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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주스 Jun 13. 2024

[미술] 도토리는 다람쥐에게 양보할 때.

Lost in thought 111 - 유이치 히라코

  큰 봇짐을 메고 있는 사람이 도토리 위에 서 있는 그림을 보는 순간, 예전에 내가 도토리 주우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도토리묵을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아는 지인이 직접 산에서 채집한 도토리로 묵을 쒀줬다. 같이 맛있게 먹으며, 등산하기 좋은 산, 자연, 건강, 유기농 음식으로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이어가다 다음에는 함께 도토리 주으러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그 후에 등산 겸 도토리 채취하러 산을 찾았더니 산 입구에 “도토리는 다람쥐에게 양보하세요!”라는 큰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등산하는 내내 현수막 문구가 계속 마음에 걸려, 집에 돌아와서 관련 내용을 검색해 보니 가을에 야생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도토리나 밤들을 사람들이 많이 수집하면서 다람쥐 같은 야행동물의 겨울나기가 힘들어졌다는 기사가 있었다. 종종 멧돼지가 주택가까지 내려오는 이유도 먹이 부족인데, 사람들이 가을에 도토리까지 싹싹 털어오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한다. 내가 그동안 “자연적”이라고 여겨왔던 일들이 실제로는 환경과 동식물 입장이 아니라 지극히 나를 위한 것에 머물렀다는 것에 스스로 참 민망했었다. 동물의 생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 무지하고 사소한 행동의 파급력도 새삼 인식했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그림 속 트리맨의 모습에서 도토리를 찾으러 갔던 내 모습이 비쳤다. 트리맨이 동물 뿔과 나무로 표현한 얼굴은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쓴 가면 같다. 하지만 내가 자연 속에서 하는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는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 숲의 일부로 존재하지 않고, 숲 속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찾고 모으는데 힘쓴다. 숲 속의 고양이와 도토리 채취 경쟁을 하듯 도토리를 발밑에 쌓아두고, 몸집만큼 큰 도토리를 차지했다. 특히 몸집 만 한 큰 도토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작은 도토리 수확이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수박만 한 도토리로 어느새 개량되었고, 다람쥐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인간만의 열매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트리맨이 뒤에 메고 있는 늘어진 가방과 손을 넣은 주머니 속에도 숲에 영향을 미칠 무엇인가가 가득 채워졌을 것 같다. 그것이 숲에 도움을 주는 것일지, 마지막 남은 숲의 생명까지 약탈하는 것일지, 어떤 미래로 펼쳐질지는 정말 우리에게 달린 것 같다.

  기후위기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연을 통제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못 깨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헤쳐나갈 첫걸음은 ‘인간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인간 중심적 자만심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유이치 히라코, Lost in thought 111, 2023,acrylic on canvas,130x160cm. [스페이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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