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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당근 Jul 02. 2020

블록버스터의 고단함

채소와 최선 편

 극장에서 관람했던 첫 블록버스터는 <우뢰매>. 희극인 심형래 씨 주연의 전형적인 어린이용 슈퍼 히어로 영화였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무래도 소규모 서사보단 대규모 액션에만 편중해서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크고 어두운 상영관에 앉아 하늘을 날고 레이저빔을 쏘아대고 악당들이 픽픽 쓰러지는 장면들에 열심히 눈과 귀를 기울였다. 나는 막 야생에 귀의한 새끼 고라니 같았다.


 권태라곤 자각할 새도 없었다. 영화에 관해서라면, 이십 대 후반까진 줄곧 블록버스터에 매진했다. 어째선지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버스터(buster)’처럼 행동하기 마련이었다. 재해나 테러, 전쟁 등 인간을 위해하는 모든 종류의 ‘블록(block)’으로부터 그들은 ‘막는 사람’이었다. 세계는 그들의 필사적인 최선에 의해서만 평화로울 수 있었다. 뛰고 구르고 넘어지고 다치던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기억한다. 영화적 애호와는 별개로, 내 눈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최선과 싸우려는 사람들 같았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서야 이윽고 평화를 획득한 주인공들의 클리셰적 모습은, 위엄 있는 한편으로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장르 하에서의 최선은 그마마한 고단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소규모 서사에 익숙해진 이제는 더 이상 블록버스터에 목매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고단함에 취약한 인간인지 깨닫게 되어서다. 어쩌다 보니 영화에서 보던 ‘필사적인 최선’과는 조금 동떨어진 인간으로 자라나 버렸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평범과 데면데면하지 않다. 짐 론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일반적인 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할 때에야 비로소 평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역설하자면, 우리는 평범을 보장 받음으로써 위험에 대한 상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이따금 허기진 오후엔 서촌엘 간다. 청와대 바로 옆 동네,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단골 비건 카페에 가기 위함이다. ‘지금 서촌은 비건이 유행’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더 이상 이 동네에서 전문으로 비건 메뉴를 판매하는 가게를 찾는 일이 어렵지는 않다. 내가 가는 그곳은 ‘발효음식 전문’을 표방한 주택개조형 브런치 카페인데, 공간에 오로지 채소의 기분만 오롯할 뿐 육식이라곤 일절 판매하지 않는다. 여름에는 초록이 무성하고 겨울이면 여백의 미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그 장소가 주는 풍요로움에 둘러싸여, 나는 숙련된 몸짓으로 낫또와 버섯으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를 먹는다. 예전에는 맵고 짜고 기름진 자극적인 음식들을 선호했었는데 그러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전엔 미처 몰랐던 채소의 흥행력을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채소는 하늘을 날거나 레이저 빔을 쏘지도, 악당들을 쓰러뜨리지 않는데도 충분한 포만감을 준다. ‘육식의 최선’과 구분되는 ‘채소의 최선’이다. 그것은 육식처럼 조미료를 통한 스케일의 확장을 꾀하지도, 출혈 낭자한 와일드함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고단하려 애쓰는 대신 낮은 자세로 자기 소유의 녹색과 식이섬유와 무기질을 설명할 뿐이다. 우리 심신의 평화를 도모하는 이 친절한 초본식물을 통해, 우리는 지상의 온갖 부대낌과 소화불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듬성듬성한 카페에 앉아, 곡물 빵으로 감싼 낫또와 버섯을 꼭꼭 씹어 삼킨다. 


 블록버스터에 열광하지 않게 된 지 벌써 사오 년 째다. 공교롭게 내가 채소를 먹게 된 시기와도 겹친다. 만약 누군가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과연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채소의 최선’에는 자신이 있는데, ‘육식의 최선’에는 자신이 없다. 블록버스터의 고단한 그들과는 달리, 내 최선에는 채소와 오후와 여가와 휴식 같은 ‘덜 최선’의 부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안 최선’이 아닌 ‘덜 최선’이다. 이를테면 블록버스터 아닌 ‘블록스터(block-ster)’라고 말할 수 있겠다. 블록스터란 최선을 다해 최선과 적정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다. 나와 블록과의 관계성을 인정하고 애써 무리하려 들지 않을 때, 우리는 최선의 가능면적을 줄이는 대신 높은 밀도의 평화를 확보할 수도 있다. 블록버스터로선 결코 누리지 못할 매일의 평화다.


 워라밸이 중요해진 요즘 시대엔 가능한 덜 최선껏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 시절의 <우뢰매>는 더 이상 없다. 지금의 나는 우뢰와 같지도, 매처럼 공중에 드높지도 않다. 다만 채소의 기분으로 내 최선에 푸릇푸릇함과 싱싱함과 계절감을 보태려 노력할 뿐이다. 녹색과 식이섬유와 무기질로만 이루어진 이 느슨한 세계관 속에서 자연과 국가와 도시는 용케 평화롭다. 결코 고단하지 않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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