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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시간 - 001] 네이버 웹툰 『스틸링』

고딕적 상상력과 근대 의학의 윤리로 빚은 어둠의 기록

by 나무를심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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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은 침묵 속에서 깨어나는 ‘재생’의 물음

먼저 이 작품을 소개하는 가장 적확한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스틸링』을 “죽음이 연기된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조용한 고발”이라 부르고 싶다. 작품은 첫 장면부터 독자를 낯선 냉기에 노출시킨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모호한 숲 속, 죽음으로 봉합되었어야 할 신체가 불완전한 생명력으로 진동하는 광경, 그리고 그 앞에 서서 떨리는 손을 다잡는 젊은 외과의사. 이 세 가지 이미지가 하나의 묶음으로 제시되는 순간, 독자는 이미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저 신체를 ‘치유’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저주’라 부를 것인가. 『스틸링』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스틸링』이 구축하는 미학과 윤리, 서사와 캐릭터, 그리고 매체 형식의 차원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웹툰이라는 장르가 문학·영화·미술의 경계에서 어떤 새로운 호흡을 시도하고 있는지 검토한다. 특히 19세기 근대 의학의 황금기라는 역사적 배경, 고딕 서사의 정념, 의학 스릴러의 긴장, 미스터리의 퍼즐이 서로 어떻게 물리고 맞물리며 독자에게 지적 쾌감과 정서적 압박을 동시에 선사하는지도 주목한다. 더불어 등장인물의 동기와 변화, 관계의 역학, 주제의 심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던져지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인 “인간은 생명이라는 경계를 어디까지 다룰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웹툰 『스틸링』은 정서 작가가 2024년부터 네이버웹툰에 연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고딕 호러 / 의학 스릴러 / 미스터리 장르를 통해 작가 본인의 기존 작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로 실험하듯 다루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19세기 근대 의학이 마취와 외과 수술의 혁신으로 급속히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 젊은 외과의사 헛슨은 외딴 지방의 병원으로 부임한다. 그는 어느 날 숲 속에서 전신 화상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인물을 마주한다. 그 신체는 피부와 장기까지 재생하는 비정상적 능력을 보이며, 헛슨은 이것이 의학사를 뒤흔들 발견일지 모른다고 직감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 병원과 마을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죽음과 실종, 불길한 소문이 번지고, 그 한가운데에는 비밀스러운 여인 노아와 인간인지 의심스러운 정체불명의 남자가 서 있다. 비현실적 상황들을 과학으로 해명하려는 헛슨의 시도는 윤리의 경계와 초자연의 심연을 동시에 건드리며, 이야기는 합리와 신앙, 욕망과 책임의 충돌로 가파르게 기울어진다.


이상이 작품의 비극편에 이르기 전까지의 외곽선이다.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핵심 전개를 드러내기보다, 그 전개가 생산하는 의미망과 미학적 효과를 분석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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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세기의 어둠을 21세기 화면에 새기다

『스틸링』의 첫 번째 특이점은 배경 선택의 과감함이다. 19세기라는 시대는 근대적 합리성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그 그늘에서 자라난 윤리적 공백의 시기이기도 하다. 마취의 도입은 외과 수술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지만, 그 혁명은 적절한 윤리의 담보를 선행하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가능한 실험’의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의사는 과학자이면서 때로는 광인이 될 수 있었다. 『스틸링』은 바로 이 과도기의 공기를 정밀하게 포집한다. 의학의 실험정신과 성과는 경외의 대상이지만, 그 경외가 방심으로 전환되는 순간, 대상은 곧 냉혈한 ‘소재’로 추락할 수 있음을 작품은 끊임없이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걸맞은 내러티브 운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작품은 1인칭 회고의 어법을 채택하는데, 이는 단순한 사건 전달의 방식이 아니라 서사의 근본 구조를 결정짓는 선택이다. 헛슨의 내면 독백은 곧 사건의 기록이며 동시에 고백으로 읽힌다. 독자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증언된 사실’, 즉 주관과 후회의 필터를 통과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셈이다. 이 방식은 금서(禁書)의 발견, 오래된 일기의 낭독하는 것처럼 고딕 소설의 오래된 장치를 웹툰이라는 현대 매체 위에서 재현하는 효과를 낳는다. 독자는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끝으로 빛바랜 종이를 넘기는 감각을 얻게 되고, 장면 사이에 남겨진 공백은 활자시대의 여백처럼 상상력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작화의 차원에서 『스틸링』은 컬러의 과잉이 지배하는 지금의 웹툰 생태계에서 흑백이라는 ‘절제’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미학적 실험이자 서사적 필연으로 읽힌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는 생명과 죽음, 윤리와 욕망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응축한다. 회색의 중간 톤은 단순한 음영이 아니라, 해석의 흔들림이 텅 빈 곳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화면을 채운다. 세밀한 펜선과 해칭톤의 밀도는 촉각적 공포를 유발하며, 독자는 피와 상처의 생생함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색채를 거둔 자리에서 공포는 과잉의 자극이 아니라 결핍의 진동으로 다가온다.


세로 스크롤이라는 웹툰 고유의 형식은 공포의 리듬을 지배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인물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스크롤의 하강 운동과 완벽하게 합치되어 독자로 하여금 ‘함께’ 추락하는 감각을 환기한다. 반대로 정체불명의 존재가 복도 끝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 화면을 가득 채운 단일 컷은 페이지 넘김의 정지점처럼 작동하며 심장박동을 잠시 멈춰 세운다. 이렇듯 형식과 내용의 합치가 이루어질 때, 공포는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스크롤 동작 자체로부터 분비된다.


3. 인물과 동기, 욕망과 윤리의 미세한 균열들

극의 전개 중심에 놓여 있는 주요 인물 헛슨은 근대의 메시아도, 단순한 악인도 아니다. 그는 ‘발견’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환자의 재생 능력 앞에서 그는 두려움보다 먼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는 단지 개인적 성정의 문제로 축소할 수 없다. 그 뒤에 있는 것은 과학의 근대적 모럴, 즉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선이라는 확신이다. 이 확신이 과열되는 순간, 타인의 신체는 목적의 수단으로 환원되고, 윤리는 연구 설계서의 별첨으로 밀려난다. 헛슨은 그러한 확신의 비극적 산물이다.


그의 변화는 미묘하고도 가파르다. 초기에 그는 ‘환자를 살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건이 거듭될수록 그 명분은 ‘발견을 완수하겠다’는 신념으로 변형된다. 환자의 고통은 통계값이 되고, 실험의 단계는 계단처럼 높아진다. 이 지점에서 서사는 한 인물의 타락담을 넘어 근대 합리성의 내적 결함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헛슨을 응시하는 것은 곧 우리 시대의 과학을 응시하는 일이다.


노아는 작품의 가장 어두운 심장을 품고 있다. 그녀는 피해자인 동시에 서사의 주체다. ‘죽음의 저주’가 대물림된 가문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전형적인 고딕의 모티프지만, 작품은 이 모티프를 여성 캐릭터의 전형성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노아는 구조적으로 억압된 전사(前史)를 지닌 인물이지만, 그 억압의 흔적을 능동적인 결단으로 돌파해 나간다. 침묵과 망설임, 그리고 때때로의 냉정함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녀는 헛슨의 거울이자 대척점이다. 헛슨이 과학의 언어로 불가해를 정복하려 한다면, 노아는 불가해를 불가해로 수용하는 윤리적 감각을 말없이 상기시킨다.


노아의 동기는 자의식의 어둡고도 단단한 핵에 뿌리를 둔다. 그녀는 가문을 둘러싼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 하지만, 동시에 그 비극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구조를 떠나기 어렵다. 이 모순이 노아의 표정을 어렵게 만들고, 그녀의 눈빛을 오래 남게 한다. 그녀가 헛슨을 돕는 듯 보이면서도 한 걸음 물러서서 사건의 추이를 관망하는 태도는, 단순한 우유부단이 아니라 생존의 문법에 가까운 것이다. 그녀는 오래된 저주와 싸우기 위해 시간을 벌고, 거리를 유지하고, 침묵을 선택한다.


'중절모를 쓴 남자'라는 인물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공포의 근거가 된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윤리적 규칙에 묶여 있지 않다. 그가 프릭쇼를 운영하며 타인의 고통을 전시했다는 암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잔혹하지만, 실은 그의 잔혹함을 규정하는 것은 그 행위의 디테일이 아니라 관찰자의 시선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타락을 ‘관람’하고, 고통을 ‘감상’한다. 이때 공포는 가해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관찰의 냉랭함에서 발생한다. 그는 악마라 불릴 수도, 아니라고 부정될 수도 있는 여지를 지닌다. 규정 불가능성이야말로 그의 정체이다.


신부는 작품 속에서 종교적 도그마의 대변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윤리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초상을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가 과거 어떤 존재에 의해 타락했다는 설정은, 악이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전염과 반복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그는 헛슨의 폭주를 견제하는 듯 보이지만, 때로는 공포에 굴복할 것 같은 나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균열은 그를 비로소 인간으로 만든다. 『스틸링』의 세계에서 신앙은 만능의 방패가 아니며, 윤리는 선택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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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갈등 속 과학, 신앙, 생존, 그리고 명예

작품의 갈등은 단선적이지 않다. 가장 앞에 놓인 것은 과학과 초자연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내면에는 더 오래된 윤리의 문제가 놓여 있다. 헛슨에게 재생 능력자는 연구 대상이자 명예의 열쇠다. 노아에게 그는 저주의 구조를 드러내는 거울이며, 동시에 그 구조를 이용하려는 자일 수도 있다. 신부에게 그 존재는 신앙의 시험이며, 정체불명의 남자에게는 유희 혹은 감상의 대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해관계의 겹들이 얇은 막처럼 포개질 때, 서사는 도식성을 벗어나 다층적 긴장으로 확장된다.


중심 갈등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째, 윤리 vs. 명예: 헛슨의 내부에서 가장 치열한 갈등은 환자의 존엄과 자신의 업적 사이에서 일어난다.

둘째, 생존 vs. 폭로: 노아의 내부에서는 저주의 사슬을 끊기 위해 침묵을 유지할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드러낼지에 대한 딜레마가 움직인다.

셋째, 신앙 vs. 공허: 신부의 내부에서는 믿음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어떤 언어를 고를지의 문제가 도사린다.

넷째, 의미 vs. 무의미: 중절모를 쓴 정체불명의 남자는 의미화하는 모든 시도를 냉소적으로 무화시킨다. 이러한 갈등의 중첩은 사건의 전개가 느리더라도 장면의 밀도를 유지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다.


5. ‘죽음’과 ‘생명’을 다시 사유하기

『스틸링』은 죽음의 반대가 생명이 아니라, 유예된 죽음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재생 능력은 생명 연장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죽음의 도착을 지연시키는 기술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윤리적 질문으로 나아간다. 죽음이 유예될 때, 인간은 과연 더 인간적인가. 고통의 시간은 연장되고, 관계의 파국은 더욱 오래 지속된다. 죽지 않는 몸은 살아 있는 몸보다 더 쉽게 도구화된다. 몸의 불멸이 곧 존재의 존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진실은, 이 작품의 가장 잔혹한 통찰이다.


과학의 진보는 언제나 윤리의 추격을 요구한다. 하지만 추격은 늘 늦게 도착한다. 『스틸링』은 이 지연의 시간, 즉 과학의 속도와 윤리의 속도 사이의 간극을 공포의 서사로 가시화한다. 헛슨이 설계하는 실험의 표면에는 합리와 객관의 어휘가 붙어 있지만, 그 바닥에는 발표와 명성, 교과서의 한 줄로 남고자 하는 욕망이 흐른다. 이 욕망은 비난의 대상이기 이전에 구조의 대상이다. 근대적 지식사회는 개인에게 ‘발견’의 주체로 살아남을 것을 요구하며, 그 요구는 언제나 타인의 몸을 거래 대상으로 바꾸는 위험을 동반한다.


한편 작품은 신앙을 윤리의 대체물로 제시하지 않는다. 신부는 흔들리고, 침묵하며, 때로는 실패한다. 신앙의 언어가 공포를 사라지게 하지 못할 때, 개인은 다시 자기 결단의 도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때 윤리는 제도나 교리의 이름이 아니라, ‘상대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질문으로 압축된다. 『스틸링』에서 인물들이 반복해서 배웅하는 장면에 주목하면, 문 틈으로 스며나오는 어둠을 등지고 돌아서는 장면이 바로 그 질문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6. 서사의 기술, ‘숨김과 드러냄’의 시학

작품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친절은 무성의가 아니라 전략이다. 정보는 쉽게 주어지지 않고, 독자는 빈칸을 메우며 참여하게 된다. 이는 미스터리 장르의 전통이지만, 『스틸링』의 경우 그 빈칸이 단지 트릭을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빈칸은 주제의 핵심, 곧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한 예의’와 직접 연결된다. 작가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음으로써, 설명하려는 인간의 오만을 비추는 거울을 관객 앞에 놓는다.


컷 구성의 리듬은 이러한 전략을 뒷받침한다. 세밀하게 분절된 표정의 연쇄는 심리의 지층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한 컷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정지 이미지는 해석의 압력을 높인다. 의성어의 절제가 만들어 내는 적막은 공포의 양념이자 골격이다. 독자는 소리를 보지 못하지만, 바로 그 침묵에서 더 큰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조용한 소리는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도리어 크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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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학의 성취, 그리고 감수성의 진입장벽

우선 이 작품의 강점부터 말해보자. 첫째, 장르적 결합의 완성도가 높다. 고딕, 의학 스릴러, 미스터리의 결합은 흔치 않은데, 작품은 어느 요소 하나를 희생시키지 않고 균형을 잡는다. 둘째, 인물의 입체성이 탁월하다. 헛슨은 악역·영웅이라는 이분법을 끊임없이 교란하고, 노아는 피해자·조력자의 틀을 벗어나 서사의 주체로 선다. 셋째, 흑백 작화가 미학이자 메시지다. 색을 걷어낸 화면은 생명과 죽음, 윤리와 욕망의 대립을 추상화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약점은 동시에 작품의 개성으로도 읽힌다. 전개는 느리고, 초반의 정보량은 제한적이다. 빠른 소비와 즉각적 보상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피로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공포와 고어의 수위가 결코 낮지 않아 접근성의 문턱을 높인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작품이 선택한 미학적 전략의 부산물이며, 그 전략은 주제의 무게와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 느림은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고, 정보의 절제는 해석의 책임을 관객에게 되돌린다. 높은 수위의 공포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안락하게’ 다루지 않겠다는 작가의 결연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고딕적 정서, 역사적 배경물, 철학적 공포에 매혹을 느끼는 독자에게 강력히 추천된다. 미스터리의 퍼즐을 천천히 맞추고, 캐릭터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며, 화면의 여백에서 울리는 침묵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독자에게 『스틸링』은 오랫동안 남는 체험이 될 것이다. 반면 즉각적 서스펜스의 폭발, 통속적 카타르시스, 명쾌한 설명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낯설고도 버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작품은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한 번 익숙해지면, 그 불친절 속에서만 가능한 종류의 감동과 사유가 있다.


한국 웹툰 시장은 지난 몇 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의 속도는 때로 장르의 획일성으로 수렴했다. 특정 장르의 과잉, 유사한 작화의 반복, 안전한 문법의 재생산이 ‘성공의 공식’처럼 유통되었다. 『스틸링』은 그 공식 바깥에서 울리는 낯선 종소리다. 대형 플랫폼의 메인 무대에서 흑백의 고딕 호러가 낸 울림은 상징적이다. 비주류라 여겨진 장르가 완성도와 개성을 갖추었을 때, 독자는 기꺼이 반응한다는 사실이 재확인된다.


이 작품은 창작자에게 실험의 근거를 제공한다. 스스로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미학적 결단을 내릴 이유, 주류 문법을 비틀어 자기 목소리를 낼 권리가 여기 있다. 플랫폼에게는 라인업의 다양성이 곧 브랜드의 깊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한 플랫폼이 수많은 취향을 수용할 수 있을 때, 그 플랫폼은 시장이 아니라 문화로 남게 된다. 독자에게는 감상의 주체로서 자신의 취향을 확장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익숙하지 않은 형식과 느리지만 복잡한 이야기 앞에서, 독자는 다시 ‘읽는 법’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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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잘 만든 공포’를 넘어 ‘깊이 있는 예술’로

『스틸링』은 단순히 잘 만든 공포 웹툰이 아니다. 이 작품은 문학적 긴장과 미학적 절제가 공존하는 예술적 성취다. 작품은 고딕 전통의 장치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로 스크롤의 리듬, 컷의 분절과 정지, 여백의 호흡 등 웹툰 형식의 잠재력을 통해 이 전통을 새롭게 번역한다. 그 번역의 결과물은 ‘설명되지 않는 것을 감내하는 태도’,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윤리로 재매개하는 시선’, ‘관찰과 응시의 폭력성에 대한 자각’ 같은 오늘의 질문들로 다시 태어난다.


주인공 헛슨은 우리 시대의 과학이 가진 영광과 결함을 동시에 비춘다. 그의 손은 생명을 살릴 수 있지만, 그 손이 명예를 움켜쥐는 순간 그 손끝은 차갑게 식는다. 노아는 반복되는 비극을 끊어내려는 주체의 고된 실천을 상징한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의미화 충동에 매달린 인간 앞에 던져진 무표정한 타자이며, 신부는 흔들리는 윤리의 의인화다. 이 네 꼭짓점이 이루는 사각형 안에서, 『스틸링』의 세계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깊어져 간다.


웹툰이 대중 오락의 용기(容器)를 넘어서 예술적 사유의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의 증거로서 『스틸링』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붙들고 견디는 체험을 선사한다. 그 체험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읽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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