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적 동조의 심리학: 혼자는 두렵지만 집단은 당당하다

제3장. 동조의 공포와 집단 카르텔

by 나무를심는사람
퇴행 중력_표지 02.png


제3장. 동조의 공포와 집단 카르텔


1. 악의적 동조의 심리학: 혼자는 두렵지만 집단은 당당하다


Ⅰ. 함께할 때 더 잔혹해지는 인간

인간은 보통 잔혹해서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에 공격한다. 다만 그 불안이 홀로 있을 때는 대개 비겁한 침묵으로 남고, 다수의 집단이 형성되면 개인은 그 안으로 들어가 실체를 감추며 윤리의 언어를 빌린 음험한 확신자가 된다. 개인의 내면에 있던 열등감, 박탈감, 자기 의심, 지위 상실의 공포는 혼자 있을 때는 악의로 완성되지 못한다. 혼자는 자신의 비열함이 그대로 드러날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집단은 그 마지막 망설임 마저 제거한다.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불안은 신념으로 위장되고, 비겁함은 공적 판단처럼 포장되며, 질투는 공동체의 도덕 감각으로 세탁된다.


퇴행 중력은 어떤 개인이 앞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집단 내부의 무능, 정체, 나태, 자기기만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그 대상을 단순한 동료가 아닌 집단 전체의 불편한 원인으로 삼는다. 이때 집단은 진실을 제거할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는데, 눈앞의 돌출된 존재를 문제적 인물로 낙인찍는 일이 가장 쉽고 빠르며 값싸다. 따라서 악의적 동조는 도덕의 문제가 아닌 효율의 문제에 집중된다. 저열한 집단은 언제나 정당한 댓가의 지불보다 값싼 처리 방식을 선택한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질투하는 일은 오래된 인간사의 일부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은, 질투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으로 고백되지 않고 모두의 판단으로 위장될 때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야.” 라는 표현은 대개 진실보다는 책임 회피를 위한 기능적 문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각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는 척하는 가운데, 결국 누구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거짓으로 합의된 동조는 판단을 외주화하는 심리적 타락이다.


악의적 동조의 심리는 비교에서 출발한다. 가까운 타인의 성취는 낯선 천재의 위대함보다 더 큰 위협이다. 너무 멀리 있는 탁월함은 감탄으로 소비할 수 있지만, 같은 조직, 같은 업계, 같은 세대, 같은 학교, 같은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성장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사람은 대단하다”라는 사실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맞닥뜨리게 되면서 곧장 나의 초라함을 측정하는 잣대를 마주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자기 성찰로 이어지기보다, 대개 질문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충동으로 이어진다. 유능한 타인이 주는 위협은 실제로 내 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정체된 삶에 불편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늘 불쾌하다. 성취는 말없이 타인을 심문하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사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변명을 초라하게 만든다. 규칙을 어긴 적이 없어도, 기준을 높여버린 사람은 이미 집단의 평화를 훼손한 자가 된다. 왜냐하면 평범함은 대개 상호 묵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미루고, 적당히 안주하고, 적당히 포기한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은 생각보다 섬세하다. 그 균형은 누군가 두각을 나타내거나 더 앞서 가는 순간 깨진다. 그래서 집단은 성장한 개인을 보며 기뻐하기 보다 안에서부터 흔들리게 된다.


Ⅱ. 분위기는 폭력의 씨앗

이때 등장하는 분위기는 현대 집단이 사용하는 가장 비겁한 폭력이다. 명시적 규칙도 아니고 공식적 제재도 아니지만, 어떤 사람을 칭찬하면 안 될 것 같은 공기, 그를 두둔하면 같이 이상한 사람으로 묶일 것 같은 정서, 그의 성취를 인정하는 순간 나만 순진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 두려움이 공간 전체를 덮고 있음을 모두가 감지한다. 바로 그 점에서 분위기는 이성보다 오래 남고, 규정보다 은밀하며, 법보다 치명적이다.


악의적 동조는 대개 노골적인 폭력보다는 처음에는 농담이나 가벼운 비아냥, 은근한 눈치, 작고 반복되는 조롱, 설명하기 애매한 표정, 칭찬에 뒤섞인 독과 같은 덧붙임이 출발점이다. 집단은 처음부터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 먼저 대상인 네가 지나치게 눈에 띈다는 것, 네 속도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 네 성취가 이 공동체의 정서를 어지럽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학습시키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이 미세한 압력은 피해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심는다. “내가 정말 너무 나대는 건가?” 퇴행 중력의 가장 잔인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부의 공격보다 먼저, 내부의 자기검열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집단이 이렇게까지 퇴행중력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동조는 생존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실보다 소속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다수 편에 서는 것이 맞는 소수 편에 서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고 느낀다. 이 선택은 비겁함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배제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람은 버리는 것보다 버려지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공동체에서 밀려나는 경험은 인간에게 단순한 사회적 불이익이 아니라 실존적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실을 보면서도 침묵하고, 침묵하다가 결국 동조하고, 동조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자신까지 속이게 된다. 오래 침묵한 사람은 언젠가 자신이 침묵한 이유를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겁했던 방관자는 어느 순간 열성적인 가해자로 변한다.


둘째, 집단은 개인에게 도덕적 면허를 발급해 준다. 혼자서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여럿이 모이면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이는 단순한 용기 상승이 아니라 책임 분산의 효과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한 문장이 개인의 윤리적 부담을 경감한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기류를 대신 전달했을 뿐이라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진다. 이때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악의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사회의 전달자, 상식의 수호자, 공동체의 정화자라고 믿기 시작한다. 악의는 가장 쉽게 공익의 옷을 입는다. 사적인 질투는 부끄럽지만, 공적 정의는 당당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비열함을 고백하는 대신, 그것을 공동선을 위한 발언으로 번역한다.


셋째, 악의적 동조는 집단 내부의 불안을 상호 진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에는 말해지지 않는 결핍이 있다. 노력 부족, 실력의 한계, 변화에 대한 무능, 새로운 기준을 감당할 역량의 부재가 그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한계를 돌파하면, 나머지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정지 상태를 더 이상 환경 탓만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집단은 불안을 공유하고, 그 불안을 유발한 대상을 비난하며 정서적 결속을 만든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저 사람의 태도야.” 이 문장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집단 치료의 왜곡된 형식이다. 그들은 진실을 제거함으로써 평온을 회복한다. 물론 그 평온은 병든 평온이다. 성장을 억압하고 기준을 훼손한 대가로 얻은 안정은 안정이 아니라 정체이며, 정체된 흐름은 오래 지속되면 곧 썩는다.


철학적 관점에서 악의적 동조는 진리를 견디지 못하는 영혼들의 방어 체계다. 진리 앞에서 한 인간의 성취, 집중력, 절제, 몰입, 자기 갱신은 폄범함으로 위장한 수많은 변명을 무력화한다. 그래서 퇴행 중력의 집단은 진실을 도덕적으로 오염시킨다. 이것은 단순한 왜곡이 아니다. 무능이 순박함으로, 나태가 인간미로, 정체가 겸손으로 미화되는 순간, 성장과 도전과 탁월성은 공동체를 해치는 불순물로 재분류되도록 하는 가치 전도의 기술이다. 집단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보호할 수 있도록, 현실을 해석하기 보다 현실의 도덕 문법 자체를 재편한다.


악의적 동조는 강자의 강함을 악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선으로 재명명하는 심리의 연금술이다. 혼자 품고 있던 원한은 질투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박탈감은 연대라는 표어를 붙이며, 공격성은 상식이라는 얼굴을 지니도록 다수의 언어로 포장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누군가를 끌어내릴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제동을 걸고 있다고 믿는다. 개인적 독이 집단적 정의로 오인되는 순간이다.


사회학적으로 이 현상은 모든 집단은 자신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는 것에서 비롯된 집단 규범의 자기 방어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유지 방식이다. 건강한 집단은 뛰어난 개인을 통해 기준을 갱신하고, 그 성취를 공적 자산으로 흡수한다. 반면 병든 집단은 뛰어난 개인을 균열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동일성이다. 집단이 정한 기준에서의 이탈은 곧 위협이다. 그래서 집단은 노골적 폭력보다 더 정교한 방식으로 이탈자를 통제한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다 같이 가야지”, “너무 앞서가면 미움받는다” 같은 말들은 조언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기준을 낮추라는 명령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편안함을 위해 자신의 가능성을 축소하라는 집단적 요구다.


Ⅲ. 침묵은 공범이 된다

악의적 동조의 무서움은 가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중간자들이다. 문제를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사람들, 그 비난이 과하다는 걸 느끼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사람들, 대상이 억울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생존을 위해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집단 카르텔의 실제 기반이다. 적극적 악인은 생각보다 적다. 그러나 소극적 순응자는 많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모든 사소한 폭력과 거대한 잔혹성은 이 순응의 넓은 바닥 위에서 자라났다. 집단의 폭력은 언제나 몇몇 선동자와 다수의 비겁한 협조로 완성된다. 선동자는 방향을 제시하고, 침묵하는 다수는 그것을 제재 없이 통과시킨다. 결국 폭력은 말한 자보다 말리지 않은 자들에 의해 제도화된다.


동조는 단지 압력의 결과가 아니라 인지의 재구성까지 일으킨다. 사람은 반복되는 사회적 신호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저건 과한데”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같은 부정적 암시를 계속 접하면 결국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나?”라고 물으며 인지적 후퇴를 시작한다. 이때 진실은 사실관계에서 결정되지 않으며, 반복 빈도와 사회적 확신의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 결과, 집단의 왜곡은 정보가 아니라 감각으로 스며들고 누군가를 향한 미묘한 냉소, 조용한 배제, 칭찬을 주저하게 만드는 공기, 그 사람 주변에 머무르면 같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징후들이 쌓이면, 구성원은 더 이상 사실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거리 두기를 학습한다. 퇴행 중력은 사람들의 판단이 아닌 반사 신경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악의적 동조는 자연스레 희생양 메커니즘과 결합한다. 집단 내부의 모호한 불만과 불안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면, 설명은 단순해지고 결속은 강해진다. 원래 집단은 서로 다른 욕망과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공통의 적이 생기면 그 복잡성은 일시적으로 봉합된다. 한 사람을 문제의 원천으로 규정하는 순간, 나머지는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이제 무능, 태만, 비겁함, 시기심, 무책임 같은 자신들의 결함을 보지 않아도 된다. 모두의 추함은 한 사람의 ‘문제성’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양은 실제로 죄가 많아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집단의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택된다. 유능함, 성실함, 독립성, 자율성, 높은 기준은 집단의 평균적 자기기만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대개 집단의 불편한 진실이 되었다는 증거다.


집단은 왜 자기보다 나은 이를 파괴하면서도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느끼는가. 그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동기를 직접 직면하기보다, 언제나 더 고상한 내러티브를 구성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는 저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며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 “저 사람은 공동체 정신이 없다”, “혼자만 잘난 듯이 군다”,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사람 보다 성과 우선이다”, “전체 분위기를 해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그 말들이 전적으로 허위라는 데 있지 않다. 더 위험한 것은 그 말들 속에 언제나 약간의 사실처럼 보이는 현상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모든 마녀사냥은 100퍼센트 거짓보다, 15퍼센트의 현상과 85퍼센트의 악의가 섞였을 때 가장 강력해진다. 사람들은 그 15퍼센트를 근거 삼아 자신의 공격 전체를 정당화한다. 퇴행 중력은 언제나 완전한 조작이 아니라, 부분적 현상을 도덕적 흉기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조의 공포가 단순히 약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이 자신을 보존하는 기제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병든 집단은 생존을 위해 진실을 제거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질서를 위협하는 진실을 제거한다. 이 질서는 꼭 효율적이거나 공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익숙함이다. 사람들은 종종 정의보다 익숙한 불의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익숙한 불의는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역할을 이미 알고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의 비범한 성취는 새로운 기준을 요구한다. 그것은 더 많은 책임, 더 높은 긴장, 더 냉정한 자기 검토를 불러온다. 그래서 집단은 흔히 탁월함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미워한다. 탁월함은 늘 새로운 비용을 청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가능성보다 변명을 원한다.


Ⅳ. 조용히 완성되는 카르텔의 서막

퇴행 중력의 사회에서도 먼저 공격자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공격받는 쪽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두려움이 집단 카르텔을 완성한다. 누군가 미세한 실금의 틈 사이로 한 사람을 향한 공격이 시작될 때, 주변인들은 마음속으로 계산한다. 저 사람을 감싸면 나도 저 자리에 설 수 있다. 저 비난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말해도 판세는 바뀌지 않는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안전하다. 이러한 계산은 겉보기에 합리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미세한 자기보존의 합이 전체적인 폭력을 만들어 낸다. 악은 언제나 거대한 결심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사소한 자기보호가 누적되어 형성된다.


그 결과, 집단은 점점 더 도덕적으로 타락하면서도 외형상 더 단단해 보인다.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사람을 문제 삼고, 같은 불편함을 공유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단함은 건강한 결속이 아니다. 그것은 공포의 응고다. 진실을 말하면 고립될 수 있다는 공포, 성취하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 평균을 벗어나면 낙인찍힐 수 있다는 공포가 서로를 조용히 묶고 있는 상태다. 이런 집단에서는 누구도 진정으로 안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늘의 희생양이 사라지면 내일은 다른 희생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긴장 전가이므로, 그 구조는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을 요구한다. 악의적 동조는 결코 한 사람만의 파멸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집단 전체를 질 낮은 안정 속에 가두고, 장기적으로는 모두의 역량을 침식시킨다.


가장 참혹한 장면은 이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악의적 동조를 행하면서 스스로 선의 편에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근대적 군중의 가장 세련된 자기기만이다. 과거의 폭력은 종종 노골적이었지만, 오늘의 폭력은 명분을 갖춘다. 혐오는 공정의 언어를 쓰고, 배제는 공동체 보호의 이름을 갖고, 시기는 윤리의 표정을 띤다. 그래서 피해자는 두 번 고통받는다. 한 번은 실제로 공격받기 때문에, 또 한 번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오히려 사회적 승인과 도덕적 우월감을 누리기 때문에. 공격받는 사람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순간조차 오만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재규정된다. 침묵하면 인정한 것이 되고, 해명하면 구차해지며, 반박하면 공격적이라 평가받는다. 이처럼 악의적 동조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방어 자체를 범죄화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 구조 속에서 개인은 종종 자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적응한다. 말수를 줄이고, 성과를 감추고, 가능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새로운 시도를 미루고, 자신의 확신을 스스로 약화시킨다. 이것은 외부의 패배라기보다 내부의 식민화다. 집단의 목소리가 결국 내면의 목소리가 되는 순간, 퇴행 중력은 완성된다. 더 이상 누가 막지 않아도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집단이 꿈꾸는 최상의 통제는 처벌이 아니라 자가 검열이다. 굳이 사슬을 채울 필요가 없다. 대상이 스스로 날개를 접으면 된다. 그래서 악의적 동조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같다.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축소를 학습시키는 것. 상대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고도를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집단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이 진실의 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독선적 개인도 있고, 공동체를 실제로 해치는 인물도 있다. 문제는 퇴행 중력의 집단이 그런 구분을 할 능력 자체를 상실한다는 데 있다. 병든 집단은 실제 해악과 불편한 탁월함을 구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판단 기준은 객관적 해악이 아니라 정서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누가 공동체를 파괴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우리의 열등감을 자극하는가가 판단의 실제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집단은 무능한 아첨꾼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성실한 혁신가에게는 유독 잔인하다. 전자는 기준을 위협하지 않지만, 후자는 비교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악의적 동조는 공동체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공동체를 서서히 썩게 만드는 자기 면역 질환에 가깝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가능성을 공격하고, 해로운 이물질이 아닌 성장의 징후를 제거하며, 건강한 세포를 비정상으로 간주해 배제한다. 그 결과 처음에는 조용해진다. 비판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튀는 사람이 줄고, 불편한 기준이 제거되며, 모두가 무난하게 비슷해진다. 집단은 이를 성숙, 안정, 화합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활력이 사라진 것이다. 질문이 사라진 공동체는 죽어가고 있는 공동체다. 혁신은 불편함을 통해 오고, 기준 상승은 긴장을 동반하며, 진짜 연대는 동일함이 아니라 차이를 견디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런데 퇴행 중력은 바로 그 차이를 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악의적 동조가 승리한 공동체는 겉으로 조용할수록 내부적으로는 이미 패배한 상태다.


Ⅴ. 연대는 하강의 계약

혼자는 두렵지만 집단은 당당하다. 이 문장은 단순히 군중의 비겁함을 비웃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윤리를 타인에게 위탁하는지를 드러내는 비극적 진술이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선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더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다. 특히 그 함께 있음이 진실에 대한 공동 탐구가 아니라, 불안의 공동 은폐로 조직될 때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노골적인 악인만이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불안이 만든 온건한 폭력, 상식의 얼굴을 한 배제,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이뤄지는 기준 파괴다.


퇴행 중력에서 악의적 동조란, 열등감이 서로의 눈빛 속에서 정당성을 얻는 순간 발생하는 집단적 중력장이다. 그 안에서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악의를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 그는 분위기를 따른다. 모두가 그렇다고 느낀다. 괜히 나섰다가 손해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해서 질투는 발화되지 않은 채 증폭되고, 증폭된 감정은 명시되지 않은 채 규범이 되며, 규범은 결국 한 사람의 가능성을 눌러버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된다. 이 손은 법전에도 없고 규정집에도 없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징계보다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 강제가 아니라 소속 욕망 자체를 인질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의적 동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군중의 어리석음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왜 많은 사회와 조직과 업계와 공동체가 유능한 사람을 길러내지 못하고, 길러내도 붙잡지 못하며, 붙잡아도 결국 침묵시키는지를 해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해명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냉혹한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집단은 언제나 정의롭지 않다. 다수는 언제나 성숙하지 않다. 공감은 언제나 선하지 않다. 함께라는 말은 언제나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무엇을 함께 하느냐에 따라 가장 고귀한 연대가 되기도 하고, 가장 비열한 사냥이 되기도 한다. 퇴행 중력 아래서 함께는 종종 상승의 약속이 아니라 하강의 계약이 된다.


그 계약의 조항은 간단하다. 혼자만 빛나지 마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마라. 우리가 포기한 것을 해내지 마라. 우리의 변명을 무효화하지 마라. 우리가 감당하지 못한 삶의 밀도를 네가 증명하지 마라. 그리고 만약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우리는 너를 단지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를 문제로 만들 것이다. 공동체를 해치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지나치게 이기적인 사람,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으로 호명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 자신도 네 가능성을 죄처럼 느끼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악의적 동조의 본질이다. 그것은 폭력 이전의 심리이고, 제재 이전의 공기이며, 처벌 이전의 합의다. 혼자서는 차마 인정하지 못할 열등감이 집단 속에서 공적 확신으로 변하는 과정, 사적인 질투가 사회적 정의의 옷을 입는 과정, 불안한 개인들이 서로의 비겁함을 확인하며 하나의 카르텔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카르텔이 가장 먼저 제거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한 자가 아니라, 기준을 높이는 자라는 사실. 바로 여기에 퇴행 중력의 가장 차갑고도 정교한 진실이 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7화그들은 왜 생산적인 경쟁보다 파괴적인 비난을 선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