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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에서 벌어진 토막살인

[서평] 별세계 사건부

by Caseinate

[서평] 별세계 사건부

1920년, 경성은 근대화를 온 몸으로 겪고 있었다. 전차가 지나다니면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극장 단성사에서는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었다.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 멋을 낸 모던 보이들과 서양식 옷을 입은 모던 걸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기술을 배워서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잡지사와 신문사가 세워졌다.

외곽에는 아직도 한옥집이 남아 있었지만, 한양 남쪽의 진고개라고 불리던 본정 지역은 번화가가 되어 서양식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경성은 근대화에 따라 들어온 신문물과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한데 어우러지는 도시였다.


대부분의 경성 사람들은 재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밤새 음식을 팔러 다니며 집주인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취업 청탁하는 법이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근대화가 진행중인 도시에서 사람들이 가진 욕망은 불타올랐다.


한편, 경성은 조선인들에게 불친절한 도시였다. 일본인 순사들이 조선인을 위압적으로 대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버리지 않았다. 조선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조선인을 불령선인으로 몰아서 조사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근대와 억압이 공존하는 경성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한 토막 살인 사건이다. 10여년 간의 공사가 끝나 완공을 앞둔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조선인 건축가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한자 대자로 흩뿌려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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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계 사건부: 조선총독부 토막살인>은 192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 소설이다. 조선총독부 공사 완료를 10일 남기고 발생한 살인 사건이 주된 소재다. 주인공은 공사가 끝나기 전인 10일내에 조선인 건축가의 처참한 죽음을 조사해야 한다. 셜록 홈즈를 좋아하고, 정탐에는 일가견이 있는 기자 류경호가 주인공이다.

가상의 잡지 <별세계>의 기자 류경호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조선인이다. 그는 일본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인재로 최남선의 신문 <시대일보>에서 일했다. 날카로운 추리력을 바탕으로 사건을 조사한 덕에 많은 이들을 도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까닭에 남모를 외로움과 고독을 가진 사람이다.

잡지 <별세계>에서 원고를 쓰며 지내던 류경호에게 최남선이 찾아온다. 최남선은 합리적인 증거에 따라 추리하는 능력을 가진 그에게 사건의 조사를 부탁한다. 최남선은 조선인 건축기사 살인사건에 대해 말하고, 류경호에게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줄 것을 부탁한다.


최남선은 일제가 살인 사건의 관련자들을 의심하고 쫓아내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면, 총독부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다 쫓겨날 판이니 조선인들을 위해서라도 사건을 맡아달라고 말한다. 류경호는 최남선이 일제에 취하는 협력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받아들인다.


“조선인이 죽었는데 왜 다른 조선인을 쫓아냅니까?” “총독부 안에서 대한제국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벌어졌네. 일본으로서는 제일 피하고 싶어하는 일이지. 밖으로 터트릴 수도 없는 일이라면 가장 좋은 건 관련자들을 다 쫓아내는 거지. 살인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영악한 놈이야.” -30P


책에는 경성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책을 읽다 보면 온갖 변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한 도시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노력에 대해 생각하게 될 정도다. 저자는 세밀한 고증을 위해서 잠입취재에 관한 야간 탐방기를 참고하며 소설을 썼다. 최남선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켜 배경의 현실감을 더했고, 건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당대의 모습을 그려냈다.


먼지로 얼룩진 창문 너머로 종로경찰서가 보였다. 고종이 조선에 전차와 전기를 들여오기 위해 세운 한성전기회사의 사옥이었던 건물은 이후 주인이 몇 차례 바뀌었다가 지금은 경찰서로 사용되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만든 2층짜리 건물은 모서리와 창틀을 대리석으로 처리해서 눈에 확 띄었다. 거기다 정문위 지붕에서 둥근 돔 형태의 첨탑이 세워져 있는데 사방에 원형시계가 붙어 있었다. -49P


역사적 배경을 잘 살린 덕에, 소설에 그려진 시대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학파이지만 일제에 타협하는 최남선을 경계하고, 비판 의식을 버리지 않는 주인공 류경호의 인물상 역시 매력적이다. 돈을 받기 위해 손님을 기다리는 인력거꾼과, 잠입 취재를 위해 야밤을 헤매는 기자들의 모습은 근대를 살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주인공과 독자는 조선총독부 건물과 경성 본정, 용산역을 헤매게 된다. 시대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을 좇다 보면, 배경에 숨겨진 사건의 단서가 보인다. 신문화의 활기와 일제의 어둠 속에 숨겨진 인간들의 욕망이 빛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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