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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pr 26. 2023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교육이란 무엇인가

20세기 전부터 아이들은 감옥 같은 초, 중, 고에서 매를 맞아가며 시험을 치고, 일정 규격의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 이유는 산업화 시대의 역군, 또는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근대 학교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거대한 국가의 군사. 경제 안에 맞춰 들어갈 수 있는 부품이 되기 위한 단계였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도 그 여파는 계속 남아있다. 아직도 아이들의 행복이나 자아실현보다는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시험점수를 높게 받기 위한 것이 학교 교육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1884년 이탈리아의 카를로 콜로디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한 동화로 소설 <피노키오>를 썼다. 말하는 나무조각이 살아나고, 예의와 교육을 받지 못한 피노키오는 제멋대로 행동한다. 피노키오가 저지른 일들에는 책임이 뒤따르고, 쾌락과 탐욕을 그치고 선행을 하면 '진짜 사람 아이'로 된다는 이야기다. 1940년,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만들었다. 여기서는 피노키오의 귀여움을 더 강조하고, 인간 아이가 되기 위한 목표를 더 뚜렷하게 그려서 대히트를 쳤다.


하지만 최근, 디즈니에서 <피노키오>를 실사로 리메이크 했다. 그러나 디즈니의 <피노키오>는 혹평을 들으며 최악의 영화에 선정되었다. 그건 단순히 디즈니가 파란 요정에 흑인을 캐스팅해서 뿐만 아니다. 고전은 그 시대의 철학이 담겨있다. 디즈니는 고전의 철학에 현대의 정치적 중립성만 넣으면 현대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에 비해,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정말 현시대에 맞게 멋지게 <피노키오>를 재해석하는 대담함을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다.




파시즘적인 교육

원작 <피노키오>는 말하는 나무인형이 인간이 되는 이야기다. 말하는 나무인형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이다. 마리오네트란, 인형사가 조종하는 실로 연결된 인형이다.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마리오네트가 나오는 인형극으로, 주로 성경이야기를 통해 어린이들을 교육했다. 다시 말하면 <피노키오>는 그 마리오네트가 줄도 없이 움직이므로 고분고분히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고, 결국 말 잘 듣는 착한 인간이 된다는, 19세기 당시로 아주 교육적인 동화이다.


19세기 후반은 2차 산업혁명 시기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식민지 개척이 활발했고 제국주의가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국가와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산업역군양성이 교육의 목표였다. 원작에서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기 위해 선행을 해야 한다. 제페토의 말을 듣지 않고 날뛰던 피노키오는 점점 어른들이 바라는 '인간 아이'가 되어간다.


기예르모 델토로는 이러한 원작의 교육적 목적을 비판하기 위해, 시대적 배경을 20세기 초로 바꾸었다. 이 시기 <피노키오>의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는 파시즘이 국가이념일 때였다. 파시스트들은 피노키오를 '독립적인 불온분자'라며 경계한다. '그 꼭두각시 인형이 지역 사회를 위협하지 않도록 확실히 해야겠소'라는 시장의 말은, 독립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파시즘 사회가 어떻게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파시즘은 사회주의, 전체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1당 독재이고 혼자 남들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노키오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보고 나라에 그 능력을 바치라며 청소년 군사 캠프에 입학시킨다.


파시즘은 100년 전 이탈리아의 이야기지만, 이 시절의 학교 문화는 거의 지금도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높은 점수를 받아 인정받는 학과에 가고, 돈을 많이 버는 안정된 직업인 판검사나 의사가 되는 것이다. 자아를 찾거나, 행복한 삶을 위한 교육은 일부 대안학교를 통해서 실험적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의 시스템 자체가 아직 그것을 다 받쳐주지는 못한다. 아이들은 여전히 입시와 취업에 시달린다. 한국은 OECD국가 중 높은 수치로 자살률 1위다.


기예르모 델토로는 <피노키오>를 통해서, 원작이 가지는 철학이 전근대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아이들이 더 행복하게 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동화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나 사회나 신이 바라는 대로 사는 것이 과연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무인형인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는 것이 정말 피노키오에게 행복한 것인가?



부모가 바라는 대로의 삶

제페토는 원래 말을 잘 듣는 사랑스러운 자식 카를로가 있었고, 그를 사고로 잃게 된다. 제페토는 하염없이 슬퍼하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광기에 서려 자식을 묻은 곳에서 자라난 나무를 베어 나무인형을 만든다. 이 과정 또한 기예르모 델토로의 새로운 해석이 돋보인다. 그는 피노키오의 탄생을 마치 공포물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기예르모 델토로가 공포, 크리쳐물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신성한 계획보다는, 충동적이며 때로는 공포스럽기까지 한 일이라는 것을 잘 드러낸 장면이다. 아이는 갑작스럽게 태어나 부모의 인생을 180도 달라지게 만든다.


그만큼 많은 부모들은 사실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소수의 부모들은 현명하게 아이들을 키우지만, 대부분은 올바르게 가정교육을 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가진 '자식'의 이데아를 주입하기 급급하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제페토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전에 죽은 자신의 아이를 계속해서 언급하며, 그 아이는 착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말썽을 부리느냐고 괴로워한다.


한국 사회는 자식이 부모의 꿈이나 교육을 무시하고 살 수가 없다. 부모가 '이 대학에 가''이 과에 지원해''이런 직업이 되어야지'라는 말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공부에 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사이가 나쁘지 않을 경우도 문제다.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며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경우 또한 많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을 통해 성취하려는 일부 좋지 않은 부모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길 바란다. 자식에게 대학이나 직업을 강요하는 이유는 그래야 자식의 미래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서다. 사실 원하는 것을 하고 행복하게만 산다면, 부모는 마음속으로는 더 만족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부모는 그들이 살던 시대의 사람이다. 자식이 사는 시대와 다르다. 아무리 현명한 부모라도 자식의 앞길을 다 알고 미리 닦아주지는 못한다. 내 미래를 부모에게 기대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고, 부모의 꿈을 내 꿈인 것처럼 안고 가서도 좋지 않다.


피노키오는 자신의 특별함을 서서히 깨닫는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로서 충분하다

원작에서 파란 머리의 요정은 피노키오에게, '선행을 하면 인간이 되게 해 주겠다'라고 한다. 지금의 나무인형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이 엄청난 특권인 셈이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에서 '가디언'이라 불리는 푸른색의 요정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애초에 생명이 깃들 수 없는 것에 깃들어 생명을 가졌으므로, 죽을 수 없다고 한다. 대신 죽어서 저승에 가면 시간을 기다렸다가 살아나야 한다. 즉 피노키오는 불사신이다. 그리고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노키오는 일부러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피노키오는 자기 나름대로 아빠인 제페토를 생각하고, 말을 잘 들어 제페토를 기쁘게 해주고 싶지만, 그 순수한 마음을 어른들이 이용하기에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피노키오는 결국 제페토가 위험에 빠졌을 때, 피노키오는 시간이 촉박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룰을 깨고 바로 되살아날 수는 있지만, 가디언이 말하길 그렇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 생이 될 것이라 말한다. 제페토를 위해 영생을 포기해야 한다. '인간다워져야'한다. 진짜 인간이 될 수는 없지만, 죽음으로써 인간다워질 수는 있다. 자신이 죽지 않고 매번 되살아나는 것을 꽤나 좋아하던 피노키오는 룰을 깨고, 자신의 영생을 버린다. 그리고 그 마지막 생의 목숨을 바쳐 제페토를 구한다.


원작의 피노키오는 모든 여행 끝에 착한 아이로 거듭나, 이전과 다른 진짜 사람 아이가 된다. 그러나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 제페토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죽는다는 것이 바로 인간다운 것임을. 자신의 아들 카를로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를 바라서 피노키오에게 카를로처럼 되라고 강요했지만, 카를로가 죽은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마지막이었음을. 이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피노키오에게 인간 아들이 되어달라고 강요했던 자신의 잘못을, 모두 깨달았다. 귀뚜라미의 말처럼 피노키오는 원래부터 착했다. 착해져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어른들이었다.


어딘가 부족해 보이고 성에 차지 않아도, 아이는 부모의 대리자가 아니다. 나와는 다른 생명체다. 아이가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해, 내가 바라는 무언가가 되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피노키오처럼 제 장점을 잃어버리고, 결국 생명을 깎아먹는 일이다. 19세기말에 태어났던 <피노키오>와 지금의 <피노키오>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면, 바로 그런 한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너는 너인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게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동화인 것이다.


한 아이를 교육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 산업화 시대에서 교육은 폭력적이었다. 우리는 그 교육을 받고 자라서, 내가 나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하게 컸다. 행복하게 키우고 싶어도, 막상 부모가 되어보면 사회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제페토가 마지막으로 피노키오에게 했던 말을.


"내가 널 다른 아이로 만들려고 했구나.

이제, 카를로가 되지도 다른 누군가가 되지도 마라.

네 모습 그대로 살아.

나는...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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