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주문한 차가 속초에 도착했다고 직접 가지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럼 제가 끌고 간 차는 어떻게 하지요?"라는 황당한 질문을 영업사원에게 했었다. 버스 타고 갈 생각을 못했었다. 지난주 수요일, 9시 30분 버스로 속초에 가기 위해 인제 시외버스 터미널에 9시 20분쯤에 갔다.
매표소 투명유리 하단 반달모양의 구멍을 정산중이라는 빨간색 글자가 막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찾으며 두리번거리는데 뒤에 따라오던 여자분이 "25분쯤 되면 올 거야"라고 나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매표소 직원을 기다리는 사이에 시외버스 터미널을 구경했다. 몇 번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늘 사람이 많지 않아서 버스 시간 임박해서 갔었기 때문에 터미널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매표소 구멍 왼쪽에 이런 안내가 붙어있다.
버스티켓 예매는
시외버스 티머니GO앱
에서만 가능합니다.
예매할 때 결제했던
카드를 넣어주세요 !!
감사합니다 ^^
정확한 안내가 아니다. 서울이나 원주 갈 때는 버스표 예매가 됐었는데 속초 가는 버스를 예매하려고 티머니GO앱에 들어갔을 때는 "조회되는 배차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었다. 티머니GO앱에서 인제 출발 시외버스가 예매가 되는 곳도 있고 예매가 안 되는 곳도 있다. 도착지에 따라서 다르다.
터미널 천정 가까이에 붙은 큰 안내판에 버스 시간표와 요금표가 있는데도 같은 내용을 A4용지로 출력해서 사람 눈높이에 붙여놓은 시간표가 있고 그 옆에 까만색 포스터 하나가 붙어있다.
111을 기억할 때
국가안보의 빈틈은 사라집니다
빈틈을 노리는 국가안보의 위협들,
111로 지켜주세요
111
국가를 지키는 번호
간첩, 국제범죄, 테러, 산업스파이, 사이버안보위협 신고전화 111
내가 알고 있는 간첩신고는 113인데(범죄신고는 112) 국정원에도 간첩신고를 할 수 있군. 간첩신고 포스터 옆에 또 이런 것도 붙어있다.
안내방송
승객여러분께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곳 인제터미널은 버스 종착지가
아니고 경유지입니다
하여 승차하거나 하차하는 승객이
안계시면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출발합니다
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본인이
탑승할 버스를 신경 써서 빨리
발견하시고 기사님께 확인후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승차권은 좌석표가 아니므로
아무날 아무시에 선착순 승차 하시면 됩니다.
본인이 탑승할 버스를 신경 써서 빨리 발견하시고 기사님께 확인 후 '알아서' 탑승하라는 거다. 자기가 탈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2024년이지만 이곳은 인제니까. 인제의 어떤 곳은 3,40년 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도 있으니까.
터미널 의자에 뒷모습만 봐도 지긋한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한 남자 두 분이 바깥을 보며 앉아 있고 엉덩이까지 덮이는 하얀 패딩을 입은 여자 한 분이 롯데리아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아까 25분쯤 매표소 직원이 올 거라고 말했던 분이다. 한 여자분이 매표소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9시 25분이었다. 속초행 버스표를 끊었다. 7,900원.
버스표를 받고 바로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기사님께서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출발하면 안 되니까. 터미널 바깥 버스 기다리는 곳에서 터미널 유리벽에 붙은 인제마을버스 시간표 사진을 찍었다. 인제 떠나기 전에 저 15인승 마을버스를 한번 더 타보고 싶은데 시간이 날까.
작년에 큰맘 먹고 마을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원통에서 출발해서 인제 시외버스 터미널에 들른 마을버스를 타고 하추리 카페에서 내려서 차도 마시고 동네도 둘러보며 놀다가 다음 마을버스 시간까지 기다려서 필례약수로 한계령으로 돌아서 원통까지 가는 버스를 탔었다. 남편과 둘이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인제의 겨울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는데 버스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얼마나 덜컹거렸는지 멀미가 날 지경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옆에 작은 포스터 하나가 붙어있다. 인제 오리지널스 히든 스팟이라고 적혀있고 날짜는 11월 2일이라고 되어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2019년 봄에 고성에서 난 산불이 속초까지 번졌을 때 인제에도 산불이 크게 났었는데 그 산이 회복되는 모습을 둘러보는 걷기 행사였다. 보자마자 큐알코드를 찍어서 참여 신청을 했다. 의미 있는 걷기 행사인데 너무 구석진 곳(일부러 사람들 눈에 안 띄는 히든 스팟에 붙이려 했던 건 아닐 텐데)에 포스터를 붙여놨다는 느낌이었다.
인제 오리지널스 히든 스팟. 그렇지 인제에는 오리지널스 히든 스팟이 있지. 세월이야 흐르건 말건 나는 예전 모습 그대로 있겠다는 뚝심을 가진,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런대로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곳. 지금의 이 인제 시외버스 터미널이야 말로 인제 오리지널스 히든 스팟이 아닐까. 인제 오리지널스 히든 스팟이 인제 시외버스 터미널 말고도 하나 더 있는데 그곳은 바로 인제 하나로마트 앞에 있는 고려병원이다.
고려병원에 들어서면 입구에서부터 시계가 몇십 년은 뒤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납창구와 수납창구 앞 환자대기석도 옛날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환자 대기석에 앉아 있으면 진료실 안에서 의사 선생님이 마이크로 환자 이름을 불러서 처음 가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병원이다. 재작년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엑스레이 찍으러 고려병원에 갔을 때 병원 안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뒀어야 했는데. 인제 떠나기 전에 언제 고려병원에 갈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원통, 속초'라 적힌 버스가 9시 35분쯤에 터미널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버스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버스문이 열리자마자 '본인이 탑승할 버스를 신경 써서 빨리 발견하시고 기사님께 확인 후 탑승'하기 위해 기사님께 물었다. "기사님 이거 8시 반 속초 가는 버스 맞나요?" 했더니 "아닙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9시 반 표를 끊어놓고 뜬금없이 8시 반이라니. 인제 오리지널스 히든 스팟 구경에 정신을 너무 많이 팔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