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파일럿, 캡틴 트랜스 (1)

야르댕 이 미친

by 초덕 오리겐

여자의 존재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여자란 존재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 제1우주군 총사령관 지그문트



001 프롤로그 - 파일럿, 캡틴 트랜스 (1)


"야르댕 이 미친 새ㄲ."


내 입에서 기어코 쌍욕이 터져 나왔다.


2,000년 전 존영교의 창시자 여존영조차 경악하며 남겼다는 그 말을, 나 역시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세상에 떨어진 지 어느덧 백 년. 이제 웬만한 기행에는 면역이 생겼다고 자부했건만, 호호족의 본산이라 불리는 이 고대 사원의 풍경은 내 상식의 한계를 가볍게 비웃고 있었다.


내 눈앞에는 웅장한 호호족의 사원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금박으로 치장된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사원의 정중앙, 가장 신성한 자리에 높이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터질 듯한 가슴 근육, 말벅지 같은 허벅지, 덥수룩하게 깎은 푸르스름한 수염 자국. 거기까진 좋다. 4,000년 전, 우주를 정복했던 대장군 강호호의 기개라 치자. 문제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린 끈 팬티, 그리고 굵직한 가슴 근육을 간신히 동여맨 브래지어. 여기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가발이 씌워져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강호호 대장군께서는 '여자란 가슴과 엉덩이가 크고, 털이 없으며, 머리가 긴 아름다운 존재'라고 정의하셨지.


내 어깨 위에 매달린 기계 고양이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유일한 동료이자, 시스템 감옥 〈절망〉에 갇힌 채 이 고양이 로봇의 눈과 입을 빌려 말하는 해커, 위저드였다.


-그래서 호호족 후예들은 자기들 중 가장 강한 사내에게 저런 옷을 입혀 숭배했지. 저게 그들이 생각한 가장 완벽한 '여자'의 형상이었으니까. 봐봐, 트랜스. 저 석상의 곡선을. 놈들이 4,000년 동안 집착해온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닥쳐. 토할 것 같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미쳤다. 여자를 본 적이 없으니, 강호호가 남긴 몇 줄 안 되는 텍스트만 보고 이런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저 석상이 아니었다. 진짜 공포는 1년 전 어느 유적지에서 보았던 광경이었다.


당시 우리는 여존영이 2,000년 전 모아두었다는 여배우 조각상 하나를 발견했었다. 조각이긴 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본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때, 제국 황제파의 최측근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악마다!"


그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모든 이가 광기에 휩싸여 조각상을 박살 냈다. 한 번도 여자를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매혹'은 곧 '악마의 유혹'이었다. 시선을 빼앗는 부드러움은 그들에게 공포이자 공격이었다.


내가 개인 스토리지에 진짜 여자 아이돌 그룹 〈쥬부(Je Vous)〉의 사진을 숨기고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걸 들키는 순간 나는 변태 성욕자가 아니라, 악마를 숭배하는 이교도로 낙인찍혀 고문당하고 화형당할 테니까.


나는 석상의 발치, 제단으로 다가갔다.


홍까스,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천 년 전 존영교의 교황을 지낸 놈. 녀석의 저널에 따르면, 1,000년 전 그가 이곳 사원에서 퍼레이드를 벌였을 때 사용했던 함선 ‘아크-03’의 액세스 코드를 메모해 둔 곳이 있었다.


[메모: 이번 순례용 기체 코드를 홀로그램 어항 속 금붕어 한 마리에 적어놓음. 나중에 지울 것.]


“지우긴 뭘 지워, 이 게으른 자식아.”


나는 비장한 각오로 제단 옆에 놓인 홀로그램 어항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텅 빈 유리 상자뿐이었다. 홀로그램 장치는 아마도 이미 수백 년 전에 고장 나 있었던 듯 보였고, 다시 켜지지 않았다.


“위저드, 어항이 비었어.”


-그래? 아쉬운 일이군. 그런데 석상을 한 번 살펴봐. 시스템 노이즈가 잡혀.


나는 석상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강호호 대장군이라고 적혀 있는 명패를 뜯어내자, 그곳엔 낡은 홀로그램 단말기가 하나 박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전원을 켜자, 단말기는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홍까스,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도 입을 다문 놈. 그놈은 아주 악질적인 방법으로 보물을 숨겨놓곤 했다. 한국 남자라면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트라우마를 암호로 걸어놓은 것이다.


아마 이 안에는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굳이 생체인증이 아닌 비밀번호를 요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후대에 깨어날지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저널이나 중요 메모를 남겨 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비장한 목소리로 암호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쪽팔림은 나의 몫이었다.


"우리의 결의…!”


석상 베이스 부분에서 푸른 빛이 명멸하며 기계음이 들려왔다.


[음성 인식 중… 신원 미확인. 암호의 다음 구절을 입력하십시오.]


젠장. 홍까스 이 자식은 진짜 변태다. 4천 년 전 대한민국 육군의 정수(精髓)를 이따위 금고의 암호로 쓰다니. 나는 입술을 깨물며 속사포로 내뱉었다.


"하나!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인식 확인. 계속하십시오.]


"하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통일의 역군이 된다! 하나! 우리는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된다!"


사원 외부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비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이 세계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풀 수 없는 고대어의 향연. 마침내 마지막 구절인 "전우애로 굳게 단결한다!"를 외치자, 비키니 대장군의 석상이 쿠구구궁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쿠구구궁.


비키니 대장군의 석상이 갈라지며 1,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작은 홀로그램 단말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그것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데이터 속에서 떠오른 것은 진.짜. 여.자. 아이돌 그룹 〈쥬부〉의 단체 사진.


"찾았다."


백 년 만에 보는 진짜 여자의 미소였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조그만 화면 속의 얼굴들을 들여다보았다. 근육질 석상이나 기괴한 가발이 아닌, 진짜 사람의, 진짜 여자의 미소. 이 삭막한 남탕 우주에서 100년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희망이 거기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져 왔다. 이것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했다.


나는 사진을 개인 스토리지에 업로드하고 단말기를 부쉈다.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나는 이제껏 아무런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사원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게 오산이었다.


사원 정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행성 전체를 대낮처럼 밝히는 수천 개의 서치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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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포스팅할 작품은 아주 오래 전에 현존팔의 사도 라는 이름으로 잠깐 연재를 했었던 SF 소설이다. 시간이 없어서 쓰지 못했던 것을 설정을 보완하여 리메이크 해보기로 했다.


참고로, 이 소설의 세계관은 오래 전에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반드레드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반드레드의 초반부를 보면, 우주가 남자가 사는 행성과 여자가 사는 행성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모르기에 벌어지는 해프닝이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세계관은 우주 한 편 전체가 남자 밖에 없고,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참고로, 주인공 캡틴 트랜스는 냉동인간 상태에서 수천 년 만에 깨어난 인물이고, 이것은 과거 속 인물인 캡틴 트랜스의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제 의식이나 목적 자체가 여자가 없는 남성들만의 사회, 또는 한 성별 밖에 없는 사회의 불완전함과 공허함을 그리는 것에 있다. 세계관 자체가 그런 것이다 보니, 그냥 일상물로 그려도 그 내용이 안 드러날 수가 없고, 심지어 처음 몇 화만으로도 이 소설의 목적이 충족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더이상 진도가 안 나간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