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달라고 하지 마, 실컷 먹고 질려버려
퇴사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남편이 내게 물었다.
"선영아, 우리 처음 사귀고 먹었던 자몽에이드가 어디서 먹었던 거지? 그게 제일 맛있었는데."
"글쎄..."
거의 10년이 다 된 일인데,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와 다닌 카페를 내가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도 너무 소름 끼치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을 때, 남편이 내게 말했다.
"아, 생각났어! 그거 선영이, 네가 만들어준 자몽청으로 만든 에이드였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자몽청을 담가달라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자몽 한 박스와 레몬 한 박스를 사서 자몽청과 레몬청을 한 박스 담가줬다. 자몽청이 거의 바닥날 무렵, 자몽 알맹이를 스푼으로 공들여 떠먹는 그를 보며 물었다.
"자몽청 안 질렸어?"
"아니, 더 먹고 싶어."
"자몽청 더 해줘?"
"응. 레몬은 안 해줘도 돼. 자몽에이드만 먹어도 돼."
그래서 자몽을 세 박스를 샀다. 눈을 떠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베이킹 소다로 자몽을 하나하나 벅벅 씻어내고 자몽을 겉껍질부터 속껍질까지 까서 알맹이만 발라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됐을까, 서서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몽 알맹이만 발라내는데 6시간이 걸렸다. 마무리를 할 때쯤엔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손에 쥐기도 힘든 자몽을 30개 가까이 발라내느라 무리한 탓이었다.
유리병을 소독하고, 자몽과 설탕을 채워 넣는데 1시간이 더 걸렸다. 배가 너무 고팠다. 허겁지겁 끼니를 대충 때우고 났는데도 속이 허했다. 뭔가 보상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야식으로 치킨을 먹었다. 그래도 양심상 양념은 먹지 않았다. 자몽청을 담근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내가 야식을 먹은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함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자몽청을 이렇게 잔뜩 담근 건, 반찬 리필을 자꾸 시키는 손님에게 반찬을 산더미처럼 갖다 주는 심정이었다. 더는 달라고 하지 마, 실컷 먹고 질려버려. 남편은, 모를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