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와 석굴암
90년대부터였는지, 88 올림픽 이후였는지 혹은 더 오래전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의 수학여행지이자 소풍지인 경주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어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학창 시절에는 그 기억이 없다. IMF라는 비극이 수학여행의 추억을 통째로 앗아갔기 때문에. '수학여행= 경주'라는 공식이 내게는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녔을 다수의 친구들에게는 성립되지 않았다.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이 아니라 동해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 나도 이번 니스에 와서 지중해를 보고 어제는 배도 타봤습니다만 우리 동해바다처럼 그렇게 푸르고 맑지가 못했습니다. -김환기 '편편상'(1961.9)-
성인이 되자마자 타국으로 떠났던 나의 경우도 그렇다.
화려하고 멋지고 미친 듯이 섬세하고 장대하기 이를 데 없는 유럽의 도시들을 바라보며 반짝이던 두 눈은 금세 그 동경하던 빛을 잃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노랗고 푸르고 붉고 하얀 한국의 사계절이 점점 더 또렷이 그리워졌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한옥의 대청마루에 앉아 세월을 먹어가는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마침내 우연한 기회로 미지의 도시, 경주로 향했다.
서울에서 떠나 늦은 시각 터미널 주변에 도착하자 컴컴했던 차창 유리가 서울 곳곳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모텔들의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 찼다. 당혹스러웠다. 무얼 기대했던 걸까? 난데없이 21세기에서 시간여행이라도 간 듯 목조건축물로 꽉 찬 18세기 마을이길 바란 걸까. 수백 년 전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독일의 로텐부르크나 영국의 셰익스피어 마을처럼 아마도 경주 또한 천년고도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모텔마저도 기와집에 주련이 걸린 그런 도시이길 기대했었나 보다.
딱 하루밖에 없는 시간 동안 경주를 다 볼 수는 없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기대에 기대를 쌓아왔던 곳, 두 곳을 이 짧은 여행의 주요 목적지로 삼았고 그건 누구라도 그럴 것인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가이드를 자청한 고마운 친구를 따라 새벽같이 일어나 불국사로 향했다. 한정적인 시간도 문제였지만, 유럽을 여행하며 어딜 가나 북적이는 관광객들 속에 섞여 혹은 떠밀려 다녔던 것이 지겨웠던 터라 일부러 서둘러 나섰다. 뺨에 닿는 경주의 공기가 차갑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고속버스와 차량들을 위한 어마어마한 텅 빈 주차장 부지는 불국사가 어떤 존재인지 벌써 보여주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한국의 사찰들을 다녀보지 못한 탓에 비교대상은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아닌 운치 있는 정겨운 안내소를 마주하니 어제 밤에 본 선명했던 네온 불빛들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티브이로만 봤던 소원을 적는 기와장은 왜 그리 신기하고 반가웠는지. 정체모를 구불거리는 외국어들과 영어가 쓰인 기왓장들이 많아 흐뭇한 마음에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은 깊었다. 그리고 향긋했다.
이른 아침의 물기를 먹은 차가운 공기는 불국사 가득한 나무와 흙의 냄새를 싣고 있어 숨을 내쉴 때마다 폐부 깊은 곳까지 치유되는 듯하다. 월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는 길은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 근정전으로 가는 길목과 비슷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국 전통 건축 중 그나마 좀 가본 곳이 경복궁과 창덕궁이니 비교대상이 자연스레 궁이 된 것 일터. 불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갔다면 보이는 것이 또 달랐을 것인데 안타깝다.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석축은 마치 불국토에 오르는 길처럼 장엄하게 나타났다. 아직 인적이 드물어 이 길과 불국사의 품을 오롯이 우리 일행만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자하문을 지나니 교과서와 동전에서 보던 그 탑들이 나타나 반갑고도 기분이 묘하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벌떼처럼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까치발을 들고 멀리서 몇 초가량 슬쩍 보고 말아야 했던 것에 비하면, 경내를 독차지 한채 실컷 탑 주위를 맴돌며 감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호사를 누리는 게 아니었다. 천수백 년 전의 예술품을 말이다. 석가탑은 도굴과 보수공사로 인해 상처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애잔한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버티고 있는 모습이 참 짠하다. (2016년 보수 공사를 마침)
불자는 아니나 불국토에 왔으니 세월이 고스란히 보이는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인사를 드린 후 경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신라인들이, 조선인들이 다녔을 돌계단에 앉아 내려다보니 불국토는 이렇겠구나 싶다. 마당을 쓰는 스님의 풍경, 곡선과 곡선이 겹쳐진 기왓장들 , 토함산의 자연 속에 그대로 안겨진 사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속에 내가 앉아있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단청, 기하학적으로 쌓여있는 석축, 색이 바래고 낡은 나무틀, 불국사의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세월을 품고 또 품었기에.
불국사를 계속 맴돌던 우리는 관람객들이 늘어나자 지체 없이 석굴암으로 향했다. 높은 계단이 이어진 중턱에 범종이 있어 번갈아 한 번씩 타종을 하며 그 소리에 또 즐거워했다. 수십 개의 소원을 품은 색색 연등들이 안개에 휩싸여 마치 연꽃이 구름 사이로 둥둥 떠있는 듯하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길은 토함산 산길이라 그런지 이른 아침의 안개가 더욱 자욱했다. 인적이라고는 하나 없고 울창한 나무들이 높게 뻗어 있었다. 그 사이로 피어오른 하얀 안개로 인해 가시거리마저 짧으니 마치 구름 속을 거닐고 있는 듯하다. 축축한 숲의 냄새를 그득그득 마시며 석굴암으로 향하는 그 길이 너무 신비로워 우리는 얌전히 걸을 수가 없었다. 두 팔을 벌려 토함산의 안개를 한껏 안으며 날듯이 뛰어올라도 보았다. 누군가가 '이곳이 바로 극락정토라네' 한다면 '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다'며 무릎이라도 '탁!'치고 싶은 심정으로. 아무래도 신라인들은 석굴암으로 가는 길을 의도적으로 이리 신비로운 곳으로 골랐나 보다. 비루한 중생들의 부처님 뵈러 가는 이 길이 극락정토인 듯 느끼게 해주려고.
드디어 오랫동안 내게는 미지의 세계였던 석굴암의 실체를 마주할 순간이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거 아니다. 실망할 거다. 볼 거 없다'라 하였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감동적이라고 말했었다. 기대하고 싶지도 실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석굴암 앞에 선 나는 어느새 감격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미처 전해받지 못했던 감동이 석굴 안에 가득차더니 부조들 하나하나를 돌아 가슴속에 일렁이다 불상의 엄중한 듯 온화한 표정에 머물자 슬쩍 눈물이 되어 올라왔다. 둥그렇고 물컹한 촉감이 느껴질 듯한 석불상의 그 부드러운 곡선은 은은한 빛을 품으며 마치 부처님의 전신을 타고 물처럼 흐르는 것 같았다.
석굴의 한 가운데에 서서 온 몸으로 그 신비로움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유리벽 너머였다. 그나마 관람객이 적어 꽤 오랫동안 석굴 내부를 감상할 수 있던 것으로 만족을 하고 석굴에서 나오자 마치 꿈에서 깬 듯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져있었다. 눈 앞의 모든 것이 명확한 현실로 돌아왔다.
천여 년 전의 신라인들이 혼을 다해 돌과 나무를 빚고 토함산은 숲과 안개를 지어 조금 늦게 찾아온 21세기의 하찮은 인간에게 불국사와 석굴암을 고요히 내어 주었다.
인간과 자연이 완벽하게 이루어낸 극락정토.
남는 시간을 쪼개 대릉원을 돌며 경주는 과연 '천년고도구나, 천년고도구나'라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다 다음에 다시 오기 위해 아쉬움을 남겨두고 터미널로 돌아갔다.
불국사와 석굴암으로의 짧은 여행은 그랬다. 극락을 다녀온 듯, 꿈을 꾼 듯, 마음을 위한 늦은 수학여행이었던 듯.
손에는 친구 덕에 얻은 찰보리빵 한 상자가 달랑거리며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