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동조의 공포와 집단 카르텔
Ⅰ. 사적인 불안이 공적인 언어로 위장하는 이유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과 초조함을 정면으로 인정하는 데 서툴다. 인정하는 순간, 감정은 변명할 수 없는 자기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한다. 대신 공익, 상식, 공동체의 입장, 사회적 기준, 다수의 눈높이, 대중의 피로감, 구성원의 정서, 시대적 감수성 같은 언어와 같이 다른 언어를 끌어와 포장한다. 사적인 불안은 홀로 감당할 때는 부끄럽고 두렵지만, 그것이 집단의 감각처럼 번역되는 순간 갑자기 위엄을 얻는다. 문제는 개인의 불안이 집단으로 전이되어 사회나 대중 혹은 공동체라는 익명성을 얻고,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며, 제재의 근거로까지 증식하는가에 있다.
퇴행중력에 포함되는 ‘사회적 목소리’란 대개 실제로는 사회의 총체적 의사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정서가 스스로를 보편인 것처럼 연기하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누군가의 질투, 누군가의 상처, 누군가의 지위 불안, 누군가의 상대적 박탈감은 본래 개별적이고 우연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집단적 언어로 변환되면 마치 시대 전체의 윤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의 감정은 특정 대상을 통제하기 위한 기준이 되고, 분위기가 되며, 압박이 되고, 심지어 제도적 판단의 전 단계로 작동한다. 사적 심리의 공적 위장, 이것이야말로 퇴행중력이 말하는 설계된 여론의 핵심 기술이다.
개인의 불안이 대중의 요구로 포장되는 과정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고 단계적으로 정교해진다. 그것은 먼저 어떤 개인 혹은 소수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불편함은 사실 대상을 향한 공적 분석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발생한 위협 반응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감정의 근원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취약함을 외부 대상에 귀속시키는 순간 훨씬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무능이 만들어낸 불안을 타인의 과도함 탓으로 돌리고, 자기 정체에서 비롯된 긴장을 상대의 돌출성으로 설명하며, 자기 상처의 진원을 사회적 해악으로 호명한다. 이때 첫 번째 왜곡이 발생하고, 감정의 원인이 잘못된 대상에게 옮겨진다.
그 다음 단계는 명명이다. 막연한 불편함은 이름을 얻는 순간 훨씬 강력해진다. 어떤 대상은 ‘문제적’이 되고, 어떤 태도는 ‘위험한 신호’가 되며, 어떤 성취는 ‘공동체를 해치는 위협’으로 해석된다. 이름은 대상을 규정할 뿐 아니라 감정을 합법화한다. 개인의 불편함은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공동체를 위한 문제의식은 당당하다. 질투는 천박하지만, 비판은 고상하다. 개인적 초조함은 초라하지만, 사회적 우려는 품격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고백하는 대신 그것을 개념으로 바꾼다. 개념은 감정의 죄책감을 줄여주는 가장 유용한 도구다. 이때 사용되는 언어는 대개 추상적이다.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히 말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많은 이들이 각자의 불안을 투사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흐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언어는 강하면서도 불순하다.
세 번째 단계는 확산이다. 누군가가 던진 ‘문제 제기’는 곧바로 타인의 침묵과 눈치를 먹고 자란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모두가 실제로 확신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할 이유도 용기도 없기 때문에 일단 보류된 동의의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이 유예된 동의가 반복되면 분위기가 된다. 그리고 분위기는 사실보다 먼저 작동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그 문제를 문제로 취급하는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질문이 아니라 반응이 우선한다. 분석보다 소속감이 먼저 일어나고, 성찰보다 눈치가 앞선다. 결국 사람들은 내용을 검토한 뒤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하는 쪽에 서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용은 이후 상황에 맞춰 읽는다. 이것이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설계되는 과정이다.
Ⅱ. 여론의 형성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여론이 설계된다는 말은 누군가가 거대한 음모를 꾸민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 그것은 훨씬 더 일상적이고 분산된 방식으로 일어난다. 각자 자신의 불안을 위장하기 위해 유사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간지럽히는 은밀한 언어를 선택하고, 그 언어로 서로의 불안을 부드럽게 공감해 주며, 그 공감의 총합이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어느새 객관적 사실처럼 굳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설계가 언제나 중앙집중적일 필요가 없다. 이 과정에서 거대한 지휘자나 노골적인 음모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각자가 자기 체면을 지키고, 관계의 손해를 피하고,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는 작은 선택을 반복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개인들의 자기보호가 쌓이면, 원래는 사적인 불안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사회 전체의 분위기나 대중의 판단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원했던 결과처럼, 그것은 자라난다.
이 과정의 중심에는 자기기만의 경제학이 있다. 인간은 자신을 악한 존재로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이 교양과 도덕 언어를 획득한 현대인이라 생각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공격성을 직접 인식시키지 않고, 정당한 우려나 공공적 책임감의 형태로 우회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우회가 단지 의식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때로 자기 보호 기재의 차원에서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옳다고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의 시기심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의감이라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열등감을 직면하지 않은 채 사회적 책임만 강조할 수 있다. 바로 이 무의식적 위장이 가장 위험하다. 냉소적인 악인은 때때로 스스로의 악을 안다. 그러나 신념에 사로잡힌 평범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어두움을 공공선으로 착각한 채 훨씬 더 멀리 간다.
이는 방어기제의 사회화로 개인 안에서 작동하던 비겁함은 상대를 향한 공격성으로 투사되고, 자기 무능은 타인의 부당한 특권으로 해석되며, 자기 욕망의 천박함은 사회적 감수성이라는 언어로 반동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집단은 각자의 방어기제를 서로 지지해 준다. 네가 느끼는 불편함을 나도 느낀다고 말해 주는 순간, 상대는 자신의 감정이 단지 개인적 상처가 아니라 보편적 정당성이라고 믿기 쉬워진다. 다시 말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집단일수록 더욱 빠르게 각자의 심리적 허위를 교차 인증하는 기계가 된다. 이 교차 인증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에게 질문하는 대신 서로의 불분명한 확신을 근거로 삼는다.
집단은 자기 내부의 긴장을 외부 대상이나 특정 인물에게 이전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조직이 무기력해질수록, 공동체가 정체될수록, 구성원들이 상호 불신을 느낄수록 오히려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내려는 충동이 강해진다. 복잡한 위기에는 복잡한 책임이 따르지만, 희생양은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단순화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것은 사고 비용을 줄이고, 감정 정리를 돕고, 구성원 사이의 임시적 연대를 만들어 준다. 그리하여 사회적 목소리라는 이름 아래 어떤 대상이 제거될 때, 실제로는 복잡한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할 집단의 부담을 전가시켜 제거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Ⅲ. 인간은 왜 자기 감정을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는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자. 왜 사람은 자기 감정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려 하는가. 이는 단지 위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 감정이 우연적이며 편협하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자신의 미움이 이유 없는 미움일 수 있다는 사실, 자신의 불편함이 단지 열등감의 흔들림일 수 있다는 사실, 자신의 반감이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사소한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자아를 허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사적 감정을 그대로 두기보다 형이상학적 승인을 받고 싶어 한다. 나의 감정이 곧 시대의 감수성이고, 나의 불안이 곧 사회의 경고이며, 나의 적의가 곧 공동체의 자기보호라고 믿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작은 존재가 아니다. 그는 역사와 윤리의 대리인이 된다. 퇴행중력은 바로 이 과장된 자기 위치 지정 위에서 힘을 얻는다.
이처럼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은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하나는 공격 기능이다. 특정 대상을 압박하고, 낙인찍고, 고립시키는 데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은폐 기능이다. 누가 그 공격을 시작했고, 왜 그 공격을 필요로 했는지를 흐리게 만든다. 공격의 발화점은 지워지고, 남는 것은 이미 그럴 듯하게 완성된 분위기뿐이다. 이때 피해자는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그는 구체적인 사람과 싸울 수가 없다. 눈앞의 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개인이 던진 말일 뿐인데도, 그것은 금세 모두의 기류처럼 퍼져버린다. 그래서 반박은 언제나 늦고, 해명은 언제나 궁색해진다. 집단이 설계한 익명성은 개인의 방어를 구조적으로 약화시킨다.
이 설계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대리 발화자’다. 모든 여론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서서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먼저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결코 이해관계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의 번역자, 사회의 통역자, 침묵하는 다수의 대변인처럼 등장한다. “내가 아니라 다수가 불편해한다”,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괜찮을 수 있어도 공적인 차원에서는 곤란하다” 같은 문장은 이 대리 발화의 전형적 문법이다. 여기서 핵심은 발화자의 자기 삭제다. 그는 자기 감정을 숨길수록 더 공적 인물처럼 보인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위험해진다. 자신이 사적인 이유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신을 사회 전체의 입으로 상정하는 사람은 자기 의심을 잃는다.
대리 발화자는 군중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제안한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의 정서적 해석 방식을 미리 배치한다. 어떤 사건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어떤 톤으로 말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용납하고 어디서부터 비난해야 하는지에 관한 감각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이때 대리 발화자는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정서 설계자다. 퇴행중력은 이런 설계자를 통해 움직인다.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 증오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가 제공한 정서적 틀 안에서 증오를 안전하게 소비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설계술이 더욱 강력해진 이유는 매체 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권위 있는 제도나 명시적 규범이 여론 형성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 지금은 미세한 신호와 반복되는 분위기가 훨씬 빠르게 사람들의 판단을 장악한다. 알고리즘은 강한 감정을 선호하고, 사람들은 긴 논증보다 즉각적 인상을 더 빨리 공유한다. 이 환경에서 여론은 깊어지기보다 빨라지고, 판단은 성숙해지기보다 전염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은 훨씬 더 쉽게 생산된다. 몇 번의 반복, 몇 개의 익숙한 표현, 몇 사람의 의미심장한 침묵, 몇 번의 공적 거리 두기만으로도 어떤 대상은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존재처럼 보일 수 있다. 사실관계는 나중 문제다. 인상은 먼저 굳는다. 그리고 굳어진 인상은 종종 사실보다 오래 간다.
Ⅳ. 부분적 사실의 과잉 해석의 작동과 기능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계된 여론이 늘 허위 정보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장 강한 여론은 일부 사실 위에 과잉 해석을 덧씌울 때 생긴다. 작은 결함 하나, 설명이 충분치 않은 장면 하나,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표현 하나, 실제로 다소 오만해 보일 수 있는 태도 하나가 전체 인격과 존재를 평가하는 근거로 확장된다. 이는 해석의 비례감각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군중은 비례를 싫어한다. 비례는 복잡하고 느리며, 감정을 냉각시킨다. 반면 과장과 단순화는 빠르고 선명하며, 즉각적인 도덕적 흥분을 제공한다. 그래서 설계자는 결코 완전한 허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작은 사실을 감정적 폭발의 점화 장치로 쓴다. 이 점에서 설계된 여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 그것은 진실의 일부를 인질로 삼아 전체 왜곡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사람들은 왜 이런 설계에 쉽게 편승하는지 알아보면, 타인의 확신은 나의 판단 부담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 한다. 특히 사회적 긴장이 큰 문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누군가가 이미 해석의 틀을 제공해 주면, 사람들은 그 틀을 빌려 자신의 입장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공적 명분은 개인적 책임을 완화한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거리 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심리적 죄책감이 줄어든다. 나아가 같은 해석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즉각적인 소속감이 생긴다. 공동의 적은 공동의 유대를 가장 신속하게 만들어 낸다. 마지막으로 이미 형성된 분위기에서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비용이 크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설계자가 아니더라도, 설계된 구조 위에 조용히 올라탄다. 여론은 이처럼 확신보다는 비용 회피의 결과로 커진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사람들은 대개 거대한 사악함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각을 중단하고, 질문을 유예하고, 타인이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반복할 뿐이다.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악은 일상화된다. 퇴행중력의 영향권 아래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노골적인 악당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남들이 불편해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불편해하고, 사회적으로 위험하다고들 하니 위험하다고 말하며, 다수가 원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의 축소를 요구한다. 이때 그는 더 이상 자율적 판단의 주체가 아니다. 그는 분위기를 전파하는 통로가 된다. 문제는 통로가 많아질수록 구조는 더욱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점이다. 설계된 것은 늘 자연적인 것처럼 위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의 요구’라는 표현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대중은 언제 요구하는가. 누가 대중의 요구를 측정하며, 누가 그것을 번역하고, 누가 다시 유통하는가. 실제로 많은 경우, 대중은 일관된 의사를 가진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은 서로 다른 욕망, 무관심, 오해, 피로, 편견이 뒤섞인 집합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그 복잡한 집합을 하나의 일관된 구조처럼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복잡한 의견을 편의상 줄여 말하는 수준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감정과 반응을 하나의 뜻처럼 묶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다양한 해석을 ‘대중의 요구’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고정하는 것은 사실상 해석의 주도권을 쥐는 권력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많은 경우 ‘대중의 요구’란 대중이 스스로 분명하게 말한 뜻이라기보다, 누군가가 여러 반응을 하나의 의지처럼 정리해 만들어낸 결과일 때가 많다.
이 발명의 기술이 특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 곳은 도덕의 영역이다.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계산은 비교적 쉽게 이해관계로 읽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경계를 불러일으킨다. 반면 도덕적 분노는 정당한 목소리처럼 받아들여지기 쉽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이유가 돈, 지위, 경쟁심 때문이라고 말하면 곧바로 의심을 받지만, 같은 비판도 그것이 공정, 존중, 안전, 사회적 책임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훨씬 더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얻는다. 퇴행중력은 바로 이 도덕 언어를 즐겨 사용한다. 개인의 불안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경로가 도덕이기 때문이다. 도덕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세련된 폭력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도덕을 내세운 공격은 자신이 타인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먼저 느끼게 만들기 쉬운 이유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진정한 윤리적 숙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덕의 형식만 차용한 정서적 자기보호다. 진정한 윤리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칼날을 들이댄다. 내가 왜 이토록 격앙되는지, 이 분노는 정말 타인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상처와 불안을 가리고 싶은 충동인지, 내가 문제라 부르는 것이 진정으로 해악인지 아니면 내 열등감을 비추는 거울인지 묻는다. 반면 설계된 여론은 그런 질문을 생략한다. 그것은 자기 성찰을 거치지 않은 도덕이다. 늘 타인과 외부를 향해 판단을 쏟아내지만, 정작 그 판단의 기준이 자기 안에서는 한 번도 검토되지 않는다. 그래서 겉으로는 엄격하고 단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취약하다.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동기를 점검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설계자는 대개 자신을 공격자가 아니라 조율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직접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마치 공동체 전체의 입장을 전하는 사람처럼, 많은 이들이 이미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대신 전달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개인적 감정은 없다고 강조한다. 다만 구성원 전체의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화법의 냉혹함은 바로 책임의 분산에 있다. 그는 그저 모두가 느끼는 현실을 전달했을 뿐이고, 조직의 분위기를 설명했을 뿐이며, 더 큰 갈등을 막기 위해 조정에 나섰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가장 교묘한 폭력을 조장한다. 겉으로는 중립적인 조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개인에게 불리한 판단이 굳어지도록 만들면서도 자신은 끝까지 합리적 관리자나 중재자의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의 온도다. 설계된 여론은 소리치지 않을 때 더 강하다. 노골적 적대는 쉽게 저항을 부른다. 그러나 차갑고 점잖은 우려, 중립을 가장한 거리 두기, 객관적 진단처럼 보이는 평가, 모두를 위한 결정처럼 포장된 배제는 훨씬 더 큰 효력을 가진다. 퇴행중력은 뜨거운 증오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한 합리성, 사무적 문장, 품위 있는 우려, 교양 있는 냉소를 통해 훨씬 깊이 스며든다. 현대의 폭력은 야만적 언어로만 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관리의 어휘, 조정의 문법, 신중함의 어조를 두르고 등장한다. 바로 그 때문에 더 늦게 인식되고, 더 쉽게 정당화된다.
이 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악이 반드시 추하고 거칠고 과장된 얼굴로만 나타난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훨씬 더 세련된 악을 놓친다. 차갑고 정돈된 문장, 모두를 위한다는 표정, 공공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때로는 가장 깊은 비겁함의 은신처가 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늘 나는 직접 책임지지 않겠다. 나는 내 사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 나는 다만 사회를 말하겠다. 그렇게 하면 나는 더 높은 위치에 설 수 있고, 동시에 더 안전해질 수 있다는 계산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은 윤리의 언어를 빌려 책임을 피하는 가장 정교한 방법 중 하나다.
Ⅴ.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의 목적
퇴행중력의 관점에서 설계술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기준선을 낮추고, 돌출된 존재를 평균의 지평 아래로 끌어내리며, 다수가 감당하지 못하는 긴장 자체를 제거하는 데 있다. 즉,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은 어디까지나 하향 조정의 장치다. 상승은 언제나 질문을 요구하고, 질문은 불안을 자극하며, 불안은 자기 변화의 비용을 요청한다. 그러나 하강은 쉽다. 더 높은 곳을 오르지 못할 때, 누군가의 오르는 행위를 문제 삼으면 된다. 더 빠른 사람을 따라갈 수 없을 때, 그의 속도를 무책임하다고 말하면 된다. 더 깊이 사유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를 현실 감각 없는 존재로 만들면 된다.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은 바로 이 하강의 논리를 집단적 상식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가면은 동시에 자기 면죄부의 기능을 수행한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타인의 과도함을 비판하는 동안 자신의 무기력을 정상으로 만들 수 있고, 누군가의 성취를 위험하다고 규정하는 동안 자신의 정체를 성숙으로 오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계된 여론은 단지 외부를 통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내부를 위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수에게 이런 안도감을 준다. 문제는 우리 안의 부족함이 아니라 저 바깥의 과잉이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제동이라고.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우리가 멈췄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지나치게 앞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이 거짓 위안이야말로 퇴행중력이 사람들을 붙드는 달콤한 사슬이다.
이 구조를 식별하는 하나의 징후는 발화 주체의 모호성이다. 모두를 말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때, 사회적 목소리라는 표현은 가면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징후는 해석의 비례감각이 사라졌을 때다. 작은 결함 하나가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과도하게 확대되고, 그 결함이 생겨난 맥락은 지워지며, 이후의 수정과 성장 가능성까지 처음부터 닫혀 버릴 때, 그것은 더 나은 판단을 위한 윤리적 검토라기보다 특정 대상을 배제하기 위한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세 번째 징후는 논의의 방향이다. 진실을 더 정확히 이해하려는가, 아니면 대상을 더 쉽게 문제화하려는가. 전자는 구체성으로 향하지만, 후자는 추상성과 분위기로 도망친다. 네 번째 징후는 감정의 온도다. 지나치게 차분한 폭력, 지나치게 점잖은 배제, 지나치게 중립적인 낙인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징후는 결과의 일방성이다. 언제나 기준을 높이는 사람이 문제로 지목되고, 평균에 안주하는 쪽은 해석의 중심에서 빠져 있다면, 그 사회적 목소리는 이미 하강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끝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목소리’라는 말이 정말 사회 전체를 위한 판단인지, 아니면 일부의 불안과 감정을 사회 전체의 뜻처럼 꾸민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건강한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만 반복되는 공간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고, 해석이 부딪치며, 때로는 불편한 진실과 아직 정리되지 않은 논쟁까지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다양한 생각과 정서가 부딪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계속 수정하고 갱신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행중력은 이런 다양성과 긴장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지우고, 일부의 감정을 마치 모두가 동의한 판단인 것처럼 내세운 뒤, 그 이름으로 개인을 압박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목소리’라는 말은 사회를 제대로 대표하는 표현이 아니라, 원래 다양해야 할 사회를 하나의 분위기로 줄여 버리는 말이 된다. 서로 다른 세계와 해석, 판단의 차이는 사라지고, 살아 있어야 할 갈등과 토론은 얕고 편한 합의로 대체된다. 겉으로는 사회 전체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지녀야 할 다양성과 긴장, 그리고 스스로를 갱신하는 힘을 약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특정한 개인의 악의만이 아니다. 더 차갑고 더 치명적인 것은, 개인의 불안을 보편의 언어로 승격시키는 문법 자체다. 이 문법이 작동하는 한, 질투는 언제든 공정의 얼굴을 할 수 있고, 박탈감은 언제든 공동체의 요구가 될 수 있으며, 무능은 언제든 안정의 가치로 재포장될 수 있다. 바로 그때 사회는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기 시작한다. 퇴행중력은 대개 이런 순서로 작동한다. 처음에는 한 개인의 불안이나 열등감처럼 작고 사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감정이 곧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는 식의 익명적 권위를 빌리는 순간, 개인의 불안은 공적인 판단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분위기가 반복되고 굳어지면, 결국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는 기준과 기대의 수준까지 조금씩 낮아지게 된다.
사회적 목소리라는 가면이 더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노골적인 공격보다 훨씬 차갑고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군중의 함성은 순간적으로 거세지만,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반면 사회적 목소리를 위장한 가면은 발화 주체를 흐리게 만들고, 그 판단을 마치 이미 모두가 동의한 상식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쉽게 정당화되고, 더 오래 남는다. 누가 나를 미워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도 모두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데도 이미 어떤 평가와 판단이 내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개인은 쉽게 무너진다. 그는 특정한 사람과 맞설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위기 전체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분위기에는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곧 책임질 주체도, 부끄러움을 느낄 주체도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익명성, 책임을 흐리는 당당함, 그리고 집단적 무책임이 퇴행중력이 만들어내는 가장 깊고 철학적인 공포다.
Ⅵ. '사회적 요구'라는 교묘한 위장술
결국 개인의 불안을 대중의 요구로 포장하는 설계술은 단순한 여론 조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취약함을 보편의 형식으로 감추는 오래된 본능이, 현대적 언어와 집단적 네트워크를 만나 훨씬 정교해진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같은 방향을 향한다. 더 높은 것을 의심하게 만들고, 더 깊은 것을 피곤하게 만들며, 더 멀리 가는 존재를 붙들려 하고, 하향 평균의 안락함을 윤리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때 사회는 겉으로는 자신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으로 나아갈 힘과 가능성을 스스로 약화시킨다. 설계된 여론은 대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불편을 빨리 잠재우는 데 더 큰 관심을 둔다. 그래서 이런 여론은 변화를 열기보다 기존 상태를 붙잡는 쪽으로 흐르기 쉽고, 그 결과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게 만들기도 한다.
퇴행중력 아래에서 ‘사회적 목소리’는 실제 사회의 양심이라기보다, 집단이 자신의 열등감과 불안을 정당한 요구처럼 포장하는 장치로 작동하기 쉽다. 원래는 개인 안에 머물러야 할 상처와 초조함이 보편적 기준처럼 제시되고, 사적인 불안은 어느새 공적인 압박의 언어로 바뀐다. 그 결과 특정한 개인의 생동감과 가능성은 다수의 안락과 평온을 위해 쉽게 희생되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바로 그때 가장 위험한 문장이 등장한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요구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문장은 사회 전체가 내린 판단이 아니다.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불안과 두려움인데, 그것이 여러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의 뜻이나 진실로 오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