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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Nov 15. 2024

15년 된 sm3를 떠나보내며

인제에서 중고차 거래하면 생기는 일


너와 그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는데.


헤이딜러에 네 번호를 올렸을 때 긴 생머리 젊은 여자 얼굴 아이콘을 보면서 나는 많이 놀랐어. 몇년도에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터 최근 정기검사 이력까지 너에 대해 줄줄 꿰며 대화를 끌어가더라고. 네 사진을 찍어서 올려 달라고 하더군. 네 사진을 보고 딜러들이 너의 금액을 매겼지. 89만 원, 50만 원, 45만 원, 45만 원. 15년 동안 사고 한번 없었고 큰 말썽이 없었기에 앞 타이어 두 개를 교체한다면 앞으로 몇년은 더 거뜬히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에게는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들이었어. 그래서 저 금액이라면 먼 곳(부천, 대구, 서울)에서 차 가지러 오는 비용이라도 아끼게(내 돈은 아니지만) 차라리 인제에서 거래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제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중 한 곳에 전화를 했더니 차종, 연식, 주행거리를 묻더라고. sm3, 2010년, 17만 km라고 알려줬지. 가격을 알아보고 다시 전화 주겠다고 하더군. 잠시 후 전화가 와서 요즘 이런 모델을 찾는 사람이 없다고 폐차를 권하더라고. 버튼식 시동이 아니라 열쇠를 꽂아서 시동 거는 차를 찾는 사람이 없다나. 폐차라니. 폐차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이리저리 지인들에게 알아보니 폐차를 해도 고철값으로 50만 원은 받을 거라고 하더군. 같은 50만 원이래도 폐차하는 곳에 너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헤이딜러의 딜러들 중 한 명에게 너를 넘겨야겠다고 생각했어.


제일 높은 금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판매요청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어. 딜러들의 이름밑에 별점이 매겨져 있더라고. 89만 원을 부른 사람은 7.8점, 50만 원을 부른 사람은 9.5점이었어. 점수 옆에는 후기 글이 있더라고. 딜러가 부른 금액과 실제 판매된 금액이 나와있고 그 아래에 거래를 한 사람들의 글이 있었어. 89만 원을 부른 사람은 일단 높은 금액을 제시하고 나서 차를 실제로 본 다음에 많이 깎는 식으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았어. 그런 사람에게 나 같은 사람은 아주 쉬운 먹잇감이지. 가격을 흥정하며 스트레스 받고 싶지도 않았어. 그래서 대구에서 50만 원을 제시한 사람에게  너를 넘기기로 했지.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더라고. 판매요청을 누른 몇 분 후에 전화가 와서 차를 그날 오후에 가지러 오겠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자동차매도용 인감증명서가 필요하다고 준비해 달라고 했어. 차를 픽업할 분한테서도 바로 연락이 왔어. 3시에서 5시 사이에 올 거라고. 그래서 점심시간에 읍사무소로 걸어가서 인감증명서를 떼고 관사 주차장으로 가서 너를 학교 주차장으로 데리고 왔지. 픽업하는 분이 다시 연락이 와서 5시에서 6시 사이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5시에서 6시 사이에 학교 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면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았어. 기다리다 못해 내가 어디까지 오셨냐고 전화를 했더니 판교를 지나는데 차가 너무 막힌다는 거야. 왜 굳이 판교까지 갔다 오는지 의아했어. 서울 쪽에 볼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지. 7시쯤 도착할 것 같다는 거야.


저녁을 먹고 학교 주차장에서 7시까지 기다렸어. 그 시간 까지도 그분은 오지 않았어. 혼자 그렇게 계속 학교 주차장에서 기다릴 수 없었어. 그분께 전화를 했더니 아직 도착 전인데 차 열쇠를 어디다 놓고 그 위치를 말해주면 자기가 와서 차를 끌고 가겠대. 이미 판매자로부터 돈은 입금된 상태였어.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관사로 다시 너를 데리고 왔지.


8시쯤 그분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어. 지금 기린터미널인데 인제로 오는 버스가 끊겨서 갈 수 없다는 거야. 학교 주소도 보내주고, 관사 주소도 보내줬는데 인제터미널이 아닌 기린터미널(현리터미널)이라니. 어이가 없었어. 나는 당연히 두 사람이 한 차를 타고 와서 너를 데리고 갈거라 생각했던 거야. 더 어이없는 건 그 이후부터였어.


그분 말이 자기가 10만 원을 받고 이 일을 하는데 기린에서 인제까지 택시를 타고 오면 5만 원이라 남는 게 없다며 걸어서 간다면 다음 날 아침에 도착한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더러 너를 데리고 기린까지 와 달라더라고. 기린에서 인제읍까지는 이차선 도로인 데다 내린천을 따라 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서 내가 밤에 그 길을 달려본 적이 없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그러면서도 30여 km를 밤새 걸어오는 그분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럼 저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죠?"라고 물었지. 그분이 자기가 나를 다시 인제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대구로 가겠다는 거야. 순간 뭐에 홀린 듯이 그래도 되긴 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 갑자기 겁이 났어. 길도 위험하고 사람도 위험한데. 이 밤에 여자 혼자서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차를 탄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자동차 딜러에게 문자를 보냈어. 차 가지러 오는 분 때문에 그러는데 통화할 수 있냐고. 답이 없더라고. 그 시간에 우리 학교 체육관에서 일하고 있을 a(나의 배드민턴 선생님)가 떠올랐어. a의 남편이 경찰이니 혹시 체육관에 같이 운동하고 있으면 같이 기린까지 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 a의 남편이 없다면 체육관 문 닫을 시간(9시 30분)까지 기다렸다가 a에게 같이 가 달라고 말해야 하나 생각도 했었어.


운동 중인지 a가 전화를 안 받더라고.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며 옷을 주섬주섬 입었지.  옷을 주섬주섬 입었지. 너를 데리고 기린으로 갈 수 도 있다는 생각으로. 잠시 후 a한테서 전화가 왔어. 전후 사정을 들은 a가 남편은 지금 학교 체육관에 없으며 절대로 가면 안 된다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이 밤에 거기를 가냐고. 차가 끊겼건 택시비가 얼마건 그건 그 사람 사정이라고 단호하게(내가 혹시라도 혼자 갈까봐) 말하더라고.


남편에게 전화하고 우리 가족들만큼이나 너를 많이 이용한 b에게도 전화를 했어. b는 너와 작별인사도 못하고 헤어진다고 아쉬워한 유일한 사람이거든.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지. 남편도 b도 무슨 소리냐고, 절대 가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분에게 전화해서 지금 혼자 있어서,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기린까지 갈 수 없다고 말했지. 일단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더라고. 잠시 후에 그분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어. 지금 택시를 타고 가고 있으니 어디로 가면 되냐고 하더라고. 관사 위치를 알려줬어.


그 사이에 남편한테서 어떻게 됐냐고 전화가 오고 b한테서도 또 전화가 오고. 상황이 딱하다는 생각에 누구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운전해서 기린까지 갈 생각을 한 내가 스스로도 너무 놀라워서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고. 흥분된 마음을 b와 너무 오래 나눴나. 전화를 끊자마자 그분한테서 전화가 오더라고. "사모님 뭔 전화를 그렇게 오래 하세요?" 난 통화 중에 전화가 오면 뚜뚜 소리가 날줄 알고 있었던 거지. 문자를 보니 주차장에서 10분 정도 기다린 것 같더라고.


얼른 옆집에 사는 우리 학교 선생님께 전화를 했어. 차 열쇠 건네줄 때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누구랑 같이 가라는 남편 말에 따라 우리 학교 선생님 한 분께 부탁을 해뒀었거든. 둘이 주차장으로 내려갔더니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어떤 남자분이 화난 표정으로 네 옆에 서있더라고. 인사를 하고 열쇠를 건네줬더니 아무 말도 안 하더군. 같이 내려간 선생님이 "아이고 어디에서 기린으로 가는 차를 타셨어요?"하고 묻는데도 대답을 않더라고. 그분이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 학교 선생님과 나는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너를 보며 서 있었어. 그런데 잠시 후 그분은 너를 몰고 쌩하고 가버리더라고. 인사도 없이.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너를 보는데 마음이 좀 씁쓸했어. 그날이 10월 31일. 너는 그렇게 나에게 잊지 못할 시월의 마지막 밤을 선물하고 떠났지.


다음날 아침 대구의 딜러에게서 '어제 일찍 잠들어서 이제야 문자를 봅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어. 후기  잘 부탁한다는 글과 함께 스타벅스 쿠폰 하나도 보내왔더라고. 헤이딜러가 너의 사진을 내게 보내며 너에게 편지를 써주면 앞으로 너와 함께할 사람에게 잘 전달하겠다는 글을 보내왔더라고. 그 순간 편지를 써볼까 생각하다가 인제의 딜러가 너를 폐차시키라고 말했던 것, 경매를 통해서도 너를 50만 원밖에 받지 못한 것, 밤에 중고차를 넘기러 나갔다가 온갖 범죄의 대상이 되는 나를 상상했던 것이 떠올라 기분이 안 좋아지더라고. 바로 헤이딜러 앱을 폰에서 삭제해 버렸어. 그러다 그제 저녁에 갑자기 너는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헤이딜러 앱을 다시 깔았더니 스타벅스 쿠폰이 그대로 있더라고. 쿠폰을 받았지.


너도 알다시피 인제에는 스타벅스가 없잖아. 올해 12월 31일까지 유효기간인 쿠폰을 큰딸에게 보냈어. 뭐냐고 묻길래 "엄마 차 팔고 받은 거야"라고 말했지.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큰딸이 전화를 했더라고. "엄마, 설마 엄마 차, 스타벅스 쿠폰 한 장 받고 팔은 거야?" 헤이딜러에 차를 올렸더니 폐차시키는 값 밖에 안 주려고 하더라, 인제에서는 돈은 얼마 주겠다는 말도 없이 폐차 진행은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까지만 말하고 그 뒤에 네가 어떻게 떠났는지는 말하지 않았었거든. 어제, 같이 배드민턴을 치는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고 나서 차 마시는 자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떤 선생님이 "아이고 우리 부장님은 스타벅스 쿠폰 한 장에 차 팔고도 남을 사람이야"라고 하더군.


너와 함께 한지 14년 3개월. 그동안 내부 세차를 다섯번도 안해준 나에게 너는 "그동안 저를 아껴주셔서 감사해요"라는 문자를 헤이딜러를 통해 보냈더군. 보름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렇게 답장을 한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너의 무사고 기록이 이어지길 응원할게. 언제 어디서건 건강하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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