가 집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항상 가질 수 없는 사랑만을 쫓아가는 듯했다.
사랑은 운명처럼 나타나는 것 같지만 그 운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그 장애물은 이성(理性)의 통제와 현실의 제약이다. 그것들을 거스르며 운명을 이루려는 것은 때론 현실사회에서 죄악으로 변질될 수 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이루려는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고통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사랑은 쉽지 않다. 그걸 반영이라도 하듯 당시 판타지 멜로드라마가 대한민국을 안방을 휩쓸고 있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판타지 속으로 빠져든다.
"히태~ 가~ 나 죽겠다 우~우우 욱... 으읍"
"아놔! 나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여기선 안돼 좀만 참아!'
결국 춘곤은 필름이 끊겨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녀석을 부축해서 어둑한 원룸 골목길을 힘겹게 걷고 있다. 녀석은 속이 불편한지 헛구역질을 해댄다. 대학교 근처 원룸 골목길에는 꽐라 된 대학생들이 곳곳에 구토를 많이 해서 경찰이나 동사무소에 민원이 많아 최근에 골목 곳곳에 CCTV가 설치되었다. 찌짐을 쏟아낼 만한 전봇대에는 어김없이 경고 문구와 함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경고장이 붙어있다. 필름 끊긴 인간에게 그 문구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일단 저지르고 본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밀려오는 숙취는 어쩔 수 없겠지만 날아드는 벌금 딱지는 막아야 한다.
"나 패스포트(Passport) 돌려줘!"
“뭘 패스해? 썅년아! 야! 이년 이거 뭐래는 거냐?”
“네… 행님 여… 여권을 말하는 거 같습니다”
“야 이 중국년이 웬 영어로 지랄이야,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쳐 배워야 꺼 아냐!”
“어서 돌려줘~~~!”
"야! 이 썅년아!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차 줘자나!"
"야! 저 차는 이자밖에 안돼! 원금이 남았잖아 아직, 너 도망갈 생각하고 있지? 어!, 도망가려다 걸리면 장기 다 털리는 수가 있다. 알겠냐? 글고 이 썅년이 말끝마다 반말이네, 야! 존댓말은 안 배웠냐"
"에? 撒谎! 太不像话了!”(거짓말 마! 말도 안 돼!)
"이년! 뭐라 씨불 거리는 거야? 너 욕했지? 어?!"
"他妈的! 滚!别再过来我这儿!” (씨발! 꺼져! 다신 찾아오지 마!)
멀리 어둑한 놀이터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띠아오챤이 분명하다. 그녀는 떡대만 한 사내 두 명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녀는 사내가 들고 있는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여권을 뺏으려 달려들지만 소용이 없어 보인다. 다른 한 놈은 그녀의 핸드백을 뒤지고 있다. 그들 뒤에는 빨간색 포르셰 박스터(Boxster) 컨버터블 카가 시동이 켜진 채 정차되어 있다. 상황이 심각해 보인다. 그녀를 도와줘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인지했지만 꽐라 된 친구를 엎고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얻어맞고 꽐라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순간의 치밀어 오르는 감정으로 결과가 뻔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일단 춘곤 녀석을 전봇대에 옆에 기대 앉히고 전화기를 들었다.
"저기 112죠? 여기 영대 앞 XX놀이터인데요 괴한들이 한 여성을 성추행하려는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5분여쯤 지났을까 골목 멀리서 사이렌 소리 울리며 점점 가까워진다.
"아! X발! 어떤 새끼야!"
"야 어서 가자! 야~ 너 이 짱개년! 도망칠 생각 마라. 진짜 죽는다!"
사이렌 소리를 들은 한 사내는 주위 원룸 건물을 두리번 소리친다. 그리고 서둘러 정차해 놓은 차로 돌아가더니 굉음을 내며 사라진다. 그녀는 사내가 바닥에 내팽개친 핸드백에서 쏟아진 물건들을 서둘러 주워 담고는 자신도 다른 골목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뒤를 돌아보니 춘곤이 이미 전봇대에 피자 반죽을 한가득 쏟아내고 땅바닥에 드러누워있다.
"아놔! 이 자쉭!"
"우~~~ 우우 욱! 아~ 희택아~ 나 주글꺼 같아!"
"아~ 그냥 죽어라 죽어!"
나는 녀석을 부축해 나의 원룸으로 데려가 눕히고는 물을 담은 양동이와 빗자루를 들고 동이 트는 새벽 골목길의 찌짐 반죽들을 청소한다. 청소를 다 끝내고 CCTV 향해 이빨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브이 마크를 내보인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지?'
"大叔!你怎么知道这个餐厅啊?这里不太适合你吧? 哈哈哈”(아저씨, 이런 레스토랑은 어떻게 알았데요? 여기 아저씨랑 넘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하하하)
"你也叫我大叔? 别叫我大叔好不好!”(너도 아저씨냐? 아저씨라고 좀 안 부르면 안 되겠니?)
“哈哈哈 那我叫你什么好呢?(하하하 그럼 뭐라 불러요?)
“嗯。。。 哥哥?”(음… 오빠?)
“哎呀! 这太肉麻了呀”(아이야! 너무 낯간지러워요)
“那就叫我大哥吧!”(그럼 형님이라고 불러!)
“嗯 好吧!(음 알았어요)
“这里呢,我偶尔跟同事过来吃饭”(여긴 가끔 회사 동료들이랑 와)
“哦!你今天怎么突然请我吃饭呀?”(오! 근데 오늘 갑자기 저한테 밥을 산다는 거예요?)
띠아오챤은 오늘도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교회 예배가 마치고 쑨샹을 따로 불러내었다.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 혹시 쑨샹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쑨샹은 밥 사준다는 말에 띠아오챤과는 달리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나선다. 그녀가 파스타를 좋아한다는 말에 저녁시간 친한 직장동료들과 가끔 오는 '컨테이너' 퓨전 파스타 집을 찾았다. 대학교 안에 위치한 레스토랑 안에는 주말인데도 학생들과 외부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2010년 영화 [아저씨]가 대박을 치면서 중국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때 이 영화 속 어린 여주인공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따수(大叔, 아저씨)라는 중국식 명칭이 유행을 불러일으켰고 어린 여자들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성을 부르는 호칭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였다.
"今天貂蝉又没来,她又有什么事吗?” (오늘도 띠아오챤이 안 왔네, 걔 또 무슨 일 있니?)
”不知道,看来他最近晚上打工,她是真的太不可思议了” (몰라요, 요즘 저녁에 알바하는 거 같던데, 걔 정말 불가사의예요)
“不可思议?”(불가사의?)
쑨샹도 그녀가 밤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불가사의라는 말이 뭔가 맘에 걸려 다시 물어본 그 말의 의미는 띠아오챤은 여태껏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쑨샹도 그녀와 같은 과 친구이긴 하지만 그녀와 적잖은 거리감을 느낀다고 한다. 띠아오챤을 처음 학교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고급 외제차에 몸에는 대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온갖 명품 옷과 액세서리들로 꾸미고 다녔다는 것이다.
"怎么会?” (어떻게 그럴 수가?)
“听说他爸爸是武汉市党委书记” (듣기로 아빠가 우한시 당서기라고 해요)
“真的吗?” (정말?)
쑨샹의 말을 듣고 나니 사건의 조각들이 조금씩 이어 붙여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쑨샹은 처음 띠아오챤의 학생답지 않은 그런 사치스러움에 거리감을 두고 지냈다고 한다. 띠아오챤 주변에는 수많은 중국 유학생 친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지만 그녀도 그들이 그녀의 배경과 돈 때문에 몰려드는 날파리들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달려드는 날파리들과는 수업시간에 홀로 떨어져 있던 쑨샹에게 접근한 건 그녀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띠아오챤은 수업시간마다 매일 날파리들을 피해 쑨샹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처음에 거북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수업시간마다 마주하는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졌다고 한다.
"那你带她来教堂的?”(그럼 네가 띠아오챤을 교회에 데려온 거야?)
“可以这么说吧”(그렇다고 볼 수 있죠)
띠아오챤은 보통 부유한 집안의 중국 유학생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런데 학교에서만큼은 쑨샹과 짝을 이루며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주말에 쑨샹을 따라 교회를 나오게 되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던 그녀도 교회 식구들의 한결같은 모습에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었다고 한다. 특히 안 에스더 목녀의 엄마 같은 보살핌 때문인지 그녀를 곧잘 따랐다고 한다. 쑨샹은 학교에서 다른 중국 유학생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진 못했다. 띠아오챤이 가진 배경은 그 누구도 무시 못할 정도의 파워를 가진 모양이었다.
"可最近不知发生什么事,她跟以前不一样” (그런데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쑨샹은 최근 그녀에게서 뭔지 알 수 없는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원래 대구 수성구의 고급 오피스텔에 살던 그녀는 얼마 전 학교 근처 원룸으로 이사를 왔다. 그 이후로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냥 별일 없다는 말만 할 뿐 쑨샹에게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原来如此…” (그랬구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말 못 할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 비밀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며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상처일 수도 있다. 상처는 스스로 아물 수 있을 때까진 덮어주어야 한다. 언젠가 스스로 그 상처를 드러낼 수 있을 용기를 가질 때까지...
그 용기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