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4가지 방법

그런데 사실 언제나 꽉막힌 건 나였어

by 카시모프

그림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원본을 밑에 대고 그린 그림(트레이싱)

2. 사진이나 다른 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

3. 실물을 보고 그린 그림

4. 상상해서 그린 그림.


1 -> 4번의 영역으로 갈수록, 창작자의 그림실력이 드러나며 훨씬 어렵다. 1은 거의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2는 그림을 배우지 않았어도 잘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3은 입체를 평면에 표현하는 데생의 영역이고, 4는 오롯이 창작의 영역이다.


1은 사실 창작이라고 하기엔 대놓고 베끼는 행위라 그걸 왜 넣느냐 라고 하기 쉽지만, 요새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이게 과연 트레이싱이냐 아니냐로 창작을 훔쳤냐 아니냐가 판명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이슈다. 참고사진이 있었더라도 보고 참고한 거랑 대고 베낀 것은 그 사람의 창작의 수준이 굉장히 낮다는 걸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체를 미술에서 다르게 활용하는 방법들도 있긴 하지만. (빔프로젝트로 입체에 쏴서 작품을 만들어, 입체공간에 한 지점에 가면 의미 없어 보이는 선들이 특정한 작품이 되도록 한다거나, 서양에선 어둠상자를 이용해 실제로 거꾸로 상이 비치는 모습을 활용해 그림을 그렸다던가.)


2번의 경우에도 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사진이나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정밀묘사'는 미술학원을 다녀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영역은 아니다. 일반인은 사진 보고 똑같이 그려내면 금손이라고 하면서 칭송하지만, 데생은 1년을 그려도 감도 못 잡는 경우가 많은데 정밀묘사는 1개월이면 대충 그럴듯하게 해낼 수 있다. 정밀묘사 때 쓰는 테크닉은 사실 '입체를 평면으로 재해석하는'능력과는 좀 다른 걸 요구한다. 사물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색과 형태로 인식하면서 그리면 정말 똑같이 나온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하이퍼 리얼리즘'처럼 작품의 크기나 의미에 따라 미술에서 다른 영역으로 작품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 자체를 폄하하는 건 아니고, 그림을 배워가는 입장에서 방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3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리 좋아하던, '입체를 평면에 옮기는' 테크닉이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서는 안 되며, 빛과 그림자와 물질의 성질과 공간감과 구도 같은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지식과 테크닉이 모두 들어가야 한다. 때에 따라선 해부학이, 때에 따라선 물리학이, 때에 따라선 역사와 심리학이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선 4를 위해서 참고자료로 3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고 그리는 경우도 많다. 빛과 그림자를 이해하는 데생 수업은 주로 3으로 한다. 2와 뭐가 다를까 싶지만, 확실하게 다르다. 2는 이미 평면으로 창작된 걸 재가공하는 것이고, 3은 1차 창작인 셈이니까.


4는 1,2,3을 거치며 그동안 내가 배우고 알아왔던 모든 것의 집합체다. 보지 않고도 인물을 그리고 세상을 그려내고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지식과 테크닉, 창의성이 모두 최고여야 한다. 창작자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3이나 4야말로 진정으로 작가라 불릴 수 있는 것 아닐까.


-라고 그림을 배우며 생각해 왔다. 그런데 요새 어린 일러스트레이터들 보면, 아이패드로 그림 그린다면서 뻔히 연예인 화보집 베낀 게 티가나는데 그런 걸 뭐하러 그리고 있나, 왜 저런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칭찬받고 유명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물론 그중엔 정말 사진 베낀 게 티가 나서 논란이 되는 작가들도 있지만, 난 그런 건 그냥 부끄러움을 참고 맘먹고 그리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엔 뭘 따라 그려 본 적이 별로 없다. 흔하게 생각하는 좋아하는 연예인 그리는 것도 사진 보고 그려본 적이 아예 없다.


그건 그림에 관한 내 꼰대스러움이다. 사실 예쁘면 그만이 아닐까 싶지만, 내가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거야'라며 레퍼런스 등을 잘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아집은 사실 다른 영역에도 미친다. 내 그림은 좀 부끄럽더라도 내가 보고 듣고 익힌 것이 나라는 사람 안에서 버무려져서 손끝으로 재탄생되어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거.


그런데 사실, 창작자라고 하면서 막혀있는 건 나였다. 무엇이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기법, 다양한 표현들을 보고 배우고 수용해야 발전이 있는 건데, 그리고 그 방법에서는 1도 2도 필요할 때가 있는 건데, 내가 나를 가로막고 있는 거였다. 여전히 돈 받고 파는 그림에서는 1은 안된다 생각하고, 2는 참고까지만 가능하고 지양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창작자의 아집'이란 것이 도자기처럼 굳어져 버리게 만들었다. 그건 나에게도, 내 그림에게도, 내 다른 작품들에게도 몹쓸 짓이었던 거다. 어쩌면 내가 발전이 더디다는 걸, 그런 틀을 만들어 놓고 감추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예전에 연습장에 그려봤던 베네딕트 컴버배치




이제는 도자기를 깨고 부드러워질 때가 온 거다. 무엇이든 한 계단 더 위로 올라가려면.


...그리고 생각해 보면, 언제 저렇게 재미있게 생긴 오이아저씨가 실제 내 눈앞에서 모델이 되어 주겠는가 싶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20년 넘게 일해온 일들을 담은 <불멸의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사는 법> 브런치북도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uddfreel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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