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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13. 2024

매실청을 담그며

탄산수를 즐겨 마시는 둘째에게 탄산수 대신 마시라고 매실 원액을 주문해서 보내줬더니 입에 잘 맞는 모양이다. 둘째가 올해는 매실청을 담그자고 했다.


지난 일요일, 늦기 전에 매실청을 담궈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 자주 다니던 마트에 전화를 먼저 해봤다. 점심시간쯤이었는데 그날 들어온 매실이 다 나갔다고 했다. 다른 마트에 또 전화를 해보니 몇 박스 남아있다고 했다. 부리나케 운전해서 갔더니 그 사이에 다 팔리고 한 박스만 남아있었다. 꼭지를 떼고(꼭지를 떼지 않으면 쓴맛이 난다고 함) 씻어서 말린 후 매실에 칼집을 살짝 낸 후 유리병에 매실과 설탕을 1:1로 채워 넣으면 끝. 이렇게 간단한데도 네 가족이 흩어져 살다 보니 매실청 담그기를 안 한지가 10년이 넘었다. 오랜만에 남편과 둘이 매실청 담그기를 하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집에서 배운 매실청 담그기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우리 집 아이들은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다녔다. 임대아파트에 전세로 살다가 처음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집 주변에 있는 어린이집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어린이집이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그 어린이집을 발견했을 때 '바로 여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살던 아파트에서 차로 10분 좀 넘게 걸리는 곳에 있는 그 어린이집은 가운데에 좁은 마루가 있고 양옆으로 작은 방이 세 개,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집 앞 뒤로는 밭이 있고 마당 입구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감나무 아래에는 개집이 있는 오래된 외딴 시골집이었다.아이들이 마음껏 소리 지르며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놀 수 있는 장소였다.  


부모들이 출자금을 내서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었다. 아이들은 매일 나들이를 가고 먹고 낮잠 자고 놀았다. 겨울이 다가오면 부모들이 모여서 김장을 함께하고 마루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비닐 창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부모들이 돌아가며 청소를 한다거나 분과에 소속되어 정기적인 회의를 한다거나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일들을 부모들이 결정하고 처리하는 것들이 신선하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회의하다가 놀다 지쳐 잠든 아이들을 업고 집으로 온 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니 젊으니 그렇게 했지 지금은 체력이 안 받쳐줘서 아무리 좋아도 못할 것이다. 잦은 모임과 행사에 투덜대면서 참여한 적이 많았던 남편도 대학원 공부와 직장일로 지쳐있던 때였는데 그때 바쁘고 힘들었지만 다른 부모들과 어울려 활동하면서 자신도 많이 회복되고 좋았다는 말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졸업한 우리 집 아이들은 전교생 100명도 안 되는 시골학교에 다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방과후교실로 갔다. 이 방과후교실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모여서 돌봄과 놀이와 다양한 체험을 위주로 하는 공동육아어린이집과 닮은 형태였다. 어린이집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방과후교실도 시골집을 빌려서 운영을 했다. 회의도 많고 모임도 많았다. 방학 때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을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만들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이 먼 곳에 갈 때는 부모들이 동행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프로그램 구성도 부모들과 교사가 함께 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추억거리와 환경을 제공해 줬다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는데 서울 출신인 남편과 많이 닮은 우리 집 두 딸은 그때의 기억이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3박 4일로 도보여행(중간에 자전거 타기도 하면서)을 다녀온 큰 딸은 그때 이야기가 나올 때면 아직도 화를 내면서 말할 정도다. 가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보내서 억지로 갔다고. 그다음 해에는 첫째와 둘째 모두 4박 5일 동안 도보여행(자전거 안 타고 순전히 걸어서)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덥고 짜증 나고 힘들고 끈적거리던 기억을 함께 갖고 있는 둘은 할 말이 아주 많다. 나는 그때 여행에서 돌아온 아이들의 발을 씻어줬던 세족식의 순간과 밤에 방과후교실 마당에서 빔프로젝트 영상으로 여행의 기록을 봤던 순간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아이들은 아닌가 보다.


발령 난 나를 따라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7년 정도를 그런 환경에서 보냈다. 문화센터에서 하는 주말 강좌나 방과후교실에서 하는 체험활동 외에는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학원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9시만 되면 숙제도 덜했는데 자라고 소리 지르는 엄마 믿고 있다가 공부도 못하는 바보 되는 거 아닌지 둘이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나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집밥이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사람들은 집밥이 그립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나의 음식솜씨를 디스하는 우리 집 애들은 공동육아어린이집과 방과후교실에 다닐 때 먹은 음식에 대해 가끔 이야기한다. 부모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하다 보면 몆십 인분의 음식도 뚝딱 만들어내는 솜씨 좋은 분들이 많았다. 어린이집 조리사님과 다른 집 엄마와 아빠가 만들어 준 음식에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요리 똥손으로 아이들을 키운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매실청을 먹으려면 100일을 기다려야 한다. 날짜를 세보니 100일 후면 딱 추석이다. 추석에 함께 매실차를 마시며 우린 또 어린이집과 방과후교실 다닐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덥고 끈적거리고 불쾌했던 아이들의 추억에서도 이제는 새콤 달콤한 맛이 우러날까? 아마도 기다림의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하겠지.




매실을 사서 꼭지 떼고 씻어서 말려서


칼집내고 병에 설탕과 함께 담으면 끝




큰애 초등학교 4학년때 자전거 여행 / 세족식 후 마당에서 영상 감상


작은애 초등학교 4학년때 도보여행  환영식 / 큰애 초등학교 5학년때 도보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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