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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피 Aug 04. 2018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딸에 대하여> 김혜진

*본문 중 인용한 부분은 굵은 글씨체로 표기하였습니다.

*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2018)



책을 덮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점심 식사 준비에 한창이던 엄마를 바라봤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켜며, 머릿속으로 조용하게 한 마디를 떠올린다.


     “엄마, 엄마는 나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어?”


     그린의 엄마인 ‘나’처럼 어떤 문제에서건 나와 부딪히게 된다면, 평범하지 않게 살아보겠다 말한다면. 당신의 이름은 엄마이고 나의 이름이 딸이기에,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와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같다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엄마도 똑같이 느끼게 될까. 나의 전화를 피하고 피하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했을 때, 하고 싶은 말들을 간신히 참으며 “그래, 방법을 한번 고민해 보자.”라고 말하게 될까.  


      ‘딸에 대하여’ 생각하는 ‘나’는 세상의 모든 딸들 앞에 처절하게 드러낸다. 스펀지처럼 제 모든 것을 쏙쏙 빨아들이던 딸이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엄마의 뒷모습과, 경제적인 힘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말리고 싶은 애타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결국은 입을 다물게 되는 망설임을, 그리고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음을.


     그러면 우리 딸들은 각자의 엄마에게서 못 본 척했을지 모를 그 순간들을 통해, 마침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에 대하여.






     정말 속이 상해요. 그 애는 왜 평범하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그런 노력조차 안 하는 걸까요.


     특유의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인지 아니면 유례없는 경제 호황기에 맞닥뜨렸던 경제 위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많은 이들의 바람은 남들처럼 먹고사는 것이었다. 인생도, 성격도, 생김새도 크게 모난 데 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말이다. 평범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긍정적이기보단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경우가 많았고, 특별하다는 말보단 유별나다는 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려봐야 좋을 일 하나 없다 생각했고, 예순이 넘은 나이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노동이 자신의 딸에게만큼은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랐다. 동성애자이자 사회 운동을 하는 딸을 견디지 못해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삶이 조용하기만 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 삶의 시끄러운 소리들은 깊은 슬픔과 처절한 고통 속에서만 들려오는 듯해 보이지만, 행복 또한 분명 주변을 시끄럽게 울려대며 다가오는 법이다. ‘나’와 젠, 딸과 레인이 꿈꾼 완벽한 오후가 젠의 죽음으로 인해 끝내 오지 못했듯, 조용하고 아무 일 없이 바라는 대로만 가는 삶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러니 어쩌면 산다는 것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내는 소리를 나름의 음악으로 받아들여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너희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올지.


     마지막까지도 ‘나’와 딸이 완전한 이해와 화해를 이루지 못했음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마지막 순간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이, 그 찰나를 모면하기 위해 마지못해 내뱉는 “이해한다”라는 말이 아니었기에.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런 기적이 오기도 전에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니.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 딸을 포기하는 거니까.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 놓아 버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니.


     이해라는 건 삼각형이 사각형으로, 사각형이 다시 육각형이 되는 것, 그렇게 점차 원을 만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향해 내가 만들어 놓은 허물과 기대를 깎아내 결국 그 안에 남은 작은 원, 그 사람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고서야 이 같은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결국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각진 도형들을 한 면 한 면씩 깎아가는 과정, 누군가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기치 못한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타인의 배경과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럴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 걷더라도 너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겠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울 것이 뻔한 길을 가려는 딸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위로가 아닐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누군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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